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수원을 걷는다
여덟 갈래 물든 길 위에
나도 모르게
여덟 가지 생각이 피어난다
사방팔방 퍼진 시선 끝에서
한 송이 붉은 꽃이
문득, 나를 멈춘다
아니,
그가 먼저 내 이름을 불렀다
초록 그늘 아래
하늘로부터 내려온 듯
한 송이, 한 마음
수원팔경, 팔달산, 사통팔달
그 이름마다 담긴 기억의 결
내 안의 시간도
서서히 색을 입는다
세상은 매일
다른 색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미처 보지 못했구나
오늘이라는 선물도
여덟 갈래로 나뉘어
나에게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바람처럼, 기억처럼,
말없이, 따뜻하게
그저 그렇게
걷는 이 길 위에서
나는 오늘,
나를 다시 만난다
<글쓴이의 말>
여덟 가지 색으로 수 놓인 길 위를 걷다 보면, 마치 나의 내면도 팔색조처럼 물드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수원의 역사와 자연, 그리고 그 속을 거니는 나 자신이 어우러지는 순간, 길은 단순한 공간을 넘어 시간과 감정이 흐르는 통로가 됩니다.
무심코 지나치던 붉은 꽃 한 송이가 나를 멈춰 세우고, 내가 걷는 길이 아니라 길이 나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다양한 색으로 나를 향해 말을 걸고 있었지만, 나는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이 시는 '오늘'이라는 선물이 얼마나 다채롭고 조용히 다가오는지를, 그리고 우리가 그 선물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되새기게 썼습니다.
걸음 하나하나에 담긴 생각들,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한 꽃처럼, 우리 삶도 그렇게 작은 순간에서 빛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저 그렇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글쓴이 이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