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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Apr 09. 2017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하다.

하루키의 잡문집을 읽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나 자체의 존재에 관한 물음은 무의미하다.

200자 이내에 서술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며 평생을 다 바쳐도 그 질문에 대하여 100%의 대답은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이 물음에 답하려고 했는데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A라는 자극이 오면 B라는 반응을 하는 게 '나'인 줄 알았는데 내 컨디션이나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A와 유사한 A1의 자극이 왔을 때 B1의 반응이 아닌 C라는 반응을 내놓는 내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는 변수에 의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존재인 것이라고 판단했을 때 즈음에 또다시 A3의 자극을 받아 B3의 반응을 내놓았다. 그러니 '나'라는 존재가 누구이고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은 뭐랄까 상당히 복잡하고 비생산적인 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그에 반해 '내가 생각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 쓴다면 꽤 많은 분량의 글을 쓸 수 있다.

내가 처음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을 때를 아직 기억한다. 그때 나는 하루키에 대해서 미친 작가라고 생각했다. 군대에서 높으신 분의 운전병이었던 나는 운행이 없을 때 세차를 하고 물기를 닦고 차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좋아했다. 비교적 선임들의 터치를 조금 받는 보직이었기 때문에 차에는 항상 책이 있었다. 

그때쯤 1Q84를 읽었다. 너무 충격적인 내용이었고 이런 생각을 하는 작가는 미친 사람 같다고 생각했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하루키라는 작가의 책을 하나둘씩 도서관에서 빌려 봤다. 그때에 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쫓기는 듯이 생활했었는데 하루키의 책을 읽다 보면 그런 복잡한 것들이 다 없어지곤 했다. 

처음에는 '이 문장이 여기서 왜 필요하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으나 점점 더 그냥 읽게 되었다. 의미를 굳이 생각하지 않고 쭉쭉 내려가다 보면 이해되는 부분들도 있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다. 정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해설집이나 인터넷에서 사람들의 리뷰를 보았다. 그렇게 나에게 하루키는, 정확히 말하면 하루키가 쓴 글은 쉼터 같은 것이다. 


나는 하루키라는 작가를 떠올리면 존경스럽다.
나는 조그마한 브런치 어플에 글을 쓸 때에도 이걸 읽을 사람들을 의식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생활에서 나와 만나는 사람이 내 글을 읽는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런데 하루키의 소설은 읽는 사람을 (좀 심하게 말하자면) 무시하고 자기만의 고집으로 쓴 글 같이 느껴졌다. 글을 쓸 당시에는 이 글을 읽을 독자들이 작가로서의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따위의 질문을 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는 편이 자기 색깔을 드러내기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만큼 '작가'로써의 하루키에 대하여 경외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그렇다고 또 내가 하루키처럼 되고 싶지도 않거니와 될 수 도 없다.

만약 내가 하루키와 비슷하게 농구 경기를 보고 있는데 라틀리프의 3점 슛이 링을 통과하는 순간 문득 정말로 불현듯 글이 쓰고 싶어 졌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내가 가진 (정말 어렵게 얻어낸 것들) 그것들을 포기하진 못할 것 같다. 가령 직업을 때려치운다던지 몇 달씩 소설만 쓴다던지 하는 것들은 나에게는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하루키가 될 수 없다. 적당한 거리를 둔다.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그렇게 되려고는 하지 않는다.

나는 나이고 그는 그인 것이다.

이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하루키와 나와의 관계인 것이다.


내가 사회와 문을 닫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를 걷는 것과 같이 힘든 길일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라는 작가에 대해서 '내 생각'을 쓰는 것으로 '나'라는 사람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나는 어찌 되었든 차를 타고 서점에 가서 수많은 책들 중에서 하루키의 책을 골랐고 계산대에서 점원이 불러주는 금액을 계산하고 다시 차를 타고 와서 하루키의 책을 폈기 때문에 내가 하루키에 대해서 갖는 생각에 대해서 서술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제외하고서는 '나'를 서술하기엔 어렵다. 서점과의 관계, 점원과의 별 시답지 않은 관계, 주차장 아저씨와의 관계, 이런 것들이 모여서 표현이란 것을 하게 되면 곧 '나'라는 사람이 표현된다.

세계에 대한 귀를 닫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 어렵다면 나와 어떤 불특정 한 대상이 갖는 관계에 대해서 정리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정말 사소한 것들 말이다. 김치찌개라던가, 빈지노 같은 정말 불현듯 떠올르는 것들 말이다. 그러다 보면 저 호수 끝에 보일랑 말랑한 부표처럼 조금이라도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루키의 굴튀김 이론은 정말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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