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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Aug 04. 2022

터키에서 시외버스 타보기

추가 요금? 담배 정차?

터키 11월의 어느 날 - 이즈미르 ~ 앙카라



- 겨울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겨울  위에서 겪었던 추위는 이제 질색이었다. 영하의 날씨에서 야영하는 일만큼은 때려 죽어도 피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앙카라를 구경한 연중 온화한 흑해 지역으로 가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이즈미르에서 앙카라행 버스를 타기로 했다.


터키는 터키 전역을 연결하는 시외버스가  발달해 있다. 시외버스 회사들은 대부분 민영이고  수가 많아서 승객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굉장히 치열하다. 터미널 안으로 들어서자 호객꾼들이 혀에 꿀이라도 바른  나를 향해 온갖 달콤쌉싸름한 말들을 쏟아내었다.


“어디 가니?”, “싸게 해줄게.”, “이스탄불?”, “친구. 잠깐만 이리로 와봐.”, “그쪽으로 가면 안 돼. 거기에는 뱀이 있어.”, “코레 코레(한국 한국)?”, “차이?”


차이라는 말에 조금 현혹되었지만 발걸음을 멈추었다가는 그걸로 끝장이었다. 아니, 눈만 마주쳐도 끝장일지 몰랐다. 터키말도 못 하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나는 범의 아가리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었다. 멋모르고 나다니다가는 이 털북숭이 아저씨들에게 팔다리를 다 뜯길 것만 같았다. 나는 최대한 호객꾼들의 시선을 피하며 땅만 보고 걸었고 이즈미르라는 버스 회사를 찾아냈다. 이즈미르는 어젯밤 인터넷을 통해 가격 확인을 해 둔 회사였다.


매표소의 인상 좋은 아주머니는 인터넷에서 보았던 가격보다 5리라 적은 70리라에 표를 끊어주었다. 아마도 제 발로 찾아와서 흥정도 하지 않고 표를 사겠다는 이 자발적 호구가 꽤 기특했나 보다. 그녀에게 버스에 자전거를 실을 수 있냐고 물어보니 '노 프라블럼'이란다. 일이 잘 풀려 간다. 한데 승강장으로 이동해서 자전거를 버스 화물칸에 싣고 나자 버스 기사가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와 기사 사이에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표를 살 때는 이런 추가 요금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고요!”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이렇게 큰 걸 실으면 다른 손님 짐을 실을 수가 없어. 우리는 그만큼 손해를 보는 거라고.”
“손님도 하나도 없고 화물칸도 텅텅 비어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몰라. 50리라 내놔. 안 그러면 너 안 태워줄 거야.”


표가 70리라인데 자전거로 무려 50리라를 더 내야 한다니! 이 아저씨, 혹시 내가 외국인이라고 개수작을 부리는 건 아닐까. 나는 몇 번 더 항의해 보지만 곧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걸 깨달았다. 기사 아저씨는 망부석처럼 조금도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50리라를 변기에 처넣고 물을 내리고 말지 이 아저씨에게만큼은 주기 싫었던 나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했다. 나는 몰래 지갑에 들어있던 돈을 20리라만 제외하고 몽땅 빼서 내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배 째기 작전을 실행했다.


“저도 몰라요. 보시다시피 지갑에 20리라밖에 없어요. 이거 받고 태워주든가 말든가.”


기사 아저씨는 매우 못마땅했다. 길을 가다 똥이라도 밟은 거 같은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마지못해 돈을 받았고 나는 쾌재를 부르며 잽싸게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은 한국의 우등버스만큼이나 쾌적했다. 애티가 풀풀 풍기는 젊은 남자 승무원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승객들의 편의를 봐주고 다과도 나누어 주었다. 잘 달리던 버스가 처음 정차한 곳은 아무것도 없는 갓길 위였다. 정차하자마자 운전기사와 승객들은 부리나케 내려서 둥그런 원을 만들고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댔다. 두 번째 정차는 휴게소. 사람들은 화장실도 갔지만 역시 담배를 피웠다. 세 번째 정차는 다시 갓길. 또다시 둥그런 원이 형성되고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런 정차가 대략 한 시간마다 반복되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나, 이건 순전히 담배를 피우기 위한 정차 아닌가.  같은 비흡연자는 어쩌라고. 내 불만은 하늘을 찔렀지만 버스 안은 의외로 평화롭기만 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대부분 여자와 아이였다) 자리에 앉아 하얀 담배가  타들어 가는 것을 창문 너머로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리라. 사람이 먹으면 싸고 누우면 졸린 것처럼 이건 어찌할  없는 일이라는 . 터키 사람들에게 담배를 참으라고 하는   쉬는  참으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니까.


다시 돌아온 아나톨리아 고원은 과연 변함없이 장엄했다. 길은 일직선으로 지구 끝까지 이어져 있었고 경계가 보이지 않는 엄청난 규모의 밭이 마을과 마을 사이의 드넓은 여백을 메꿨다. 추수가 모두 끝난 초겨울의 황량함 속에서 드문드문 심어진 몇 그루의 나무들이 외로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집도 구름도 바람도 햇빛도 그 어떤 것도 이 광활함 앞에서는 숨을 곳이 없을 거 같았다.


버스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앙카라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데 모든 게 너무나도 낯설었다. 마치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한 장면에 들어온 듯 뭔가 낙오되고 버려지고 홀로 남겨진 느낌. 터미널의 분주한 사람들과 오직 실용적인 측면만을 고려하여 설계된 건물의 딱딱한 외관은 이 혼란스러운 느낌을 더욱 가중했다. 터키에서 거의 일 년 가까이 있었는데 터키가 이토록 낯설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버스를 타고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A지점에서 B지점까지 자전거를 타고 선을 그으며 이동했다. 두 지점 사이에 펼쳐진 모든 풍경은 내 머릿속에서 살아서 꿈틀대었고 내 코는 지나쳐왔던 대기의 향기를, 내 발은 대지의 감촉을 기억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내가 그어온 선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새롭기는 해도 이토록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버스를 타고 순식간에 먼 거리를 이동한 후 낯선 도시에 툭 던져진 지금, 나의 선은 면도칼로 자른 듯 끊어져 있었다. 멀어진 친구 사이처럼 기존의 선과 새로운 선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었다. 나는 이 단절되고 고립된 느낌이 싫었다.


문득 이스탄불에서 만났던 일본인 여행자가 떠올랐다. 그는 이동할 때 돈과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야간 버스를 탄다고 했다. 그의 여행은 지도 위에 점을 찍는 여행이었고 점과 점 사이에는 암흑만이 가득했다. 그 광활하고 장엄한 아나톨리아 고원조차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동차 불빛과 어렴풋이 보이는 대지의 형상 따위로 기억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친구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배낭여행자가 이런 식으로 마을 간, 도시 간, 국가 간 이동을 했다. 그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낯선 장소에 뚝 떨어졌을 때, 그들도 나처럼 지치고 긴장되고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나로서는 그들이 어떻게 매번 이러한 감정을 다스리며 여행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복잡한 터미널을 빠져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바깥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수많은 자동차가 대로를 달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나는 자전거에 올라타 어둠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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