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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Jul 22. 2022

가지안테프 삼시 세끼

터키가 세계 3대 미식 국가라고?

터키 10월의 어느 날 - 가지안테프



“터키가 세계 3대 미식 국가라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말에 코웃음을 쳤다. 터키 하면 떠오르는 음식, 케밥. 케밥이 맛있는 건 인정한다. 근데 솔직히 케밥밖에 없잖아. 도심을 둘러보면 온통 케밥 식당뿐이었다. 되네르 케밥, 아다나 케밥, 이스켄데르 케밥 등. 진절머리가 났다. 터키인들의 작명 센스는 때때로 실소를 자아내는데 ‘케밥 응급실’이라는 간판을 보았을 때는 정말로 응급실에 실려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식의 도시, 가지안테프에 도착한 지 두 번째 날.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은 케밥 식당이었다. 말라티아에서 만난 터키 사람이 추천해 준,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케밥 식당. 케밥에 질려버린 나지만 어쩌겠나.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데 한 번 가봐야지.



과연 유명한 식당답게 입구부터 인파로 북적였다. 가게 이름은 Halil Usta. (Halil은 터키의 흔한 이름, Usta는 장인이라는 뜻) 이름이 마음에 든다. 내 지금껏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식당 중 시궁창 같은 식당은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원조라는 단어처럼 Usta는 터키의 가게 이름에 자주 쓰인다. 하지만 흔하디흔한 동네 뒷골목 식당이 Usta라는 간판을 내걸진 않는다.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름과 Usta의 조합은 라면과 김치의 조합처럼 더할 나위 없는 신뢰감을 풍겼다.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고기 굽는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한다. 화덕 안에 자욱하게 깔린 숯 위로 뿌연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한 명은 꼬치에 고기를 꽂고, 한 명은 굽고, 한 명은 다 구워진 고기를 그릇에 담는다. 주방 사람들은 모두 남자다. 우리나라 중국집 주방처럼 케밥 가게 주방에서 여자 요리사를 본 적이 없다. 듣자 하니 일이 힘들어서 그렇다는데 사회적인 요인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터키에는 ‘케밥은 역시 남자가 구워야지’라는 암묵적인 통념이 있는 거 같다. 무엇보다 어느 터키 남자가 자기 아내 또는 딸이 이 털북숭이 남자들 사이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걸 원할까.


나는 매운맛이 첨가된, 소고기와 양고기 Mix케밥을 시켰다. 얼마 후, 개 밥그릇 같은 식기에 담겨 나온 케밥은 상당히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얼른 하나를 집어서 먹어보았다. 와! 이게 그동안 내가 먹어왔던 케밥과 똑같은 케밥이란 말인가. 적당히 맵고 담백하면서 자극적이지 않은 이 맛. 마치 한국의 돼지갈비와 흡사해서 더욱 반갑다. 질기지도 너무 부드럽지도 않은 식감도 아주 그만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동안 케밥에 대해 심히 오해했다. 한국인의 열에 아홉은 케밥이라고 하면 고기와 야채가 라바시(Lavash)라고 불리는 빵에 돌돌 말린 음식을 떠올릴 것이다. 이건 보통 닭고기 두룸(Tavuk durum)이라 불리며 터키에서 가장 저렴하고 흔한 케밥 중 하나이다. 아마 당신이 돈 없는 배낭여행자라면 터키에서 이것만 주야장천 먹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나처럼 싫증이 나는 걸 테고. 


양념해서 불에 구운 고기를 케밥이라 한다. 그렇기에 어떤 고기와 양념, 불을 쓰느냐에 따라서 케밥의 맛과 향, 그리고 모양이 달라진다. 터키에는 약 200가지 이상의 케밥이 있다고 전해지며 지방마다 그 특색이 다르다.


사실 세계 3대 미식 국가라는 명성 따위 지극히 주관적인 거에 불과하다. 입맛이란 토착적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결국 엄마의 맛이, 고향의 맛이 가장 맛있는 거 아니겠는가. 각자 고유의 입맛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식재료의 풍부함, 다양한 요리법, 장인 정신 등이 가미되면 그 어떤 문화권의 요리가 저만한 명성을 갖지 못할까. 그런 면에서 한식도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가지안테프 바자르(시장)를 거닐다 보니 어쩌면 내가 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키에서는 지구상의 모든 작물이 재배된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자르에는 없는 게 없었다. (이슬람이 금하는 돼지고기는 없다) 청과물 가게에는 온갖 종류의 과일과 채소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팔고 있었다. 방금 밭에서 가져온 듯 어느 것 하나 신선하지 않은 게 없으며 당근 종류만 무려 세 가지이다. 그 옆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말린 과일과 말린 채소, 그리고 디저트, 견과류 등을 팔았다. 특히 가지안테프는 피스타치오의 고장답게 피스타치오가 가게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가지안테프는 비단길이 지나던 곳답게 향신료 가게에는 듣도 보도 못한 향신료들이 넘쳐났다. 큐민, 수막, 정향, 샤프란 등은 한국인에게는 생소하지만 터키에서는 널리 쓰이는 향신료이다. 바자르에서는 향신료를 그램 단위로 팔고, 여느 슈퍼마켓을 가도 대략 20가지 이상의 향신료를 구비하고 있다. 대체 그 고운 빛깔의 향신료들이 무슨 맛을 내는지 내 세 치 혀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각자 고유의 맛을 내고 그것들을 활용하는 요리법이 있다면 과연 맛의 향연이 펼쳐지지 않을까?


