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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May 02. 2022

넴루트 화산에는 곰이 산다고?

터키 8월의 어느 날 - 넴루트 산(Mt.Nemrut)



- 타트반은 반 호수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인구 96,000명의 도시이다.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이곳은 겨울에 매서운 추위가 찾아오고 많은 눈이 내린다. 도심의 북쪽에는 넴루트 화산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넴루트라고 하면 보통 말라티아 근처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떠올린다. 하지만 터키에서는 넴루트 화산 또한 그에 못지않은 유명한 관광지라고 한다.     


아침 일찍부터 자전거를 타고 1,200m를 올라 정상에 도착한 우리 앞에 넴루트 화산 분화구가 그 광활한 모습을 드러낸다. 분화구 가장자리에는 초승달 모양으로 펼쳐진 넴루트 호수가 자리 잡고 있다. 햇볕에 반짝이며 크리스탈처럼 빛나는 호수의 물이 너무나도 청명해 보였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서 때 묻지 않은 호수의 깨끗함이 묻어나오는 거 같았다.


그나저나 곰이 여기에 산다는 말은 아무래도 거짓말인 거 같다. 분화구의 크기는 굉장하나 황량하기 그지없다. 호주의 아웃백처럼, 보이는 거라곤 황야 위의 키 작은 관목과 골풀뿐이다. 커다란 곰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과연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어제는 곰 퇴치 스프레이를 찾아 온 마을을 헤매던 우리였다. “조심해. 거긴 곰이 있어”라고 우리를 놀려대던 터키 사람들의 짓궂음을 생각하니 조금 약이 올랐다.     


넴루트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해바라기 씨앗을 까먹으며 오후의 여유를 만끽하고 돌아오는 길. 우리는 돌로 지은 작은 집을 지나가게 되었다. 호수 한편에 덩그러니 서 있던 그건 집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허름하고 옹졸했다.     


 앞마당에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덩굴시렁이 있었다. 그곳에는 포도나무 덩굴이 한껏 엉클어져 보기만 해도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는 잠시 쉬다  요량으로 그늘 밑으로 들어갔다.  60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가 어두운  안에서 나왔고 우리에게 차를 대접해 주었다. 내가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여기 혼자 사시는 거예요?”
“응. 여름에는 여기서 지내고 겨울에는 타트반으로 내려가.”
“이렇게 아무도 없는 산중에 혼자 계시면 외롭지 않으세요?”
“그렇지 않아. 관광객들도 찾아오고 곰도 가끔 찾아오거든.”
“곰이 찾아온다고요?”


아저씨는 우리를 집 바깥쪽 한 모퉁이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보여주었다. 그건 두말할 필요 없는 곰의 발자국이었다. 그것도 비교적 최근에 찍힌 것처럼 보이는.   

  

“곰이 무섭지 않으세요?”
“무섭지 않아. 그 녀석 아주 온순하거든.”     


아저씨는 곰이 마치 친구라도 되는 양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런 아저씨를 보면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숲속에서 혼자서 야영하다가 곰 비슷한 야생 동물을 만난 적이 있다. 한밤중, 텐트에서 자고 있던 나는 이상한 기척에 잠에서 깼다. 죽음과 같은 침묵 속에서 어디선가 어렴풋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커졌고 내 심장의 고동은 점점 빨라졌다. 겁에 질린 나는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숨을 죽였다. 하지만 싸늘한 기운에 잠깐 눈을 떴을 때 나는 보고야 말았다. 텐트에 비친 검고 거대한 그림자를. 그 그림자를 본 순간 나는 그것이 곰이라고 확신했고 내 심장은 얼어붙었다. 번개를 맞은 듯 찌릿한 전기자극이 내 전신을 관통했고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대로 죽는가보다 싶었다. 그게 실제 곰이었는지 아니면 내 망상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분명한 건 그건 이제껏 내가 경험한 가장 극심하고 끔찍한 공포였다는 것이다.     


아저씨는 내친김에 우리에게 집 내부도 보여주었다. 변변찮은 대문 하나 없던 돌집은 아직 한낮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주방으로 보이던 곳에는 프로판가스통과 찻주전자, 그리고 낡고 녹슨 식기들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둠이 더욱 짙어졌는데 가장 안쪽에 있던 아저씨의 침실은 그야말로 깊은 동굴 속과 다름없었다.     


이런 곳에 전기가 있을 리는 없고... 불을 밝힐 수 있는 호롱불이라도 있는 걸까? 한동안 캠핑 생활을 하면서 어둠에 많이 익숙해진 나였다. 하지만 어둠이라고 해도 다 똑같은 어둠은 아니다. 어둠에도 종류가 있다. 넓은 밤하늘 아래의 어둠, 울창한 숲속의 어둠, 밀폐된 좁은 공간의 어둠 등 모두 밀도와 질감이 다른 어둠이다. 밀폐된 좁은 공간의 어둠은 그야말로 눈을 감고 있는 것보다 더 어두운 칠흑 같은 어둠이다. 나는 이런 어둠에 익숙지 않았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아저씨의 삶은 그저 편안해 보였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 아저씨, 왠지 모르게 넴루트 호수를 닮았다. 빗물이 모여 이루어진 화산호는 대부분 호수가 그렇듯 겉보기에는 고인 물 같지만 깊은 땅속 어딘가에서 다른 물줄기와 만난다.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호수처럼 해맑은 그는 이곳에서 초연하게 살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보여준 친절함과 솔직함에서 나는 이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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