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새벽 빗소리,
반쯤 닫힌 꿈의 문을 두드리면
구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맑은 하늘로 흘러간다
나는 그 위에 마음을 얹어
멀리 보내고,
물빛에 잠긴 계절의 얼굴을
눈 속 깊이 새긴다
가을은
붙잡을수록 흩어지고
놓아둘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바람은 속삭인다
계절은 밧줄로 묶는 것이 아니라
가슴의 여백에 남겨 두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벤치에 앉아
흘러가는 빛을 가만히 바라본다
아련함은 사라짐의 다른 이름,
그러나 사라짐 속에서만
비로소 오래 머무는 것이 있다
가을이 그렇다
흩어지면서, 남는다
<글쓴이의 말>
가을을 바라보면 늘 마음 한편이 저릿해집니다.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고, 흘려보내야만 선명해지는 계절.
저는 그 덧없음 속에서 오히려 오래 머무는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새벽의 빗소리, 금세 맑아지는 하늘,
그리고 바람결에 흩날리듯 사라지는 구름들.
이 모든 풍경은 단지 순간의 장면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기억과 다가오지 않을 시간까지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를 쓰며 저는,
가을을 ‘묶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제 눈과 가슴에 새겨 두기로 했습니다.
떠남은 곧 남음이 되고, 흩어짐은 곧 머묾이 되니까요.
이 글을 읽는 분들 역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람의 속삭임을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순간 가을은 이미,
당신 마음속에 오래 머무르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