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영 Sep 22. 2019

주말 서퍼로 산다는 것

 언제부턴가 매일 날씨를 확인하듯 파도 차트를 확인한다.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부터 그 주의 파도 동향을 살피는 건, 실은 조금 섣부른 일이다. 목요일이나 되어야 주말 파도의 모양새가 갖추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말 일정은 목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돌연 결정된다.

 목요일 저녁. 주말 파도 소식이 있다면 곧장 시외버스 모바일 앱을 열고 버스표를 끊는다. 우등버스는 우측의 혼자 앉는 좌석을, 일반버스는 가장 앞줄의 넓은 좌석을 선호하니 그 위주로. 이 앱은 어째서 매번 카드를 꺼내 들고 번호를 찍어야 하나 생각하며 결제를 마친다. '올 겨울엔 면허를 따야지.' 평생 운전하지 않겠노라 했던 다짐은 그렇게 주말 서퍼가 되고서야 깨질 수 있었다.

 금요일 밤. 일을 마치고 요가원으로 향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꼬박 야근을 하는 날도 있다. 주중 마지막까지 달려온 몸은, 그렇지만 피로도 잊은 채 꽤나 익숙한 순서대로 배낭을 싸기 시작한다. 몇 년째 함께 여행 중인 보라색 배낭에는 이제 전우애 같은 것이 녹아 있다. 짐을 실어 뚱뚱해진 배를 한 번 툭툭 쳐 인사 나누고 서둘러 잠자리에 든다.

 드디어 토요일 아침. 아직 채 뚜렷해지지도 않은 정신을 끌고 지하철에 몸을 실어 동서울터미널로 향한다. 한강 위로 부서지는 아침 햇살에 아직 꿈결인 듯 기분이 몽롱해진다. 내가 사는 잠실이 가장 마음에 드는 순간이다.

 이게 주말 서퍼의 루틴이다. 이마저도 파도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한국은 좀처럼 파도를 만나기도 힘들고 어쩌다 오는 파도의 모양도 제각각이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아야 서퍼로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추석 연휴였다. 마침 파도가 있다는 소식에 이게 웬 횡재냐 싶어 추석 당일 차례를 지낸 후 망설임 없이 양양으로 향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 추석에도 용왕님이 자비를 베푸시니, 이 사실을 안 서퍼들이 바다로 몰려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죽도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파도를 확인하기 위해 바다로 향했다. ‘이 정도면 나도 재밌게 탈 수 있겠는데?’ 파도가 깨끗하고 좋아 보였다. 하지만 입수하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라 내일을 기약하며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새벽 파도는 포기하고 느지막이 채비하니 어제만큼 파도는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바다는 이미 물 반 고기 반, 아니 물 반 서퍼 반이었다. 그 속으로 기어이 보드를 들이밀어 이미 포화인 바다를 더 빼곡히 채웠다. 피크엔 잘 타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고 앞쪽엔 강습받는 초보 서퍼들로 가득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한참을 관찰하다 역시나 이도 저도 아닌 숄더에 정박했다.



 이쯤에서 나를 소개해야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쌩 초보도 아니요, 그렇다고 방귀 좀 뀌는 서퍼도 아니다. 무릎 정도 파도가 곱게 와줘야 그나마 잡아 탈 수 있는, 그야말로 어중된 레벨. 게다가 이런 날엔 바다에 친구도 없는 외톨이 서퍼다. 의지할 데라곤 오직 보드뿐이다.



 그런 내가 이틀간 파도를 기다리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생각을 한 게 아니라, 문자 그래도 생각이 머릿속으로 기어코 들어왔다.

 우선 이 라인업에 있으면 늘 저 라인업의 파도가 좋아 보였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고심 끝에 라인업을 바꾼다 한들 그 좋아 보이던 피크를 꿰찰 실력도 자신감도 없었다. 그저 잘 타는 사람들이 부럽기만 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들이 쏟은 시간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가 하면, 어쩌다 운 좋게 파도를 잡아도 전방에 사람이 많아 테이크 오프를 포기하며 남 탓을 했다. 저렇게 진을 치고 있으면 요리조리 피하지도 못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큰 파도를 잡는 건 더 두려웠다. 담력을 키우기 위해 무식하게 뛰어들어도 모자랄 판에 잡은 파도를 금세 포기했다. 내가 말리면 눈앞의 사람들이 모두 다칠 것 같았으니까.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테이크 오프마저 두려워졌다. 좀처럼 잘 잡히지 않는 파도를 어쩌다 쥐고 놓아주며, 파도 탓을 하거나 타인 탓을 했다.

 ‘나는 혼자구나.’ 외로움은 불현듯 파도보다 먼저 내게로 왔다. 파도는 내 것이 아니었지만 외로움은, 고독은 언제나 지독히도 내 것이었다. 나는 서서히, 아주 선명하게 지쳐갔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고 체력이 바닥나 해변으로 나갈 때까지, '딱 한 번만 더'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어찌나 덧없는 집착을 했는지.



 서핑을 하는 이유는 결국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평소엔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데다 내 게 아닌 것에 욕심내지 않는 편인데 바다에서는 내 감정이 밑바닥까지 여실히 드러나니까. 감추고 싶은 내 초조함. 질투심, 탐욕 말이다.



 그러다 문득 수평선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일요일 오후 네 시쯤이었다. 새파란 하늘이 아니라 형광빛의 푸르름이 드리워 있었다. 하늘은 그 자체로 눈부셨다. 잡히지 않는 파도를 갈망하다 지쳐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이건 무엇으로도 담을 수 없어. 오직 내 눈이 이 장면을 기억할 거야.’ 해 질 녘 수면 위로 쏟아지는 빛의 조각들은 또 어떤가. 태양이 이렇듯 짙은 여운을 남기며 명멸하니, 나는 바다에서 홀로 황홀했다.

 초조함과 질투심, 그리고 탐욕을 그제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나는 바다 위에 조금 더 떠있다 욕심을 버리고 바다에서 벗어났다.



 파도 한 번 타지 못하고 연휴를 보냈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토요일 저녁 강습받던 초심자들이 사라지고 파도가 점잖게 오니 몇 번인가 테이크 오프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한 번은 오른쪽으로 길게 라이딩하며 오랜 기다림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오로지 내 몸이 그것을 짜릿하게 기억하고 있다.







 다시, 파도를 확인한다. 이번 주말은 태풍의 영향이 있으니 다음 주말을 기대해본다. 언젠가 바다 마을에 살게 되기를. 막연한 꿈을 자꾸만 입 밖으로 꺼내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천천히 오래가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