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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Nov 12. 2021

나 고양이로 다시 태어날래!

터키 2~3월의 어느 날 - 이스탄불



- 2월 말의 이스탄불은 쌀쌀하고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을 타고 이스탄불 특유의 멜랑콜리한 느낌이 살갗으로 전해져 왔다.


금발의 줄리아를 기억하는가? 그녀는 이스탄불을 '멜랑콜리'의 도시라고도 표현했다. 멜랑콜리(Melancholy)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장기적으로 우울함, 비애, 슬픔, 침울 등의 감정이 드는 상태를 말한다. 보들레르가 말했듯 들라크루아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멜랑콜리이며, 한낮에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하는 낚시꾼들이나(이 낚시꾼들의 숫자로 터키의 실업률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상념에 젖어 먼 곳을 바라보는 터키 여인들에게서 멜랑콜리가 느껴지곤 한다.


이스탄불에 도착했을 때, 집을 떠난 지 어느새 반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역마살이 낀 내 삶에서 반년 정도 집을 떠나 있는 경우는 허다했지만 어쩌면 이 '이스탄불의 비애'가 나를 덮쳤는지도 모른다. 나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스탄불에 머무는 내내 지독한 향수병을 앓았다. 고향에 대한 갈증과 그리움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설상가상으로 오른쪽 무릎을 다쳐서 많은 시간을 텅 비어 버린 12인실 게스트하우스에서 혼자 보내야 했다. 투숙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대낮의 게스트하우스는 이스탄불의 그 어떤 곳보다도 조용하고 쓸쓸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터키 하면 이스탄불이고 이 도시는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곳이다. 그런데 내 마음은 늪처럼 침체되 도무지 뭔가 즐길만한 상태가 아니니. 아야 소피아, 블루모스크, 그랜드 바자르, 탁심 광장, 보스포루스 해협 등 이스탄불의 그 어떤 명소도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밥상도 식욕이 없으면 무슨 소용일까.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걸 보느냐보다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느냐가 더 중요했다. 마음이 아프거나 병들면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건축물도 세상의 모든 물건을 다 구할 수 있다는 활기찬 시장도 그저 그런 장소로 전락할 뿐이었다.


이 지독한 향수병의 늪에서 나를 건져내어 준 건 이스탄불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어느 엉뚱한 생명체였다. 우사인 볼트보다 빠르며, 백여 가지의 다른 소리를 낼 수 있고, 엄청난 점프력을 가졌으며, 삶의 대부분을 잠을 자며 보내는 생명체. 바로 고양이였다.



이스탄불은 고양이 왕국이라 불릴 만큼 고양이가 엄청나게 많다. 공원에 모여 햇볕을 만끽하는 고양이, 쇼윈도 너머의 상품 위에 앉아 조는 고양이, 카페 의자에 드러누운 고양이 등 녀석들은 어디서나 발견되었다. 새끼 때부터 사람들에게 길들여진 녀석들은 사람이 나타나면 사방팔방에서 후다닥 달려왔다. 그러고는 긴 꼬리를 높이 세우고 까만 똥구멍을 훤히 드러낸 채 내 몸에 자기들 몸을 비벼가며 애교를 부렸다.


좌우간 귀여운 것에는 사족을  쓰는 나였다. 고양이의  있는  없는 듯한 입술이 너무나도 탐스러웠다. 내가 털을 쓰다듬다가 기습적으로 뽀뽀를 할라치면 녀석들은 거칠게 반응했다. 날카로운 발톱 끝이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녀석들은 새침해져서  멀리 달아났고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날마다 근처 공원으로 고양이를 보러 갔고 매번 뽀뽀를 시도했으며 매번 실패의 쓴맛을 보았다. 임신묘의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하면 종종 꼬리가 짧은 새끼가 태어나곤 한다. 이스탄불에는 꼬리가 짧은 고양이가 극히 드물었다. 녀석들은 하나같이 매우 건강했다. 도시 곳곳에는 사료가 널려 있었고 페트병의 윗부분을 잘라서 만든 물통에는 언제나 물이 가득했다. 지역 주민들은 주변의 고양이를 애정을 갖고  보살폈다. 고양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안의 창문을 조금 열어 두어 고양이가 마음껏 들락날락할  있게 해놓는 주민들마저 있었다.


이스탄불에 고양이가 번성하게 된 데에는 이슬람의 영향이 컸다. 이슬람에서 개는 불경한 존재로 여겨져 천대를 받지만 고양이는 우대와 보살핌을 받는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고양이는 모스크 출입이 가능하지만 개는 모스크의 그림자도 밟지 못한다는 것. 이스탄불 고양이에 대한 다큐멘터리 'Kedi'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고양이는 신의 존재를 느끼지만 개는 그렇지 않다. 개는 사람을 신으로 여기지만 고양이는 다르다. 고양이는 사람을 신의 의지를 전하는 중간적인 존재로 여긴다."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서 이스탄불의 고양이들은 풍족하고 평화롭게 살아간다. 먹고사는 걱정이 없다 보니 남은 건 놀고먹는 것과 자손 번식뿐이다. 난봉꾼 같은 생활을 하는 이스탄불의 수고양이와 과거의 터키 남성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자식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일 테다. 한 기관에서는 이스탄불에 서식하는 고양이의 개체 수를 약 13만 마리 정도로 추정하기도 했다.


나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새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인간은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큰 자유는 어쩌면 자신의 두 날개로 넓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것 아닐까.


새가 아닌 다른 동물로 태어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데 이스탄불의 고양이를 보고 있자니 이곳의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의 기준이 너무나도 다르겠지만 결국 사람이든 짐승이든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복잡한 인간으로서 삶에 고뇌하기보다는 자유롭고 풍족한 이스탄불 고양이의 삶을 살아가는 게 더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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