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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Aug 09. 2022

사진 속의 장소를 찾아서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

터키 11월의 어느 날 - 샤힌카야 캐년



-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생생한 햇빛으로 만든 이 은판 사진은 아주 화려합니다. 궁전 자체를 들고 가는 것과 거의 같아요. 돌조각 하나 얼룩 하나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비례에 대해서도 잘못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술 평론가 존 러스킨은 어떤 장소의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방법에 대해 모색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데생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행지에서 데생을 함으로써 더 잘 보고 더 잘 느낄 수 있으며 결국 그것이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길로 이어진다는 게 그 이유였다. 위의 구절은 그가 데생을 대체할 수 있는 사진 한 장의 매력에 대해서 설파한 부분이다. 비록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가벼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보고 생각을 바꾸긴 했지만 그는 한때 사진이 어떤 장소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 장에서 완벽하게 소유된 아름다움을 마주했다. 사방팔방이 높고 웅장한 암벽에 둘러싸인 협곡을 따라 흐르는 키질이르마크(Kızılırmak) 강의 비경. 산꼭대기에서 찍은 이 풍경 사진을 본 순간, 최면에라도 걸린 듯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용이 승천하듯 내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강하게 꿈틀거렸다. 사진 속의 장소를 찾아가야만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두 눈으로 직접 봐야 했다. 그렇게 찾은 곳이 바로 샤힌카야 캐년이었다.


비수기를 맞은 샤힌카야 캐년은 눈 덮인 마을처럼 고요했다. 선착장에는 유람선을 포함해 여러 대의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지만 운행은 하지 않았다. 자동차 두 대가 겨우 올라탈 수 있는 작은 연락선만이 댐으로 불어난 강을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나를 뿐이었다. 사진이 찍힌 장소로 가려면 강을 건너야 했기에 나는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등산을 해야 하기에 자전거는 선착장에 두고 가기로 한다.


연락선은 10분 정도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 반대편 육지에 도달했다. 나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탐험가의 마음으로 하늘 높이 보이는 산봉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무작정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지도나 안내판 등 길을 알려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진 한 장만이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흑해의 울창한 산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 일대는 자연이 품은 고요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산길을 두 시간 넘게 올라가며 내가 마주친 거라고는 목에 방울을 단 소 몇 마리가 전부였다. 그 고요함 속에 부지런히 걸어서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사진 속의 장소는 그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대충 강이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에 올라가면 되겠지, 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올라와 보니 보이는 건 오직 산이고 나무요, 강 근처의 높이 솟은 산봉우리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한참을 이리저리 쏘다녔지만 어디로 가면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낭패감을 느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길을 잃어버렸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길을 잃는다는 건 마음속의 평정심을 잃는다는 내적 심리 상태를 병행한다. 과연 이런 평화롭고 탁 트인 풍경 속에서 평정심을 잃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터키의 흑해 지역은 우리나라의 푸른 강산 못지않다. 산도 많고 나무도 많으며 물도 좔좔 흐른다. 터키에서 가장 길다는 키질이르마크 강(1,355km)의 물줄기가 노랗게 물이 든 단풍나무들 너머로 보였다. 람사르 협약에 등재된 이 강은 어업이 제한되는 등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댐 건설로 인해 물이 불어난 이곳 하류는 생태계가 많이 파괴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겉보기에는 어떠한 흐트러짐 없이 맑고 평화로웠다.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해도 슬슬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대로 하산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 무심코 내려다본 풍경 속에서 오솔길 하나를 발견한다. 길의 일부가 숲으로 가려져 있어서 저 길이 정확히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저 길이 나를 사진 속의 장소로 인도해 줄 거라는 걸. 오솔길까지는 얼핏 봐도 여기서 2km 이상 떨어져 있는 거 같지만 상관없었다. 목표가 생겼으면 일단 가고 보는 거다.


나는 달렸다. 숨이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시간에 쫓기기도 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그 비경을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달리는 게 좋았다. 평탄한 길이 끝나고 돌과 자갈이 가득한 오르막길이 나타났을 때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나는 돌들을 껑충껑충 뛰어넘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길의 끝에서 나는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곳은 사진 속의 그 장소였다.



