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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Oct 16. 2021

형제의 나라, 터키에 입성하다

터키 2월의 어느 날 - 에디르네(Edirne)




- 긴 행렬을 이루고 있는 화물 트럭들이 내가 터키 국경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 모습이 마치 그 옛날 비단길을 지나가던 대상들의 행렬을 보는 거 같았다. 트럭들은 내가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유럽과 아시아, 유럽연합에 속한 불가리아와 그렇지 않은 터키,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럽인과 튀르크인 등 많은 요소들이 이런 진풍경을 연출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불가리아-터키 국경은 그동안 유럽에서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국경이었다. 동서울 톨게이트의 족히 두 배는 되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가장 예쁜 국기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터키의 국기가 하늘 높이 치솟은 게양대 끝에서 위엄 있게 펄럭였다.


형제의 나라, 터키. 터키 입성을 앞둔 내 마음은 복잡했다. 반년간의 유럽 여행을 끝내고 다시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딛는다는 설렘, 고향에 좀 더 가까워졌다는 안도감,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감 등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터키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 터키인들은 한국인을 좋아할까? 한국을 알고나 있을까? 그들은 서양인을 닮았을까, 아니면 동양인을 닮았을까?


이탈리아 로마에서 만난 금발의 줄리아. 그녀는 이스탄불, 더 나아가 터키를 여자 혼자서는 절대로 가면 안 되는 짐승들의 소굴로 묘사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터키의 남자들 때문에.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터키 남자들이 어떤데?"
"걔네는 외국인 여성이 터키에 놀러 오는 이유가 자기들과 섹스하고 싶어서라고 생각해. 특히 혼자 여행하는 금발의 여성을 보면 말이야. 진짜 엄청나게 치근덕거리지."


그녀의 이 극단적인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차차 살펴보기로 하자. 두 살 터울의 누나가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렸을 적부터 연상의 여인의 한마디는 내게는 임금님의 어명처럼 들리곤 했다. 줄리아의 말 또한 그러했고 급기야 내 머릿속에 '터키=짐승들의 소굴'이라는 등식이 박히고 만다.


그렇기에 국경통제소에서 새우튀김처럼 바짝 긴장을 한 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짐승들의 소굴에 사는 짐승을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었으니까. 그 짐승이 남자인 나에게도 여전히 짐승일지는 미지수였지만 어쨌든 짐승이란 단어는 친절과 호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국경통제소의 직원이 앳되어 보이는 여성이 아닌가. 머리에 히잡을 쓴 그녀는 대체로 험상궂거나 딱딱해 보이는 국경통제소 직원들과 달리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심지어 내게 여권을 돌려주며 "Welcome to Turkey"라고 수줍은 환영 인사도 건네주었다.


여행은 자신만의 시선과 색깔로 세상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과정이라 했던가. 내 지도는 여전히 까만 부분으로 가득했다. 나는 가능하면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경험을 토대로 그 까만 부분을 벗겨 나가고 싶었다. 아직 첫인상에 불과했지만 터키에서는 왠지 즐거운 일이 많이 생길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국경 도시 에디르네를 지나 이스탄불로 향하는 길. 전방의 길 가장자리에 서 있는 어떤 남성이 손을 흔들며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남성 앞에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톡 튀어나온 커다란 배와 켄터키 할아버지만큼이나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 하산과의 첫 만남이었다.


하산(Hasan)은 아랍어로 ‘멋진’ 또는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터키에 가면 누구나 하산을 만난다. 터키에서 내가 만난 모든 하산은 '멋진’이라는 단어와는 서울과 부산만큼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내 앞에 서 있는 하산도 그랬다.     


그는 다짜고짜 내게 자신의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번역기가 가동 중이었고 영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료 숙소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곳에 머물고 싶습니까?’

    

공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나이다. 하물며 숙소가 공짜라면야. 나는 배고픈 들개마냥 그 제안을 덥석 집어물었고 그의 승합차에 올라탔다.


하산이 나를 데려간 곳은 루레부르가스라는 도시에 있는 어느 자전거 아카데미였다. 시에서 야심 차게 조성한 이 아카데미에는 자전거 여행자를 위한 숙박 시설이 있었다. 침상과 주방, 화장실과 욕실 그리고 편안한 분위기까지. 이 모든 게 공짜라는 점에서 5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저녁 시간에 맞춰 다시 나타난 하산은 혼자가 아니라 어떤 소년과 함께였다. 하산의 아들 베르구타이였다. 베르구타이는 체구가 조그맣고 피부가 우유처럼 하얬다. 너무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케밥 식당에 갔다.


"14살이면 터키에서는 초등학교 다녀, 아니면 중학교 다녀?"     


내가 묻자 베르구타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학교 안 다녀."
"뭐? 학교를 안 다닌다고? 왜?"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이 질문을 웃어 넘겼다. 그런 태도에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하산이 말했다.


"베르구타이는 병을 앓고 있어서 오랫동안 학교에 다니지 못했어. 현재는 많이 좋아진 상태이지만 조심스레 생활해야만 해."     


그때는 그 병이라는 게 무엇인지 감도 잡지 못했고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혹시 그 병이 백혈병이 아닐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우유처럼 하얀 피부와 오랜 투병 생활, 특히나 베르구타이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세세하게 신경 쓰는 하산의 태도.     


그날 이후 루레부르가스를 떠날 때까지 나는 매일 밤 하산과 베르구타이를 만났다. 내 일찍이 이런 환대는 받아본 적이 없다. 터키에서는 손님을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여기는데 그 말에 티끌만큼의 거짓이 없었다. 나는 아다나 케밥을 먹고, 코코레크(kokorec, 양곱창 케밥)를 먹고, 바클라바(baklava, 디저트의 한 종류)를 먹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도 가고, 하산의 친구 병문안에 가기도 했다. 마지막 날에는 하산의 집에 초대받아 그가 손수 만들어 준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사흘 동안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니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건 바로 하산의 꿈.     


베르구타이는 투병 생활로 인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초등교육도 친구를 사귈 기회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집안에서 부모를 제외한다면 고양이 한 마리만이 베르구타이의 곁을 지키는 유일한 존재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차분하고 예의 바른 그의 태도가 유달리 돋보였던 건 그것이 그 나이대의 아이에게서 흔히 나타나는(그리고 응당 가져야 할) 천진난만함과 극명하게 대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하산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을 초대해서 베르구타이와 만남을 주선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많은 것을 놓치고 있지만 이런 만남을 통해서 사고와 의식만큼은 지평선 너머의 넓은 세상을 바라보기를 바랐다. 그리고 언젠가 그의 건강이 좋아졌을 때 그런 넓은 세상에 나가 자신의 꿈을 자유롭게 펼치며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밤늦게까지 베르구타이와 놀던 나는 마침내 하산의 방문을 두드렸다. 새벽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하산은 피곤했던지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일주일에 6, 하루에 10시간씩 일하는 그는  시간 후면 또다시 출근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일어나서 베르구타이와 함께 나를 숙소에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숙소 앞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곰처럼 큰 하산 그리고 강아지처럼 작은 베르구타이. 멀어져 가는 부자의 뒷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처럼 다정해 보였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베르구타이는 앞으로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날 거라는 걸. 저토록 멋진 아버지를 두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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