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푸치 Mar 01. 2024

특수학교, 내가 왜?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몰랐으니까.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고등학교 원서 접수 기간이 되어 담임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복도로 불러 1:1 상담을 하셨다.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내가 갈 수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어떤 특정한 기술을 배우는 전문계 고등학교에도 관심이 없어 마음속으로 인문계 고등학교로의 진학을 담아 두었다. 사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신체적 제약이 많은 내가 그릴 수 있는 미래는 좁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때 당시 우리 지역은 뺑뺑이로 학교를 배정했기에 성적이 좋지 못해도 인문계 고등학교를 노려볼만했다. 한 명 한 명 상담이 끝나고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어 복도로 나가 책상 하나에 선생님과 마주 볼 수 있게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해본 적이 많이 없기도 하고 1:1 진로 상담이다 보니 긴장이 되었다. 썰렁한 날씨 탓에 더 긴장되어 있던 나에게 담임선생님께서는 따뜻하게 말씀하셨다.


“마푸치는 혹시 어느 정도 보이니?”




내 어린 시절 단편적인 기억들을 조합해 봐도 나는 잘 보였던 적이 없었다. 꼬꼬마시절 동네 친구들과 숨바꼭질이나 총알 싸움을 했을 때도 거리가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되면 친구들이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했다. 포켓몬스터 고무딱지 모으기가 유행할 때도 고무에 그려진 캐릭터를 구분하기 어려웠고 유치원 졸업사진을 찍을 땐 카메라 기사님이 카메라 렌즈를 보라고 했지만 나는 카메라 렌즈의 위치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유치원생 때부터 안경을 꼈지만 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당시 병원에서는 눈이 나쁜 이유를 찾지 못했고 안경을  껴도 잘 보지 못하는 약시라고 했다. 가족, 친척, 그 외에 내 주변에는 그 누구도 눈이 나쁜 사람이 없었고 나는 태어나 잘 보였던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내 주변 그 누구도 장애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특수교육이라는 것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철저히  시각적으로 어려움이 있던 내게 전혀 배려되지 않고 고려되지 못한 환경에서 방치되고 상처로 뒤범벅된 매일을 보냈다.




안경을 껴도 잘 보이지 않으니 안경은 엄마에게 혼이 날까 무서워 등하굣길에만 착용하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엄마는 유독 눈에 대해서는 조금 냉정했다. 나는 별 도움도 안 되는 안경을 너무나도 싫어했다. 한 번은 명절 때 경북 봉화에 있는  할머니 댁에 모르고 놓고 온 척 놔두고 온 적도 있다. 결국 들켜서 다시 차를 후진해 찾으러 가서 나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근데 이런 속도 모르고 엄마는 내가 나중에 눈이 아예 안 보이게 되면 밥그릇에 똥을 줄 거라고 말했다. 그러니 똥인지 밥인지 구분 못하게 되지 말라고 말이다. 나는 어린 나이에 아무리 그래도 딸한테 너무하네라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아니 똥이면 냄새가 나잖아? 하는 다소 현실적인(?) 생각도 했다. 아무튼 우리 엄마는 두렵고 무서웠던 거다. 자신의 딸이 더 아플까 봐 정말 영영 보이지 않게 될까 봐. 그렇지만 그런 걱정되고 속상한 마음을 어떻게 전달하고 풀어나가야 했는지 몰랐을 뿐이다. 그리고 엄마도 장애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이었으니까. 엄마의 세계엔 그런 영역에 발을 들일 일이 없었으니까. 몰랐으니까. 그렇다. 몰랐기에 안경을 툭하면 벗는다고 텔레비전을 가까이 본다고 그래서 눈이 나빠졌다고 혼도 많이 났다. 그러니 나는 등하굣길에는 안경을 잘 쓰는 착한 딸 코스프레를 하다가 엄마의 시야에서 내가 보이지 않을 곳에 오게 되면 재빨리 안경을 안경집에 그리고 실내화주머니 앞쪽에 쏙 집어넣어 버렸다.

