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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젤리 Apr 21. 2024

어떤 생각에 먹이를 줄지 정하는 건 나니까

도쿄일기 - 여행 5일 차 마지막날, 숙소에서 아침을 먹으며


도쿄일기 - 여행 5일 차 마지막 날 일기

일기를 쓴 장소 : 숙소 "언플랜 카구라자카" 1층 라운지에서

날짜 / 시간 : 24년 3월 22일 아침 8시


세븐일레븐에서 사온 에그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며 일기 쓰는 중


여행 마지막 날이 금방 왔다.

어쩜이지 걷기만 해도 시간이 이렇게 잘 갈까. 누가 시계를 고장 낸 줄 알았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건데, 혼자 여행할 때는 숙소로 혼자 묵는 호텔이나 에어비비앤비보다 차라리 여러 사람들이랑 같이 지내는 호스텔이 낫다. (다만 조용한 호스텔이어야 함)

아무리 깔끔하고 이쁜 숙소더라도 혼자 자면 무서워서 잠을 잘 못 자는 거 같다..ㅋㅋ

이번 에어비앤비 숙소도 아늑하고 깨끗해서 좋긴 했지만, 그곳에선 선잠 잤다면 여기 호스텔에서는 파워슬립했다.

어느 정도의 파워슬립이었냐면, 아침에 일어나면 너무 개운해서 신날 정도의 숙면이었다..!

하루에 3만보씩 걷고 나니 피곤해서 잠이 잘 온 것도 있지만, 마음이 더 편안했던 이유도 있다.

낯선 사람과 한 방에 같이 잔다는 게 불안하기보다 편안하다니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여기 숙소처럼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이 많은 곳에선 서로에게 굳이 말 안 해도 느낄 수 있는 신뢰가 있다고 해야 할까..

당신은 나와 비슷한 사람일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각자 공간에 짐을 편하게 늘여 놓는다.

물론 모든 호스텔이 이렇진 않겠지만 이곳은 나도 모르게 신뢰가 간다.



어젯밤에는  숙소 1층에서  편의점 하이볼 한 캔을 마시면서 책을 좀 읽다가 공용공간에 누가 있을까 하고 가봤더니 독일에서 온 파키스탄 출신의 35살 언니를 만났다.

그 언니는 혼자서라도 파티에 가볼까 생각 중이었다고, 지난밤에 숙소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랑 갔던 파티가 너무 재밌었다고, 나보고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재밌는 제안이지만, 그 시끄러운 음악과 사람들로 붐비는 공간 속에서 내가 과연 정말 즐길 수 있을까? 답은 너무 자명한 NO였다.

파티는 거절했더라도 그 파키스탄 언니와 나눈 잠깐의 대화는 즐거웠다. 40살이 되기 전까지 30개국을 여행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 자유로움과 여행에 대한 열정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분은 인생의 목표로써 여행을 이야기했지만, 나에게 여행은 목표라기 보단 필수 영양소 같은 느낌이다. 힘을 내기 위해 주기적으로 정량을 챙겨줘야 하는 영양소.  

여행 말고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혼자 여행하다 보니 오랜만에 누군가와 긴 대화를 한 게 즐거웠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해 보니 그 저녁에 파티에 안 가고 쉬길 정말 정말 정말 잘한 거 같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공항에 오후 5시까지 안전하게 도착하기 위해선 아침 일찍부터 돈키호테에서 부모님을 위한 술과 기념품 몇 개 사고 금방 나와서 필름카메라를 사러 가야 한다.

 


일기를 들춰보면 나는 작년부터 멋진 빈티지 필름 카메라를 갖고 싶어 했다.

Minolta가 내가 처음으로 잡아 본 수동 필름카메라였는데, 조리개와 거리계를 직접 조정하면서 손에 착 붙는 그 아날로그함이  마음에 들었다.

