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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Mar 19. 2022

호색한과 괴기한 마을

4월의 어느 날 - 카르스로 향해 가는 길




- 사월의 아나톨리아 고원은 추웠다. 고원의 동부로 향할수록 기온은 점점 더 떨어졌고 때때로 밤 기온이 이슬점을 밑돌기도 했다. 풍경은 더욱 거칠고 척박해졌다. 활주로처럼 넓은 도로에는 오직 하늘과 구름, 광야와 산 그리고 나와 내 자전거뿐이었다. 높은 산들이 차례차례 내 앞을 가로막았다. 1,500m, 1,700m, 1,950m 등 해발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요즘 나는 하루가 멀다고 이러한 산들을 넘고 있었다.   


그날은 25-11 지방 국도를 따라서 2,000m의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 산만 넘으면 터키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카르스에 도착한다. 가랑비가 오락가락하고 이따금 천둥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트럭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창문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밀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친구. 여기 타."


나는 잽싸게 트럭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이 길은 카르스로 이어지는 외길이었으니까. 트럭은 내가 입에서 단내를 뿜어내며 오르던 산길을 어떠한 수고도 감정도 없이 올라갔다. 기계가 하는 일이 다 그런 것이겠지만 이 순간만큼 그건 내게 하나의 놀라운 기적처럼 보였다.


트럭의 좁은 좌석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두 명의 젊은 남자가 타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돌연 자기 핸드폰 앨범 속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 속에는 사람들의 사진이 가득했다. 죄다 여자들이었다. 침을 튀겨가며 정열적으로 주절대는 게 사진 속의 여자들과 뭔가 야릇한 관계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그는 나에게 혹시 아는 한국 여자가 있으면 사진 좀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어디서 감히 내 친구를 넘봐! 아는 여자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라 하더라도 이 털북숭이 호색한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자 없어"라고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호색한이 괜히 호색한은 아닌지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끈질기게 사정하길래 하는 수 없이 대충 인터넷에 떠도는 한국 여자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진을 보고는 원숭이처럼 꽥꽥거리며 좋아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전화 한번 해 봐."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말도 안 통하면서 전화를 해 보라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저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니, 어쩌면 본받을 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용기 있는 자가 미녀를 얻는다고 했으니까. 이게 용기인지 오지랖인지 무진장 밝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카르스를 얼마 남기지 않고 우리는 산속 깊은 곳 어느 작은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 마을은 핵폭발 직후의 히로시마처럼 모든 것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비포장도로 주변에는 집인지 폐가인지 모를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지붕이고 외벽이고 울타리고 모두 다 짙은 잿빛이었다. 성한 건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여기저기 헐거나 파손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창문이 달려 있어야 할 공간은 휑하기만 했다. 지붕이 반쯤 날아간 건물도 손쉽게 눈에 띄었다.


마을 사람들은 길 한구석에 잔뜩 모여 있었다. 흙탕물에 빠진 양 떼처럼 다들 꾀죄죄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많은 사람 중 여자는 한 명도 없고 남자들만 우글거렸다. 마을에는 어떠한 상점도 가게도 없었다. 터키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Firini(화덕, 빵 굽는 곳)는 고사하고 모스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터키 작가에 의하면 터키에서 모스크가 없는 마을이란 국가에게도 신에게도 버림받은 곳이라는데 이곳이야말로 그런 곳 같았다.


가난이나 낙후라는 단어조차도 무색하게 만드는 이 괴기한 마을에서 받은 충격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할 즈음 나는 카르스에 도착했다. 내 목표는 조지아였고 이곳에서 조지아 국경까지는 불과 100k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경이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더 나아가는 건 사실상 무의미했다. 터키의 81개 주 중 절반 가까이 봉쇄되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어려웠다. 어딘가 은신하여 국경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 하마터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릴 뻔한 나를 받아준 고마운 이들이 있었다.

    

이 주 전, 카이세리에서 우연히 만난 만수르는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우리는 한 오 분 정도 스쳐 지나갔을 뿐이지만 그는 내게 "카르스에 오면 연락해. 우리 집에 머물게 해줄게"라는 말을 해주었다.   

  

나는 걱정 , 설렘 반으로 그의 집을 찾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골목길. 대문을 두드리자 만수르와 함께 여러 명의 투르크메니스탄 친구들이 나타나 나를 환영해 주었다. 나는 따뜻한 온기와 향긋한 촐바쉬(çorbası, 스프) 냄새가 감도는 집안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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