사진이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감동까지 소유하진 못한다. 그리고 보통 과정이 험난하면 그 감동은 더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고대하던 사진 속 장면에 들어섰을 때 나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정말로 아름다운 비경이었다. 깎아지른 협곡 사이로 때 묻지 않은 푸른빛의 강이 유유히 흘렀다. 역광이기도 했고 안개와 같은 구름이 협곡 너머의 대지 위에 낮게 깔려 있어 가시거리는 그리 좋진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뭔가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하고 소리를 지르니 그건 메아리가 되어서 협곡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토록 또렷한 메아리를 듣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봉우리 위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에 눈길이 갔다. 내 평생 이토록 괴기하게 생긴 소나무는 처음 보았다. 키는 작고, 가지도 짧고, 솔잎은 듬성듬성, 여기저기 구멍은 숭숭. 그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과 거친 자연의 풍파가 여실히 느껴졌다. 이 소나무는 어쩌다가 이런 곳에 혼자 살게 됐을까? 평생 이 멋진 경치를 내려다보고 싶었을까?


문득 나무의 처지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세상을 보기 위해서 모든  내팽개치고 홀로 떠나왔다.  결과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적어도 외적인 면에서는 참담하고 추하기 그지없다. 새로운 체험이고 멋진 풍경이고 그까짓  뭐라고 땡볕 아래 자전거를 타면서 피부는 자외선으로 목욕을 하고 가난한 여행이다 보니  씻지도  먹지도 못한다.  결과,  그래도 말랐는데  야위어 피골이 상접할 지경이다. 불과   전만 해도 ‘피부 좋다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 양말은 무려 일주일이나  갈아신었다.


이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행을 떠나온 걸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을리고 상한 피부야 돌아가서 자외선 차단제를 꼬박꼬박 발라가며 밤마다 오이라도 썰어서 붙여주면 되는 거고, 잘 먹고 잘 운동하면 건강하게 살이 찔 테고, 더러운 옷이야 세탁기에 넣으면 되니까 걱정거리도 아니다. 이 모든 건 되돌릴 수 있는 거지만 딱 한 가지 되돌릴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건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한 순간들.


준비 기간까지 포함하면 한국에서의 내 부재 기간은 어느덧 사 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나는 가장 가까운 누군가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기회를 잃었고,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뜻깊은 순간을 놓쳤고, 몇몇 친구들은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갔고,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결혼을 해버렸다. 친구들이랑 술 한 잔 기울이는 시간도, 고민 상담도,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기회도 삭제되었다. 그것들은 떠나간 버스처럼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이었다. 내 선택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모든 걸 다 갖기를 원하는 나약한 인간의 헛된 욕심 때문일까?


더군다나 이 긴 부재가 앞으로의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다. 좋은 영향을 미칠 거 같진 않았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니까. 여행이 길어질수록 잠잠해지는 내 핸드폰이 이 사실을 잔혹하게 알려주었다.


과거에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애틋함으로 승화되는 아름다운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만나긴 어려워도 언제 어디서든 누구와도 쉽게 연락할 수 있는 요즈음 연락의 부재란 결국 관계의 끝을 의미했다. 그건 현대인이 의식하지 못한 채 떠안고 있는 비극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러운 이별이란 게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니. 관계의 끝에는 전화번호부에 등록되어 있지만 더 이상 그 전화번호를 누르지도, 찾지도 않는 어느 정도 의도적인 행동이 전제했다. 현대인의 이별이 그토록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고 무심하고 섭섭한 이유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상념에 젖어 있다 보니 어느덧 해 질 녘이 가까워졌다. 슬슬 하산해야 한다. 한동안 거친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서니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발밑은 까마득한 절벽이다. 여기서 떨어지는 것보다 더한 개죽음도 없겠지. 조심해야 한다. 나를 떠난 사람이든 앞으로 떠나갈 사람이든 그건 어쩌면 손에 쥔 모래알과 같다. 내가 붙잡아 둘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안전하게 돌아가야 한다.


부랴부랴 산을 내려와 오늘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연락선에 몸을 실었을 때, 이미 밤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강에 비친 달빛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물결을 따라서 달빛도 넘실넘실 춤을 추었다. 나는 어서 빨리 반대쪽 육지에 닿기를 희망했다. 그곳에는 내 외로운 여정의 안식처이자 친구이자 동료인 내 자전거가 있었다. 나는 자전거가 그 자리에서 무사히 나를 기다리고 있어 주기를 바랐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무사히 나를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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