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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Aug 10. 2022

터키에서 가장 그리운 게 뭐냐고?

목탄화 속 동물, 헐크

터키 12월의 어느 날 - D010 해안도로



- 흑해 연안에 당도한 나는 삼순(Samsun)을 지나 D010 해안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렸다. 연중 온화한 지역답게 12월인데도 불구하고 낮에는 따뜻했고 밤에도 그리 춥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와 달리 날씨는 화창했다. 서두를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천천히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D010 해안도로는 흑해 연안의 주요 도시를 관통하는 간선도로이다. 도로는 매우 평평한데다가 일직선이어서 달리다 보면 지루해서 하품이 날 지경이었다. 다만 차량 통행이 많아서 주의가 필요하긴 했다. 흑해 주변의 무역항과 이웃 나라인 조지아를 연결하는 이 도로에는 특히나 화물차가 많았다. 가끔 화물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나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나는 ‘빵빵’하고 짧게 두 번 울리는 건 응원의 메시지라는 걸, 그리고 ‘빠아앙’하고 길게 한 번 울리는 건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비켜!’라는 뜻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운전자가 별다른 이유 없이 ‘빠아앙’거리면 동요하지 않고 그 차를 향해 내 가운뎃손가락을 하늘 높이 쳐들곤 했다.


검은 바다라는 뜻의 흑해는(실제로는 전혀 검지 않다) 파도가 높고 거칠며 험난한 바다로 유명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아손의 아르고 호 원정도 흑해를 배경으로 한다. 손이 여섯 달린 거인을 물리치고, 불을 뿜는 황소를 맞닥트리고, 잠들지 않는 용에게서 황금 양모를 훔쳐 오는 등 흑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웅들에게 많은 시련을 주었다. 그리고 나 또한 흑해에서 시련과 부딪혔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웅들조차 어찌할 수 없는 험한 시련을.


터키의 코로나 일일 확진자 수가 5만 명 이상으로 급증했다. 외부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금 차가워졌고 터키 정부는 하나둘 비상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통금 시간이 생기고 급기야 전국적으로 주말 외출 금지 조치가 취해졌다. 외국인 관광객은 이 조치에서 제외되었지만 나는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주말 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산기슭에 숨어 있기로 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옆에는 플랫 코티드 리트리버를 똑 닮은 검은 개 한 마리가 있었다. 녀석의 이름은 헐크. 헐크란 이름은 녀석이 나를 죽기 살기로 따라왔고 내가 녀석을 뿌리친 후에도 냄새로 나를 추적해 왔기에 ‘대단하다’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터키의 들개는 대체로 온순한 편이지만 녀석에게는 유달리 남다른 면이 있었다.


헐크는 무척이나 예의가 발랐다. 이틀 동안 함께 지내며 먹을 때도, 놀 때도, 잘 때도, 이동할 때도, 나 혼자 라면을 끓여 먹을 때도 단 한 번도 나를 보채지 않았다. 짖는 일도 없었다. 한 번은 내가 녀석을 놀리려고 일부러 음식을 멀리 던졌을 때도 심드렁하게 "흥"하며 콧소리를 낸 게 다였다. 언제나 흐리멍덩한 눈동자 그리고 여유와 신중함이 가득한 녀석의 몸가짐은 강태공마저 울고 갈 정도로 신선 같은 면모를 풍겼다.


헐크는 나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다. 단 한시도 나에게 떨어져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일어나면 녀석도 일어났고 앉으면 녀석도 앉았다. 내가 1m를 이동하면 녀석도 1m를 이동했다. 큰일을 보며 구린 냄새를 풍길 때도 내 옆을 꿋꿋이 지켰다. 밤에는 그 육중한 몸을 비집고 텐트 안으로 들어와 내 옆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잠이 들더니 가늘게 코를 골았다.


우리는 해변에서 만났는데 나는 해변에 있던 다른 개들과 함께 헐크와 잠시 놀아주었을 뿐이다. 근데 녀석은 나를 끝까지 쫓아오더니만 이와 같은 모양새였다. 


터키에서 들개는 이슬람의 가르침 아래 최소한의 보살핌을 받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로 천대를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개를 불결하게 생각해 만지기를 꺼리며 특히 검은 개는 악마로 간주하기까지 한다. 헐크는 꼭 목탄화 속 동물 같았다. 밤의 어둠과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까맸다. 그렇다는 건 혹시 녀석은 세상에 태어난 이후,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게 아닐까? 녀석을 악마가 아니라 천사로 여기며 머리를 쓰다듬어 준 사람은 내가 최초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를 따라온 걸까?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면서.


만약 그런 거라면 녀석은 나를 잘 찾아왔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가장 아쉬웠던 점은 애정을 줄 누군가의 부재였으니까. 사랑과 관심은 충분히 받았다.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특별한 만남으로부터. 하지만 이렇게 받은 사랑을 돌려줄 기회는 갖지 못했다. 항상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던 건 이 때문일 지도 몰랐다.


사람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이유는 사랑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랑을 주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이틀 동안 나는 헐크에게 내가 가진 모든 애정을 주었다. 나는 그와 시공간을 공유하며 음식을 나누고, 온기를 나누고, 대화를 나누고, 영혼을 나누었다. 그건 전혀 예상치 않게 내게 찾아온 행복과 안식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별의 순간은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


내가 터키에 살았다면 아마 터키의 들개를 적어도 백 마리쯤 입양했겠지.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녀석과 함께 여행해 보자, 라는 얄팍한 생각도 해 보았다. 개와 함께 여행하는 건 오랫동안 내가 소망한 일이 아니던가. 헐크라면 분명 멋진 파트너가 될 것이고.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헐크를 위한 선택이 아닌, 순전히 나 자신의 아쉬움과 욕심을 달래기 위한 선택일 뿐이다.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시작을 하지 말아야 한다. 독한 마음을 품어야 했다. 나는 더 이상 어렸을 적 학교 앞에서 500원 주고 병아리를 사 오던 코흘리개 소년이 아니었다. 병아리를 위해서, 헐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월요일이 되었고 나는 헐크를 원래 있던 해변의 보금자리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헐크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예상했던 대로 녀석은 나를 필사적으로 쫓아 왔고 오르막길이었기에 나는 녀석을 따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트에서 커다란 소시지를 사서 녀석의 시선을 돌려놓고 다시 전속력으로 달렸다. 헐크는 잠시 음식에 정신을 팔더니만 멀어지는 나를 보고는 음식을 내팽개치고 날 필사적으로 따라왔다.


‘이 녀석. 나랑 어지간히 헤어지기 싫은 거구나. 하지만 너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정말로 미안해.’


나는 결국 헐크를 뿌리치는 데 성공했다. 혹시나 추적해 오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녀석이 시야에서 벗어난 이후로도 멈추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무언가가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내 마음은 녀석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과 혹시나 녀석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뒤숭숭했다. 혹시나 녀석을 다시 보게 된다면 글쎄... 그때는 옳고 그름을 떠나 어떤 선택을 내릴지 확신이 안 섰다. 머리는 결코 가슴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녀석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간간이 헐크를 떠올린다. 누군가 내게 터키에서 가장 그리운 게 뭐야, 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터키의 맛있는 음식도, 멋진 자연도, 친절한 터키인도 아닌 헐크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아마 날 이해하지 못하겠지. 왜냐하면 나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대체 헐크는 나를 왜 그렇게 따랐던 거고 그 짧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나는 녀석이 왜 이렇게나 그리운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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