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일상적인 풍경
터키 11월의 어느 날 - 앙카라
- 앙카라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는 전 세계 각지에서 온 배낭여행자들을 만났다. 코로나가 여전히 기세등등한 와중, 터키는 외화 수입을 위해 국경을 개방한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다. 좀이 쑤시거나 오갈 데 없는 배낭여행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또는 울며 겨자 먹기로 터키로 몰려들었다.
이본은 30대 중반의 이탈리아 여성이었다. 내가 게스트하우스의 야외 테라스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소파에 앉아 부지런히 담배를 말고 있었다. 나를 본 그녀는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했다.
“너 한국인이지?”
“맞아. 어떻게 알았지?”
“척 보면 척이지!”
척 보면 척이라니! 유럽인이 아시아 사람을, 특히 한중일을 외모만으로 구별해내는 건 한국인이 프랑스인, 영국인, 이탈리아인을 구별해내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다. 그녀는 중국에서 몇 년 유학했기에 이 같은 일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본은 완전히 선머슴 같은 여자였다. 행동거지나 말투가 불도저처럼 거칠 게 없다. 얼굴이 건조하다면서 갑자기 가방에서 크림을 꺼내어 씻지도 않은 손으로 덕지덕지 바르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내 경험상 이런 여자와 하루 이틀을 함께 보내는 건 언제나 유쾌한 일이었다. 여자라고 딱히 신경을 쓸 필요도 없고 괜한 로맨스를 상상하며 가슴을 졸일 필요도 없으니. 그녀도 생각하는 바가 나와 비슷했던 거 같았다. ‘이런 사슴 같은 남자가 나한테 들이대진 않겠지? 혹시라도 들이대면 까짓것 구워삶아 버리지 뭐’라는 식으로. 그렇게 장단이 맞은 우리는 함께 앙카라를 구경하기로 했다.
다음 날, 우리는 느지막이 일어나서 앙카라 성으로 향했다. 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달동네처럼 허름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빈민가를 지나가게 되었다. 게제콘두(Gecekondu)였다.
게제콘두는 터키어로 하룻밤 사이에 지어진 집이라는 뜻이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이농현상으로 인해 도시로 수많은 사람이 유입되었다. 돈도 없고 마땅히 거주할 데도 없었던 사람들은 도시 외곽에 판자 따위를 이용해 하룻밤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집을 지었다. 일단 집이 지어지고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 시 당국에서는 함부로 집을 헐거나 사람들을 내쫓을 수 없었다. 이슬람에는 ‘자는 사람은 건들지 마라'라는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무원들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집을 등록하고 전기와 수도를 연결해 주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생겨난 게제콘두는 선거를 의식한 정치인들의 종용으로 봄날의 산불처럼 무서운 속도로 번졌다.
이렇게 불법적으로 지어진 집터에 재개발이 일어나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는 운 좋은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역시 빈민가는 빈민가였다. 건물의 외벽은 금이 가거나 망치를 얻어맞기라도 한 듯 허물어져서 내부의 배관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현관문이나 창문, 창틀, 계단의 난간, 지붕 등 많은 것이 부서지거나 마치 돈이 없어서 만들다가 말았다는 듯 기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그 모습 그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인지 주변 풍경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우리는 앙카라 성으로 올라가는 약 20분 남짓 동안 수많은 아이와 마주쳤다. 아이들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자기들끼리 깔깔 웃어대었고 카메라 앞에서는 익살스러운 동작을 선보였다. 아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천진난만했지만 그들의 행색은 남루했다. 가난하고 학력이 낮을수록 출산율이 높다는 것, 그리고 계획 없는 출산이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든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빈곤의 그림자에 뒤덮인 이 마을에 웃음과 활기, 그리고 희망을 불어넣는 존재는 아이들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의 존재가 그 빈곤의 그림자를 더 짙게 만든다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앙카라 성에서 앙카라 시내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난 후, 우리는 아타튀르크 영묘, 아늣카비르(Anıtkabir)를 찾았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아타튀르크는 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터키인들의 국부(國父)로 칭송받고 있다. 그는 터키의 독립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지금의 터키 공화국을 이룩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초석을 마련한 위인이다. 창업의 지도자이자 수성의 지도자인 아타튀르크는 15년 동안 터키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그는 마오쩌둥이나 이승만 같이 권력을 위해 민중을 억압하는 독재자는 아니었다.
저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독재란,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얻어가며 통치하고 싶습니다.
터키에서 아타튀르크는 신화 그 이상이다. 그의 존재와 영향력은 여전히 터키인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살아 숨 쉰다. 일단 동전을 포함한 터키의 모든 화폐에는 아타튀르크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의 초상화나 사진은 터키의 관공서, 식당, 상점, 차이베이 등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아타튀르크 공원, 아타튀르크 대학, 아타튀르크 거리, 아타튀르크 병원 등 그의 이름을 딴 시설물들이 수도 없이 많다. 터키의 법정공휴일은 16개인데 그중 다섯 개가 아타튀르크와 관련이 있다.
마치 터키 국민 모두 아타튀르크와 사랑에 빠진 듯하다. 실제로 그를 몰래 사모하는 여인들도 있지 않을까? 단순히 오랫동안 마주하는 것만으로, '저 사람은 완벽할 거야'라는 상상력이 더해져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우리가 TV 속 연예인을 보듯이 말이다. 심지어 아타튀르크는 연예인만큼이나 잘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는 법이다. 언젠가 저잣거리에서 아타튀르크의 그 잘생긴 얼굴이 그려진 팬티를 발견했을 때, 나는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그 옛날에 보았던 주머니 달린 팬티 이후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준 팬티였다. 대체 팬티에 주머니는 왜 달린 거고, 만약 아타튀르크가 자신의 얼굴이 사람들의 가장 음탕하고 은밀한 곳에서 비비적대는 걸 알았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타튀르크는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눈을 감았다. 터키에서는 매년 그 시각이 되면 터키 전역에 사이렌이 울리면서 일 분 동안 묵념의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온 우리는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맥주를 마셨다. 미국에서 왔다는 히피 친구는 지난 수개월 동안 파리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강력한 코로나 규제에 불만이 많았다. 집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경찰이 출동해 딴지를 거는 상황에 그는 크게 분노했다. 자유를 신처럼 숭배하는 히피라서 아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집트에서 온 친구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넘은 친구로 키가 훤칠하고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했다. 한 해 등록금만 수천만 원이 드는 카이로의 어느 국제학교를 졸업한 그는 혼자서 터키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너희 집 혹시 부자야?"라는 질문에 그는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주인공처럼 "부자인가? 그냥 살만해”라고 대답했다.
내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터키 남자는 이본과 디즈니 영화 '뮬란'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는 그 영화가 튀르크족을 비하했다고 불평했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자신의 손등으로 이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추파를 던졌다. 곧 그의 싸대기가 날라, 가진 않았고 이본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여느 게스트하우스에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모르게 다들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터키가 국경을 개방했다고 하나 최근 하루에 수만 명씩 코로나 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에서 자유여행이라니? 심지어 실내인데도 그 누구도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 이 친구들은 분명 목숨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용감하거나 혹은 엄청난 바보일 것이다. 히피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너 자전거로 여행 중이라고 했지? 앞으로의 계획이 뭐야?”
“일단 카르스의 친구 집으로 돌아가서 겨울을 보내고 국경이 열리면 중앙아시아랑 중국을 지나서 한국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생각이야.”
사람들은 “자전거로?”라고 되물었고 나는 미소로 대답했다. 그들의 눈빛과 표정은 ‘아무래도 너 정상이 아닌데?’라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