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 걸렸지만, 의외로 결정은 쉬울 수도 있다.
제발 좀 버려줬으면 좋겠어...
와이프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했다. 이제 결국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계속 쌓여가는 서재의 책과 물품들을 보며, 와이프가 몇 년 전부터 부탁 혹은 지시를 해왔다(아마 신혼 때부터였을 수도...).
"버려라..."
집안을 정리할 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일까?
당연히 불필요한 것부터 버려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불필요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나 같은 사람은 계속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카톡방에 쌓여가며 연락 안 하는 친구들처럼...
복잡한 현대사회일수록 미니멀리즘은 더욱 요구되는 가치이다. "단순화하고 또 단순화하라"라며 <월든>의 핸리 데이비드 소로도 외치던 고전부터의 진리이다. 마치 스티브 잡스가 목폴라만 샀던 것처럼, 일론 머스크가 회사 컨테이너에서 사는 것처럼 말이다. 저런 대단한 분들도 그렇는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야 복잡하게 사는 것이 오만인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어쨌든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그냥 내 전공책을 버리면 되었다. 졸업을 한 지 15년이 넘었고, 대학교 새내기 때 봤던 책도 있으니 20년이 넘은 책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학점 이수 이후 한 번도 펼쳐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20년을 이고 지고 있어서 절대 버리지 못할 줄 알았는데, 하고 보니 너무 쉬운 결정이더라... 왜 그동안 비워내지 못했을까?
다시 보니 공부를 참 열심히 했더라. 그러니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겠지. 혹시 숨겨 놓은 비자금이(?) 있을까 봐 책들을 한 번씩 뒤져보니 밑줄과 필기가 정말 빼곡히 되어있었다. 처음 입학했을 때, 내 전공은 나랑 참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부모님의 권유로 사실 억지로 갔었다. 반항심에 참 학교를 대충 다녔었던 것 같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오고서 (할 게 없어서, 혹은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정말 열심히 했고, '사회복지'는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자 정체성이 되었다.
그래서 전공책을 버렸다. 굳이 전공책이 집안에 없어도 나라는 사람을 표현해 주는 나 자체가 있으니까. 내가 걸어온 길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나의 존재이유가 되니까. '나 이런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심지어 사회복지사로서 나라는 주체적인 존재는 사회복지계가 낳은 유니크한 자산이라는 자신감까지 든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나 자신이 많이 컸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이만하면 된 것 같다.
그러나 다소 씁쓸한 것이 있다. 만약에 내가 엄청 더욱 대단한(?) 사람이 된다면, 이 책들이 나라의 큰 보물이 될 텐데... 피카소가 휴지에 그려도 '억' 가까이 되었던 것처럼, 내 필기책들도 값이 엄청날 텐데...... 음... 너무 많이 간 것 같다. 개꿈 같은 상상을 더 꾸기 싫어서 얼른 갔다 버렸다.
이런 와중에 의외로 별로 안 중요할 것은 같은, 와이프가 제발 버리라고 하는, 창세기전 합본은(내 또래 아저씨들은 아실 듯...) 안 버렸다. 당근에 쳐보니 중고거래로 10만 원이나 나가더라. 현재 내 전공책보다 훨씬 더 엄청난 가치를 가진 이것들은 또다시 살아남았다.
만약 누군가가 집안을 정리할 때 무엇부터 버려야 할지 모른다면? 우선 전공책을 버려보라고 말하고 싶다.
전공책을 버리면 일단 집안이 정리되어서 좋고,
정리된 것을 보고 가족(와이프)이 좋아해서 더 좋고,
잊었던 나라는 사람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니 특별히 좋아진다.
물론 이 전제는 현재의 본인에게 '자신'이 있어야 한다.
내가 전공책 그 자체라는 것은 인생의 큰 자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