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의 진정한 가치
터키 10월의 어느 날 - 터키 남쪽 지중해
- 안탈리아에서 페티예까지 이어진 해안도로는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 중 하나였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세인 이 지역은 수려한 산림이 발하는 초록빛과 바다의 푸른빛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을 선사했다. 지나가는 마을마다 석류나무, 감나무, 오렌지나무, 무화과나무 그리고 부겐베리아를 비롯한 여러 가지 꽃들이 풍경에 화사함과 향기를 더했다.
우리는 거북이가 산란하기 위해 찾는다는 마을 치랄리와 지중해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 카쉬, 산토리니처럼 하얀 집들이 인상적인 칼칸 등을 지나 서쪽으로 내달렸다. 지중해는 그저 바라만 보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바다였다. 이 에메랄드빛 싱그러운 바다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리로 뛰어들라며 우리를 유혹했다. 우리에게 그 유혹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한여름의 온기를 가득 품은 시월의 바다는 무척 따뜻했다. 바닷물은 수 미터 아래의 밑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했다. 등을 곧추세우고 발을 휘저으면 마치 내가 바닷속을 걷고 있다는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사시사철 잔잔한 지중해처럼 이 시기 우리의 여정에 별다른 드라마는 없었다. 비가 오던 어느 날 밤, 간절히 염원하던 바다 번개를 본 게 드라마라면 드라마였을까. 바다 번개를 처음으로 본 건 일본 시코쿠에서였다. 그건 죽는 순간까지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아주 강렬한 광경이었다.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그 당시 나는 그 바다 번개가 수십 어쩌면 수백 킬로 떨어진 먼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르고 헐레벌떡 몸을 피한 기억이 생생했다.
이번으로 두 번째 보는 바다 번개는 내 기대와는 달리 어떠한 강렬함도 위기감도 없었다. 나는 절벽 끄트머리에 앉아서 그리 멀지 않은 앞바다에서 번쩍이는 바다 번개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처음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사람이 성장한다는 건 어쩌면 주위 환경에 점점 무감각해진다는 걸까. 그래서 노인들의 얼굴이 그리도 딱딱해 보이는 게 아닐까. 영화 '타짜'의 대사를 빌리자면 삶의 쓴맛, 단맛, 똥맛까지 다 맛보고 나면 더 이상 새로울 일도 가슴 설레는 일도 없어져 버리는 법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잘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세상은 평생을 살아도 다 겪어보지 못할 새로움으로 가득하다. 여행은 그러한 것들을 경험하는 데 매우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사람과의 만남은 여행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데므레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루이스'라고 하는 자전거 여행자를 만났다. 루이스는 스위스인답게 차분하고 예의가 바른 서른 후반의 남자였다. 그 또한 팬데믹이 터질 때 자전거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국경이 봉쇄되어 네팔의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갇히게 된 그는 그곳에서 현지인을 도와 농사를 짓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무려 반년이란 시간을 보냈단다. 그가 마을을 떠나는 날, 주민들은 얼마나 아쉬웠는지 눈물을 훔치며 그를 위해 성대한 송별식을 열어 주었다고.
“그럼 귀국 후에 다시 여행길에 나선 거야?”
“응. 사실 지금 코로나 때문에 스위스에서는 일을 구하기가 어렵거든. 일을 안 하고 지내기에는 스위스 물가가 너무 비싸고. 그래서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터키처럼 물가가 싼 곳에서 여행이나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나는 과연 유럽인은 이런 게 가능하구나, 라며 내심 감탄했다. 단순히 돈 문제라든가 지리적 이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 유럽인이 가지는 삶의 태도와도 관련이 있었다. 딱 꼬집어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대체로 남들이 기대하는 삶의 수순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여유라고 해야 할까.
비단 루이스뿐만은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길 위에서 만나온, 유럽에서 온 많은 자전거 여행자들도 그랬다. 그들은 한국인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버스를 집처럼 개조해서 살거나, 불혹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거나, 은퇴 후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국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다거나. 그들이 유럽인이라고 해서, 그러니까 지구의 대다수 사람보다 좀 더 나은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해서 삶의 고달픔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라고 왜 꿈과 현실, 집과 직장, 자기만족과 주변의 기대로부터 오는 고민이 없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관철해 나가는 그들이 부러웠다.
명문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적절한 시기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돈을 모아 내 집을 마련하는 일. 성서에 적힌 하나님 말씀처럼 이것만이 삶의 모범 답안이라고 여기는 한국의 궁핍한 현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나에게도 이건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느껴져서 더더욱 그랬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처럼 그 모범 답안을 도출하기 위해 발버둥 치든가 아니면 나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서 그것을 관철해 나가든가. 여행을 통해 삶의 방식에 정답이란 없다는 걸 직접 보고 느낀 나는 이미 어떠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나만의 삶의 방식이란 게 뭔지 알지 못했다. 내 마음은 여전히 갈팡질팡했고 어떤 사소한 질문에도 쉬이 대답을 내지 못했다. 나는 이 여정에서 나만의 삶의 방식이란 무엇인지, 그 실마리를 찾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우리는 시원한 그늘 밑에 앉아서 비스킷을 안주 삼아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문득 정말 바보 같게도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 하나 있었다.
수년 전 첫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며 투어링 자전거를 샀을 때 내가 산 건 자전거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자전거는 여행을 위한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진짜로 산 건 '전 세계의 자전거 여행자와의 만남'이라고 하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기회였다.
서른이 넘도록 타인에게 속마음을 드러내는 걸 무척이나 불편하게 여기던 나였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나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신기하게도 자전거 여행자에게는 무슨 얘기든 너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비단 마틴과 베로에게 뿐만은 아니었다. 길 위에서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하루 이틀 정도 함께 자전거를 탔던 친구들. 나는 그들과 나눴던 대화를 기억했다.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 없는, 내 무의식 속에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속내를 드러냈던 순간을 기억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얼마나 많은 위안과 격려를 받았던지. 그건 놀라운 치유의 경험이었다.
평생을 강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찾아 세상을 헤매던 나였다. 가슴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지독한 외로움도 어쩌면 그 유대감의 부재에서 연유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와 같은 자전거 여행자들과 함께 하는 이 순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내 몸과 마음이 현실에 강하게 밀착해 있음을 느꼈다. 외로움도 없었고 붕 뜨거나 혼자서 헤매는 느낌도 없었다. 나는 이곳이야말로 내가 속하는 곳, 진정으로 어울릴 수 있는 곳이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