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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영 Sep 03. 2021

처방은 러닝

 한 며칠 계절을 앓았다. 미처 만끽하기도 전에 가버린 여름을 앓고 있는 건지, 밤의 길이와 공기의 질감으로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가을을 앓고 있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여름'이라거나 '가을'이라고 표현할 수 없어 '환절기'라 불리는 그 어떤 계절을 앓았던 건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내가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는 거다. 그 무력감의 무게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무거웠다.



 무기력이 나를 짓누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새삼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 때문에.

 때때로 주말을 통째 누워 식음도 전패하고 드라마를 정주행 하면 나는 그게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잘 짜인 각본과 세련된 연출을 뒷받침해주는 배우들의 연기에 한껏 몰입해 결말까지 보고 나면, 그 성실한 종합 예술에 어떻게든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별점을 주는 게 전부지만, 굵직한 여운을 남긴 드라마를 한 자세로 누워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본 것에 스스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평소의 나라면 말이다.

 낮은 조도의 방에서 창문을 열고 향을 피운 후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음악을 틀어 놓고 책을 읽거나, 듣고 싶은 한 곡을 무한 반복해 들으며 하루의 마무리로 요가를 하거나, 불현듯 떠오른 공부를 하는 일은 매일같이 반복되진 않아도 내게 익숙한 일들이다. 오늘처럼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이런 활동은 일과를 끝낸 후 밤에 이루어진다. 좀 더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 모든 일이 정적인 편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적이고 고요한 환경에서 그와 어울리는 여가시간을 보내는 게 내겐 즐거운 놀이인데, 무력감은 그 행복마저도 앗아갔다. 평소와 같은 밤의 시간이 덜컥 두려워진 것이 한 편으론 흥미로웠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 문득 떠오른 게 바로 달리기였다. 그날 나는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홀린 듯 옷을 갈아입고 러닝화를 신었다. 제주에선 주로 집 주변을 달리곤 하지만, 도시와는 달리 해가 지면 위험할 수 있어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곧 사계 해변에 도착했다.

 파출소 앞에 주차를 한 후 가볍게 몸을 풀었다. 오랜만의 달리기라 선곡이 중요했다. BTS의 'I'm fine'을 반복 재생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뛰기 전에는 미처 인지하지도 못 하다, 금세 내가 달리고 있다는 현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뛰기 시작한 이상 번복할 순 없는 일이라 그저 내달릴 뿐이었다. 그렇지. 달릴 때 발이 땅에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은 찰나인데 신기할 정도로 감각은 살아난다. 미세한 오르막도, 작은 자갈도, 콘크리트에서 고무로 지면이 바뀔 때의 차이도 내 발바닥은 놓치지 않고 느끼기 시작했다. 늘 깊고 느린 호흡으로 세상과 연결되고자 했던 나는 어느새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위아래로 요동치는 장기에게 힘내라며 독려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벗고 달리다 맞은편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발견하면, 내 숨이 얼마나 뜨거운 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죽을 맛이었다. 이 사람을 빨리 재치고 마스크를 벗어야겠다는 생각에 발은 더 분주해졌다. 누군가 내 몸통을 쥐고 흔드는 것처럼 피가 도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안 달렸으면 매번 이렇게 힘들 수 있나 싶은 생각이 잦아들 때쯤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왼쪽으론 넓은 바다에 작은 섬이 솟아 있고 오른쪽으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소나무 숲을 지날 때는 숨을 천천히 마시며 향을 음미하는 여유도 부려보았다. 완벽한 선곡이었다. 'I'm fine'은 내 달리는 속도와 정확히 박자가 일치했다.

 송악산 입구에 다다르기 , 달리기를 멈췄다. 도시에서는 멈추지 않고 반환점을 돌아 끝까지 달리곤 는데 제주에서는 반환점에서 잠시 쉬는  익숙해졌다. 물론, 풍광을 즐기기 좋아서다. 한동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고르며 눈앞에 펼쳐진 바다와 송악산 절벽을 바라보았다.  달리지 못한 것이 아쉽기보다는 멈추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Km 조금 넘는 거리인데 이렇게 힘들 일인가.

 돌아가는 길에 아까 지나쳤던 사람과 다시 마주쳤다. 죄 없는 그 사람이 미워졌다. 마스크 안이 후끈거렸다. 이 길이 아니면 집에 돌아갈 방법이 없으니 할 수 없이 계속 달렸다. 갈 때보다 거리는 짧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덜 힘들진 않았다.

 "한껏 숨이 차오르고 심장은 뛰어 느껴져 너무 쉽게 나 살아있다는 걸"

 박자는 물론, 가사까지 완벽한 선곡에 연신 고마움을 느끼며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출발지점에 가까워지자 핸드폰 화면이 4.20Km를 알렸다. 200M가 이렇게 멀었던가.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숫자가 점점 올라가고, 마침내 4.44Km가 되었을 때 천천히 달리기를 멈췄다. 숫자 '4'를 좋아하니까, 더없이 좋은 마무리라고 생각했다.

 벤치에 엉덩이 모양으로 땀이 흥건히 밸 동안 먼바다를 바라보며 호흡의 속도를 되찾아왔다. 파도 소리가 시원한 만큼 갈증이 몰려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파출소 옆 골목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는 걸 나만 몰랐나. 이제 그곳은 사계 러닝의 마지막 코스로 지정되었다. 한바탕 달린 후 먹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천상의 맛이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골목길을 조금 걸었다. 붉게 물든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그날 밤, 거실 문을 활짝 열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로프 인센스에 불을 붙이고 잠시 연기의 춤을 감상하다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몸의 때도 벗겨냈다. 무력감은 보기 좋게 씻겨져 내려갔다.



 어느 책 제목처럼,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건 틀림없다. 내 몸은 무기력해진 내게 넌지시 달리기라는 처방전을 내밀었고 그 처방은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결국 음양은 조화로워야 하고 균형이 맞아야 하는 거였다. 이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이라면 다음 계절의 변화도 문제없지 않을까. 나는 해답을 얻은 것 같아 홀가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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