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해는 산등성이에 금빛 칼날을 세운다
허물어진 기억들이 그 빛에 베여
저녁 강물 속으로 흘러간다
바람에 꺾이지 않고 선 꽃잎 하나,
그 위태로움이 오히려 빛을 머금는다
나는 그 꽃을 바라보다가
내 안 깊숙이 가라앉은 문장을 길어 올린다
시간은 여전히 분침과 초침의 모래알을 흘리고
나는 매일의 분주함에 허우적이지만
그 너머에, 늘 닿을 수 없는 자리에서
무언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예감이 있다
그때 믿었던 말과 배열들은
지금의 나를 데려오지 못했지만
오늘의 나는 여전히, 현실에 갇힌 채
현실 너머를 꿈꾸며 숨을 고른다
그 너머란 끝내 도달할 수 없는 거리,
그러나 우리가 살아내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