마침 하라주쿠에 리뷰 좋은 필름카메라 가게가 있어서 가볼 예정이다. 일단 너무 비싸지 않은 걸로 시작해 봐야지.



돈키호테와 카메라 쇼핑 전에는 시부야에서 시간을 보내려 한다.

나름 주술회전 시부야사변 성지순례라고나 할까.. 어디가 어딘지 알아볼 만큼 기억나진 않지만, 내 도쿄여행 열망에 불을 지핀 계기니 하루쯤은 다녀와야지!



하도 많이 돌아다녀서 어디를 다녀왔는지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다양한 곳을 거치면서 일상 같은 여행을 보냈다.

여행은 일상처럼, 일상은 여행처럼 보내면 굳이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재밌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일본은 대학교 졸업식 시즌이라 그런지 기모노를 차려입은 학생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아, 여기선 졸업식 때 여학생들은 기모노, 남학생들은 정장을 입는 거 같다. 졸업가운은 따로 안 입나 보다.

여학생들은 자기한테 잘 어울리는 기모노를 입고 머리를 예쁘게 땋아 올려 꽃 장식도 했더라. 예쁘다 보단 곱다란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느낌 :)

기모노를 고를 때 다들 열심히 고민했겠지?

나라면 하늘색에 심플한 무늬만 있는 기모노를 입었을 거 같다. 난 단조로운 스타일을 좋아하니까. 파워 N의 상상이다..



그래, 졸업이라니.. 얼마나 설렐까..!

 나는 설렘보다 시원섭섭한 마음이 더 컸던 거 같기도 하다.

졸업식이라는 비로소 대학생활이 정말 끝나는 날에, 너무 지겨워서 가끔은 미웠던 이 학교를 사실 참 많이 좋아했다는 걸 깨달았다.

습관처럼 찾았던 학교 카페의 쿠키바닐라버블티, 가장 좋아했던 도서관 구석 자리, 다음 수업까지 촉박할 때 급하게 끼니로 먹었던 돈까스김밥, 다른 학교 친구들이 놀러 오면 '너네도 분명 좋아할 거다' 라며 자랑스럽게 데려갔던 학교 앞 술집.

내 대학생활을 이뤘던 소재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그곳에 추억을 묻어두었다.

그날엔 노을 지는 하늘도 분홍색으로 정말 예뻤다.

나의 졸업을 축하해 주러 온 베프들과 그 예쁜 하늘을 보며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시시콜콜 이야기 나누며 대학생활의 막을 내렸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데굴데굴 열심히 방황하며 만 5년의 학교생활을 잘 마친 자신에게 다시 한번 cheers,,

이 얘기를 엄마한테 해주면서 날씨 좋아지면 우리도 한복 입고 고궁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




어젠 맛있는 함바그도 먹고, KALDI라는 식료품 가게에서 빵 스프레드도 잔뜩 사고, 해리포터 스튜디오도 다녀왔다.



해리포터 스튜디오는 그 영화의 전시회였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처럼 스튜디오라는 단어 때문에 어트랙션을 기대했지만 그런 놀이공원 같은 곳은 아니었고, 입장할 때의 영상에서 다니엘 레드클리프가 말한 것처럼 Love letter to Harry Potter movies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일일이 다 보고 사진으로 남기기보다 분위기를 경험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서 쓱 보고 금방 나왔다.라는 말은 사실 포장한 거고 

사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지쳐서 금방 나왔다.. ㅎ,ㅎ

관광지, 특히 유명한 곳이라면 사람이 많은 건 당연하겠지만, 사람 없는 곳도 균형 있게 일정에 넣어야 지속 가능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어제 다녀온 키타노마루 정원과 에도성 혼마루 고텐 정말 좋았다.

푸른 잎들이 부딪히며 내는 바스락 소리와 넓게 펼쳐진 풀밭 덕분에 마음이 평안해졌다.


아, 사실 어제 이 모든 일을 하기 전에 지진이 있었다.

