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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Aug 06. 2022

어느 추운 날

삶과 죽음의 경계선

터키 11월의 어느 날 - 카스타모누



- 물이 또 얼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페트병을 보자 물이 꽁꽁 얼어 있었다. 이렇게 언 걸로 봐서는 어젯밤 기온이 영하 4~5도 가까이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텐트 표면은 결로로 인해 잔뜩 젖어 있었다.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하고 잿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무심코 한숨을 쉬었다. 햇볕 없이는 텐트를 말리는 게 불가능하다. 그리고 추운 날씨에 젖은 텐트를 접어서 정리하는 일이란… 말해서 뭐 할까, 해본 사람만이 안다. 이것만큼 염병할 일도 없다는 걸. ‘그만해! 차갑다고!’라고 부르짖는 손가락들의 비명이 벌써부터 들려오는 거 같았다.


차라도 끓여 마실까 싶어 모닥불을 피우기로 했다. 따뜻한 지중해 주변을 여행할 때는 요리를 해 먹고 낭만을 위해 모닥불을 피웠다. 하지만 날씨가 이렇게 추워서야 따뜻한 차 한 잔 끓이고 생존을 위해 모닥불을 피운다.


나는 내 가슴통만 한 돌들을 둥그렇게 놓아 터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주변에 흩어진 불쏘시개와 마른 가지를 모았다. 준비를 마치고 불을 피우려는 순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라이터가 없다!


라이터가 있을 만한 곳은 다 뒤져보았다. 가방의 맨 밑바닥과 호주머니, 양말의 안쪽, 냄비 속, 그리고 깜빡하는 게 일상인 내 흐릿한 기억까지도. 그러나 라이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불을 피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격분했다. 욕을 내뱉고 소리를 질렀다. 그 옛날 여인네들이 멍청한 남편에게 화가 나면 장독대 뚜껑을 던져서 깨버렸듯이 돌들을 바닥에 냅다 내리쳤다. 일 년 넘게 여행하면서 이만큼 화가 난 적이 있었던가. 범죄 도시 로마에서 사기를 당했을 때도, 100달러짜리 손전등을 잃어버렸을 때도, 카르스에서 시골 여자한테 바람맞았을 때도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다. 하지만 나도 참 단순한 인간인지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니 분노는 금세 가라앉았다. 나는 따뜻한 차 대신 차가운 얼음물을 마시며 마음을 달랬다.     


겨울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지 몰랐다. 앙카라를 지나서 D030 도로를 따라 흑해 연안의 삼순을 향해 가는 길. 내륙의 산길을 택한 이유는 오스만 제국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마을, 사프란볼루를 거닐고 샤힌카야 캐년(Şahinkaya Kanyonu)의 멋진 협곡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컸다. 연이은 영하의 추운 날씨가 나를 엄습했다.



해발 904m에 위치한 카스타모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위해 해발 1,260m의 고지를 넘었다. 햇볕 한 줌 없는 날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칼바람까지 불어와 내려가는 길은 고역 그 자체였다. 두꺼운 장갑을 꼈는데도 손이 시려서 한 손은 주머니 속에 한 손은 핸들을 잡는 식으로 손을 번갈아 가며 녹여야 했다. 그 와중에 콧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리며 내 바닥난 인내심을 시험했다.


카스타모누는 마을의 오래된 역사 때문인지 뭔가 정다움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오들오들 떨어가며 거리를 거닐다가 1524년에 지어졌다는 오래된 하맘(터키식 사우나)을 발견했다. 사막을 헤매다가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기분. 뼛속까지 스며든 추위를 녹이는데 사우나보다 좋은 게 또 뭐가 있을까. 나는 곧바로 하맘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의 사우나와 하맘과의 가장 큰 차이는 하맘에는 탕이 없다는 것이다. 탕이 없어서야 탄산 빠진 청량음료와 다를 게 없겠지만 하맘에는 그를 대체할 만한 게 있다. 괴벡 타쉬(대리석 단상)이 그것이다. 괴벡 타쉬는 온돌방의 아랫목처럼 뜨끈한 열을 발산한다.


괴벡 타쉬 위에 누워서 돔 지붕을 바라보고 있자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 옛날 순례자들은 모스크에서 하룻밤을 묵는 경우가 많았다. 하맘은 원래 모스크에 부속된 건물이다. 순례자들은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몸을 정갈히 해야 했기에 하맘을 이용했다.


