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떨림이 낳은 무거웠던 출근길 이야기
겨울을 따뜻이 녹여 주던 갈탄, 나름 박자가 있었던 사벌식 타자기, 수시로 쌀 창고를 공략하던 생쥐와 찍찍이(쥐 러버)에 붙어 소각장으로 향하던 그의 처참한 말로까지. 나의 첫 직장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다. 집과 학교 오
가기를 무한 반복하던 시절이 지나고, 대학생이라고 해봐야 음악다방과 시내 중심가를 누비는 정도가 전부였다. 나에게 고용과 노동의 대가로 누군가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새롭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고용된다는 것은 나의 모든 질서가 철저히 직장의 통제 속에 놓인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처음엔 근무 중에 사무실 공간을 벗어나도 되는지도 궁금했다. 조심스럽게 옆에 앉은 선임에게 물었다.
“저…… 근처 슈퍼에 화장지 하나 사러 나가도 될까요?”
그녀는 잠시 매우 황당한 눈빛을 띠더니 곧 정신을 수습하고 흔쾌히 다녀와도 좋다는 말을 해줬다. 나는 휴지 사러 가는 일조차 업무 외의 출입으로생각했다. 그렇게 조심스러운 시간들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하려고 서류를 정리해서 넣고 책상 서랍 열쇠를 잠그는 순간 뭔가 잘못되는 소리가 들렸다
“뚝”
ʻ뭐지?ʼ 자세히 봤더니 열쇠 머리만 똑 부러져서 몸체는 열쇠 구멍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늦은 시각이라 남아 있는 이가 없었고, 따라서 누구도 이 현장을 지켜본 사람은 없었다. 한 차례 숨을 돌리고 난 후 나는 손에 기를 모았다. 엄지와 검지를 섬세하게 맞붙이고 열쇠의 몸체를 꽉 잡아 빼 보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아마도 열쇠 머리가 부러지면서 몸체도 약간 뒤틀린 게 틀림없었다. 쉬 빠지지 않았다. 발령 이후 최대의 위기 순간이 닥쳐왔다.
ʻ지금은 나의 업무 능력을 보여 줄 때다. 한껏 기대하며 지켜보는 나의 선임들에게 오자마자 사무실 기물을 파손했다고 할 수는 없지ʼ
일단 퇴근은 해야 했다. 사무실 공구 통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당직자는 당직실에 있었고 사무실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던 터라 그것만은 자유로웠다. 펜치가 적당해 보였다. 부러져 밖으로 약간 삐져나온 열쇠 몸통을 부여잡기 쉬웠다. 펜치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오른쪽으로 돌렸더니 다행히 책상은 단단하게 잠겼다. 이제 내일 아침에 책상을 열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나는 펜치를 내 책상 밑에 잠시 두기로 했다. 공용으로 쓰는 공구 통에서 펜치가 없어진 사실은 한동안 모를 것이다. 일단 나는 시간을 번 기분이었다. 그동안 묘안을 궁리해 보기로 했다.
생각과는 달리 별 묘안 없는 출퇴근이 이어졌다. 펜치로 매일 책상을 열고 잠갔다. 다행히 벽을 등지고 사무실 구석에 위치한 나의 자리는 지정학적으로 입지가 매우 좋았다. 이제 동작도 제법 자연스러워져 갔다. 그렇게
펜치가 책상 열쇠처럼 편해지기 시작할 무렵 아무래도 사무실 공용 펜치를 내가 전용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하루는 마음을 다잡고 집에 있는 공구함에서 펜치를 찾았다. 이제 당당히 공용 물건은 사무실 공구함으로 돌려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핸드백에 펜치를 넣고 다녔다. 가방은 조금 무겁기는 해도 마음은 더 없이 편하고 가벼웠다. 그렇게 제법 몇 날이 지나고 서무 담당자가 신입직원 환영회 겸 회식 날짜가 잡혔다고 알려줬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나는 초보에다가 워낙 서류를 펼치고 일하던 스타일이라 퇴근시간이 된 줄도 몰랐다. 뒤늦게 알고 허둥지둥 서류를 챙겨 넣고 있었다. 그새 책상 정리를 일찍 끝낸 선임들이 하나둘 내 주위로 몰려들더니 빨리 정리하라며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원래 일 못 하는 사람이 이런 날 일한다는 농담도 들으면서 나는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서류는 쓸어 캐비닛에 넣고 문구류는 쓸어 책상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동안 하던 대로 펜치를 꺼내 책상을 잠가버린 것이다. 나를 보던 직원들 모두는 일순 정지화면이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 입을 뗐다.
“지, 지금, 이기 뭐, 뭐꼬?”
“그게, 저, 열쇠를 잠그다가 부러뜨려서…….”
“아니 그럼, 말을 하지 이 사람아! 열쇠 수리하는 사람 부르면 되는데”
“제가 고장을 내서 제가 고쳐 볼까 하다 보니…….”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나를 뺀 모두는 박장대소했고, 문제의 해결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그다음 날 바로 사무실 전담기술자로 보이는 분이 오셨고, 책상 열쇠는 말끔히 수리되었다.
더불어 내 가방도 한결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