 



나를 낳은 우리 엄마도 내 눈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내 눈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기에  나는 선생님의 물음이 반갑게 느껴졌다. 그래서 복도에 걸려있는 게시판에 눈높이를 맞추며 대답했다.


“글씨가 눈높이에 맞으면 보이고 눈높이에 맞지 않은 위에 있는 글씨는 안 보여요.”




중학생 때의 시력은 잘 몰랐지만 일반적으로 하는 시력검사표의 맨 위의 글씨를 잘 식별하기 어려웠으므로 0.1 이하였고 교과서의 글씨는 모양을 추측하며 요리조리 고개를 돌려가며 확인했다. 칠판의 글씨는 당연히 보이지 않았고 태어나 판서를 보고 필기를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도 결과는 당연했고 초등학생 때는 몇몇 선생님의 배려로 앞에 나와 공책을 칠판에 붙이고 알림장을 받아 적었다. 옆에 있는 친구의 공책을 빌려도 필기한 글씨가 보이지 않아 일부러 받아쓰기 놀이를 빙자해 내용을 받아 적기도 했다.



오죽하면 학창 시절 내 소원은 칠판에 판서되어 있는 글씨를 예쁘게 공책에 옮겨 적어보는 일이었다. 책 읽기 순서가 되어 책을 읽어야 할 때 친구들 앞에서 또박또박 책을 읽어보는 것도, 조별끼리 함께 문제를 풀어야 했던 유인물도 같이 보며 풀고 싶었고, 학기말에 선생님이 틀어주시는 외국 영화의 자막도 보고 싶었다. 또래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학교 생활 하나하나가 나에겐 소원이었고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듣게 된 이야기가 있다. 내가 늘 선생님이 시키는 책 읽기를 못하니까 학생들 사이에서는 내가 글씨를 모르는 까막눈이란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고 한다. 누가 알았겠는가 과거 까막눈이 미래 국어 선생님이 되어있을지 말이다.  아무튼 나는 상당히 시력이 나쁜 아이였고 담임선생님에게는 교실 내에서 숨겨질 수 없는 학생이었다. 다만 나 말고 관리하고 살펴야 할 학생들이 너무나도 많아 나라는 학생을 선생님들이 신경을 못 쓰고 기억을 못 하셨을 뿐.




어린 나이에 선생님께 그 대답을 하고 어떤 말을 듣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담임선생님께서 하신 말은 내게 커다란 상처로 다가왔다.


“이번에 고등학교는 특수학교에 가보는 게 어떻겠니?”


고등학교라면 인문계와 전문계만을 생각했던 내게, 선생님은 특수학교라는 평소 발음해 보지도 못한 낯선 단어를 건네셨다. 가끔 텔레비전에 특수학교 학생들이 나와 악기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선생님의 말을 듣고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특수학교? 아니 근데 잠깐만, 특수학교는 장애인이 가는 곳이잖아? 나는 장애인이 아닌데? 내가 장애인인 건가? 나는 장애인도 아닌데 왜 내가 장애인들이 다니는 곳을 가야 하지?’


다소 반항심마저 들었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내가 이렇게 보인다고 나를 장애인이라고 단정 지어버리시나?라는 생각에 속상해 눈물이 났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당혹감과 부정이 뒤섞였던 듯하다. 왜냐하면 나조차도 장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땐 장애 유형에 대해 정확한 용어도 몰랐으니까. 그저 몸이 좀 불편한 친구, 약간 부족한 친구, 느린 친구 정도로 지금의 지체장애, 지적장애, 발달장애 정도만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면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으니까.


가뜩이나 눈 이야기만 나와도 매일매일 눈물을 뚝뚝 흘리던 아이였는데 갑작스럽게 듣게 된 특수학교라는 단어는 꽤나큰 충격이었다. 선생님이 조금 당황하셨던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예민한 사춘기 시절 나는 조금 더 다정한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상담은 끝났고 당시 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았던 나는 평범한 학생들처럼 인문계 고등학교를 지원했다. 시간이 지나고 운 좋게 1 지망으로 썼던 학교로 배정되었고 나는 정말 시각장애인도 되어버렸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