오늘처럼 춥고 흐릿한 , 고된 여정 끝에 모스크에 도착해 나처럼 괴벡 타쉬에 누워 몸을 녹였을 순례자들. 어쩌면 모든 순례 과정을 통틀어 그들이 신의 존재를 가장 강하게 느꼈을 때가 바로  순간이지 않았을까. 무슬림이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히 긴다는 성서 꾸란도, 평생 은 꼭 직접 봐야한다는 메카의 신성한 검은 돌 카바도 너무나도 목이 마른 인간에게 주어진   방울보다는 가치가 없을지니. 절박함 속에서 태어나는 구원이야말로 신의 존재를 우러러보는 가장  원동력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저녁 어스름이다. 날씨를 확인해 보니 오늘 밤은 영하 10도 가까이 떨어질 예정이었다. 영하 10도라... 나더러 얼어 죽으라는 건가. 이런 외진 곳에는 웜샤워나 카우치서핑도 없다. 가난한 여행자인 나에게 숙박료는 너무 부담된다. 내게 남은 선택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모스크를 찾는 것.


이슬람 세계에서 모스크는 단순한 예배 공간이 아니다. 나라에 따라서 분위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적어도 터키에서만큼 모스크는 나그네를 위한 쉼터이기도 하다. 이 관용과 베풂의 장소는 무슬림뿐만 아니라 기독교인, 유대인, 불교인, 나와 같은 비종교인 등 모두에게 문호가 열려 있다. 나는 모스크가 보이면 그곳의 깨끗한 화장실을 이용하기도 하고 카펫 위에 앉아 쉬면서 전자기기를 충전하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사람들은 때때로 식사나 간식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물론 아무 모스크나 가서 하룻밤을 청할 수는 없다. 되도록 인적이 드문 작은 마을의 모스크가 좋다. 카스타모누 도심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적당한 모스크를 발견했다. 대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일 층 현관문은 잠겨 있었다. 낭패감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건물의 측면에 이 층으로 올라가는 문이 열려 있었고 나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모스크의 이 층은 여성이 예배를 보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구조적으로 일 층에서는 이 층을 볼 수 없게끔 만들어져 있으며 은밀하고 어둡다. 다시 말해, 잠을 자는데 이만한 장소가 또 없다는 말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이런 시각에 누군가 예배하러 올 리는 만무하다. 특히나 여성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터키 시골에 있는 그 많은 모스크를 들락날락했지만 예배하러 온 여성을 마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장내에는 적당한 두께의 러그가 깔려있고 의자 두 개만이 투박하고 휑한 공간을 꾸미고 있었다. 나는 침낭과 담요를 꺼내 잠자리를 준비했다.


무섭도록 추운 밤이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외풍으로 인한 한기가 점점 강해졌다. 어디선가 얼음 우는 소리와 같은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로등 불빛이 창문을 투과해 장내의 사물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주위의 모든 게 추위로 인해 일시적인 동면에 빠진 거 같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거 같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 나는 마치 꿈속을 헤매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바깥에 나오자 나는 오밤중에 얼마나 추웠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중력이 시간을 왜곡시키듯 극심한 추위는 어쩌면 시간조차도 얼려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세상의 모든 것이 얼어 있었다. 대지는 극지방의 빙하처럼 딱딱했고 함박눈이라도 내린 듯 내 자전거에는 하얀 서리가 가득 맺혀 있었다. 나는 행운아였다. 어젯밤에 이 모스크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그러한 행운을 얻지 못한 거 같았다.


도로변에 고양이 한 마리가 사체가 되어 비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추위로 인한 동사였다. 저승사자라도 본 듯 번쩍 뜨여 있는 녀석의 눈에서는 고양이 특유의 그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밝고 따뜻한 태양이 녀석의 온몸을 비추고 있었지만 녀석은 발가락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고양이의 등 너머로는 내가 하룻밤을 지낸 모스크의 미나레트(모스크에 부속된 첨탑)가 우뚝 솟아 있었다. 차가운 대지 위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은 고양이의 사체와 파란 하늘 위로 높이 솟은 모스크의 미나레트, 그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 사이에 존재하듯이. 극명하게 갈린 나와 녀석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니 그곳에서 좀처럼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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