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를 보는 삶
나는 교정시력 0.02, 시야의 95% 이상이 손상되어 미약하게 남아 있는 아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는 중증 시각장애인이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부족한 시야를 채우기 위해 내 눈동자는 항상 살짝 위를 향해 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눈동자의 위치가 다르다는 것은 17살 때 처음 알게 되었다. 평소처럼 친구의 얼굴을 그저 바라봤을 뿐인데 친구가 말했다.
“나도 내 앞머리 짧아서 웃긴 거 아니까 그만 쳐다봐”
“응? 앞머리?”
나는 친구의 앞머리가 짧은 줄도 몰랐다.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친구는 자꾸 나보고 내가 계속 자신의 앞머리를 쳐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충격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다는 것. 그 뒤로 나는 사람들과 눈 마주치기를 의식적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내가 수줍음을 많이 탄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았다. 나는 사람들과 눈 마주치기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까. 내가 시야가 손상된 암점을 피해 사람들을 쳐다보면 눈동자는 위를 향해 있었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눈동자를 내리면 커다란 암점에 가려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눈동자는 그 사람을 쳐다보고 있지만 내가 보이는 실제는 그 사람의 목 윗부분에 있는 얼굴은 암점에 의해 다 사라져 보이고 목 아랫부분만 보인다. 흡사 목이 잘려 나간 사람처럼 보인다. 이러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대할 땐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옆에 있기를 선호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눈이 나쁘면 안경이나 렌즈를 껴보라고 한다. 그리고 나름의 동질감을 형성하기 위해 말한다.
“나도 안경 벗으면 하나도 안 보여”
“나 시력 마이너스야 엄청 안 좋아”
모두 상대적이다. 나도 시력이 좋은 비장애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이 어떤지 모르니 그들도 시각장애인이 바라보는 세상을 모를 것이다. 그런데 이건 분명하게 말하고 넘어간다. 시력에서 마이너스라는 것은 가까운 것은 잘 보이나 먼 곳은 보기 힘든 굴절이상인 근시를 오목렌즈로 교정해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말이다.
시각장애인 중에는 안경의 도움을 받아 조금이라도 교정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존재한다. 하지만 애초에 시각장애인의 기준은 교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다. 그리고 안타깝게 나는 아주 조금이라도 교정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심지어 수술로도 시력을 회복할 수 없는 저시력이다. 시각장애인마다 각각 시기능의 특징이 다르므로 시력과 시야의 수치상만으로 각 개인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만의 시각특성을 잠시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주변부 시야가 남아 있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보행은 가능하다. 바로 옆에 가까이 사람이 있다면 얼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을 마주칠 때 거리가 멀어 눈, 코, 입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인식할 수 없어 주로 사람들을 목소리로 알아본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보기 어렵고 같은 방면에 있는 건물의 간판도 읽기가 어렵다. 글씨를 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심부 시력이 많이 손상되어 맨눈으로 글씨를 보기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나마 36pt정도의 진하고 익숙한 글씨체인 경우 맨눈(나안시력)으로 형태를 추측하며 글씨를 읽을 수 있다. 평소에는 부족한 시기능을 보완하여 글씨를 크게 확대해 볼 수 있는 보조공학기기인 탁상용 독서확대기를 사용하거나 15pt 크기의 자료를 12.5배 확대하여 볼 수 있는 고배율 확대경을 이용해 겨우 글씨를 볼 수 있다. 일명 돋보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실 이 정도 시력이면 점자를 사용해야 하지만 나는 아직 점자를 읽기에 많이 미숙하다. 아무튼 오랫동안 비밀 속에 꽁꽁 싸여있던 내 안질환의 병명은 황반이상증이었다.
우리의 눈 가장 안쪽에는 망막이 있고 망막의 중심부에 위치한 곳을 황반이라고 한다. 황반에는 시세포가 가장 많이 밀집해 있어 시력에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며 우리가 색을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추세포(원뿔세포)가 모여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시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황반에 이상이 있다. 노인들의 3대 실명 안질환인 황반변성하고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병이라고 한다. 어찌 되었든 둘 다 눈의 중심부인 황반에 이상이 생겨 흔히 시야의 중심이 잘 보이지 않게 되는 중심암점과 색각이상이 발생할 수 있으며 눈부심을 호소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외에 또 비슷한 증상을 겪을 수 있는 안질환으로는 추체이영양증, 상염색체 열성으로 유전되는 스타르가르트병 등이 있다.
지금에서야 누굴 만나든 어디에 가든 당당하게 내 장애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학창 시절 나는 매일 눈물을 흘려야 했다. 결국 그 눈물이 마르고 말라 조금은 단단한 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잊지 않기로 다짐한다.
학창 시절보다 더 시력이 나빠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웃을 수 있는 내 모습이 되기까지 성장의 과정을 그리고 나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정한 길동무가 될 수 있기를, 그리고 앞으로 나에게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게 되더라도 내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하고 내게 주어진 것에 더 집중하고 감사함을 느낄 수 있도록, 불공평하고 불편함 가득한 이 세상이지만 더 밝고 씩씩하게 살아갈 나를 위해서 나는 글을 쓰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