진도 3 정도라 큰 지진은 아니었지만 지진을 이렇게 생생하게 느낀 건 생애 처음이라 마음이 복잡했다. 

그런데 다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아 하길래 당황했지만 나도 금방 잊어버렸다.

엄마 말로는 일본에는 지진이 1년에 5천 번 일어난다고 한다. 진짠지는 모르겠다. 그럼 하루에도 10번은 넘게 일어나야 하는 통계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만큼 자주 일어난다는 거겠지..? 일본인들에게 이 정도의 지진은 익숙한 일상인거구나..

이게 일본인의 삶에 대한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문득 궁금하다.

언제 큰 지진이 올지 모르겠지만 바쁜 일상을 살다 보니 잊은 걸까, 더 이상 상관 없어질 만큼 익숙해진 걸까.

작은 지진이더라도 나는 불안해서 이러다 오늘이 마지막이면 어쩌지 라는 생각까지 했는데, 나도 익숙해지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넘길 수 있을까.

익숙함은 몸에 서서히 녹는다.

하루하루 후회 없이 살아야겠다 새삼 느낀 날이다.




이번 여행을 함께 한 책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 (Wild Problems)"에서 읽은 구절 중 오늘 읽은 구절은 마음에 오래오래 남기고 싶다.

현명함이라는 것은 나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할 때, 그러니까 '척'을 하며 습관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내가 지금 떳떳하지 않은 생각을 하더라도 그걸로 자책할 게 아니라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그 바꾼 생각으로 믿으면 되는 거구나 싶다.

어떤 생각에 먹이를 줄지 정하는 건 나니까.



이번 여행의 행복한 기억들 :

프랑스 아저씨가 운영하는 찻집, 정갈한 전통 가옥 숙소, 조용한 숙소 동네와 아침 일찍 등교하는 야구부 친구들, 공원의 햇살과 예쁜 기모노를 입은 학생들, 그들의 설레는 입꼬리

신주쿠의 선술집, 의미 있는 화분 쇼핑, 정신이 확 깨는 차가운 바람, 나를 위해 사물함 문을 잡아주던 여자 아이

번역기를 들고 음식이 맛있는지 자꾸 물어보는 야끼니꾸집 알바생, 가게 작은 창문 밖으로 잘 가라고 인사해 주던 라멘집 사장님, 첫날 피로를 녹여주던 반신욕


학교 졸업식을 학교에서 하지 않고 공원에서 하는 게 신기하다! 알록달록 예쁜 기모노와 머리 장식
에도성 혼마루 고텐? 황가시교엔? 이름이 헷갈린다. 일본은 공원에 진심인 곳이라는 것을 느낀 곳
은박지로 꽁꽁 쌓인 채 나온 함박 스테이크! 일식은 재료로 승부하는 듯. 넘 맛있었다!
함박스테이크+ 생맥주 = <3
Whether you come back by page or by the big screen Hogwarts will always be there to welcome you home


평일 아침 9시30분까지는 women-only인 칸이 있다. 여성으로서 열차회사에게 고마운 배려다



돈돈돈 돈키~ 돈키 호테~ 아직도 맴도는 중독성 미친 BGM



KALDI 카레스프레드 진짜진짜 맛있으니까 쟁여올 것
키타무라 카메라 스토어! 카메라 팬이라면 꼭 들려야 할 곳. 훌륭한 퀄리티의 빈티지 카메라와 필름도 판매 중이다
나의 첫 수동필름카메라 OLYMPUS- PENS28, 점원분이 번역기로 정말 친절하고 열심히 설명해주셔서 감사하고 감동이었다 ㅜㅜ
지나가는 길에 본 멋진 포스터.. 오일 옥토퍼스라니!
공항 가는 길에 들은 LOVE RAIN 커버곡. 원곡보다 더 청량한 느낌, 지금도 자주 들으며 도쿄를 회상 중
도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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