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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너머(詩)

by 이정호

그 너머


이정호


해는 산등성이에 금빛 칼날을 세운다

허물어진 기억들이 그 빛에 베여

저녁 강물 속으로 흘러간다


바람에 꺾이지 않고 선 꽃잎 하나,

그 위태로움이 오히려 빛을 머금는다

나는 그 꽃을 바라보다가

내 안 깊숙이 가라앉은 문장을 길어 올린다


시간은 여전히 분침과 초침의 모래알을 흘리고

나는 매일의 분주함에 허우적이지만

그 너머에, 늘 닿을 수 없는 자리에서

무언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예감이 있다


그때 믿었던 말과 배열들은

지금의 나를 데려오지 못했지만

오늘의 나는 여전히, 현실에 갇힌 채

현실 너머를 꿈꾸며 숨을 고른다


그 너머란 끝내 도달할 수 없는 거리,

그러나 우리가 살아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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