동서양의 교차점에 위치한 터키는 예부터 그리스, 아랍, 페르시아 등 주변 문화의 요리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오스만 제국 때 터키의 음식 문화는 크게 발전한다. 한때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내 식탁에 같은 요리가 올라온다면 요리사의 목을 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한 끼 식사에만 24가지 다른 요리가 올라가는 상황에서 400여 명의 넘는 술탄의 요리사들은 하루하루 피 말리는 전쟁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반대로 술탄은 아주 신이 났을 것이고. 아마 성질 고약한 술탄은 라면에 김치를 넣고 "이건 라면이 아닌 김치라면입니다"라고 말한 요리사의 목을 치며 권력을 과시했겠지. 하지만 이런 절대 권력자의 기행 덕분에 현대에 이르러서 우리는 더 다양한 터키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니 요리사에게 감사해야 할지, 술탄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가지안테프 하면 역시 디저트를 빼놓을 수 없다. 가지안테프 사람들은 아침부터 디저트를 먹을 정도로 디저트는 밥상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시장을 나온 우리는 바클라바 가게를 찾았다. 바클라바는 어떤 모양으로 자르느냐에 따라 이름이 조금씩 다르다. 나는 몇 가지 다른 모양의 바클라바와 퀴네페(künefe, 치즈 페이스트리를 시럽에 담가 만든 디저트), 그리고 단맛을 중화시킬 우유 한 잔을 주문했다.      


바클라바를 단맛 강한 터키 디저트의 끝판왕이라고 하는 데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맵기만 해서 결코 맛이 있을 수 없듯이 달기만 해서도 결코 맛이 있을 수 없다. 바클라바는 단 음식임이 분명하지만 벨기에의 초콜릿처럼 맛있게 그리고 적당히 달다. 피스타치오나 버터 등 여러 가지 맛이 조화되어 풍미 또한 훌륭하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만약 바클라바를 먹고 ‘너무 단데?’라고 느꼈다면 그건 아마도 족보 없는 싸구려 바클라바를 먹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간 곳은 조금 허름한 가게였는데도 불구하고 과연 바클라바의 고장답게 맛이 끝내주었다. 단 음식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였지만 이 달콤한 녀석은 꿀꺽꿀꺽 잘도 넘어갔다.


우리는 저녁으로 로칸타시(Lokantasi)를 찾았다. 로칸타시는 현지인이 자주 찾는 식당으로  ‘빠르고 간단하게 제공되는 집밥’이라는 뜻이다. 터키의 국민 음식이라 할 수 있는 쿠슈 파슐리에(토마토 소스에 볶은 콩요리)와 필라프(쌀을 버터나 기름에 볶아서 만든 요리)를 포함해 최소 4~5가지 종류 이상의 음식을 판다. 이스탄불 같은 큰 도시의 로칸타시에서는 수십 가지의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술탄이 부럽지 않다.


음식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면 직원은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하지만 생전 처음 듣는 음식 이름은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린다. 자기가 뭘 먹는지도 몰라서야 짐승과 다를 바 없겠지만 사실 그깟 이름 따위 무슨 대수일까. 장미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향기롭고 로칸타시의 음식은 그 어떤 이름으로도 맛이 있는걸.


로칸타시의 장점은 서로 다른 종류의 음식을  접시에 원하는 만큼 담아서 먹어볼  있다는 거다. 고로 한끼 식사를 하는 데 있어서 결코 실패란 없다. 모든 게 맛이 있을 순 없어도 모든 게 맛이 없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한 여행가는 터키까지 가서 무슨 그런 싸구려 음식이냐, 라고 일갈했지만 현지인이 먹는 음식을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대환영이다. 그날 먹었던 음식도 역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비록 음식 이름은 또다시 머릿속에서 증발하고 말았지만.


(참고로 이 고장에서 고추는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다. 우리에겐 피망처럼 생긴 것도 이 고장에서는 고추로 통용되는데 잘못 먹었다간 지옥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청양고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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