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자판기/황수선화
비가 내린다.
지하철 개찰구 옆,
오래되어 퀘퀘한 냄새가 나는 그 구석에,
한 자판기가 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벗 삼아
애써 자신을 치장한 듯한,
그러나 낡고 차갑고, 녹이 슨 자판기.
페인트는 벗겨지고
전단지를 떼어낸 테이프 자국은 그대로 남아,
그 치장이 오히려
상처를 더 도드라지게 만든다.
비에 흠뻑 젖은 몸,
볼품없고 초라한 형체.
그 안에서,
언제였는지도 모를 누군가 놓고 간
작은 제비꽃 한 다발을
자판기는 제 전부인 듯
품에 안고 있다.
…
자판기 유리 위로 빗물이 흐른다.
나는,
그 품 안의 꽃이 궁금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
자판기는,
내리는 비 한 방울도
꽃에게 닿을까
행여 차가운 빗방울에 떨까 봐,
몸을 더 웅크린다.
녹슨 철 틈 사이로
작고 떨리는 손을,
조심스레 뻗는다.
그 손은,
짙은 자주색의 꽃잎이
상처 입을까 봐,
두 손 모아, 살포시 감싼다.
나는 숨을 죽이고 꽃을 바라본다.
그때, 자판기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연다.
…
이,
꽃은,
내 전부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고,
내 세계입니다.
하지만…
내 자격 없는 욕심으로,
이 소중한 세계가
불행해질까 봐, 두렵습니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거칠고 축축한 공기,
억센 비와 바람이
이 아이에게 닿을까 봐,
급히 품으로 감싸 봤지만
그 아이는 점점 시들어갑니다.
나는 그저
내 품 안의 꽃이
행복하길 바랐을 뿐입니다.
하지만,
초라한 몸과 희미한 불빛으론
그 아이의 미소 하나조차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자판기의 떨리는 손끝이
짙은 자주색 꽃잎을 어루만진다.
그리곤 힘겹게 다시 말한다.
내가 지키려 했던 이 세계는
시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나에게 한 줌의 비명조차,
토해내지 않았습니다.
…
내가 상처받을까 봐
…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제 나는 알았습니다.
그 아이의 침묵은, 나를 향한 인사였다는 것을.
잠시 후,
녹이 슬어 굳게 닫혀 있던 자판기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린다.
그 아이가 미소 지을 수 있는 곳은,
내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엔,
작은 손으로 지켜내던
조금 시든 제비꽃 한 다발이 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바라보며
자판기는 마지막 말을 건넨다.
제 전부인 이 세계를
부탁드립니다.
이 외롭고 차가운 품이 아닌,
더 넓고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햇살이 있다는 걸
바람이 사랑을 품는다는 걸
꽃이 미소 지을 수 있다는 걸
그 아이에게 알려주세요.
이 아이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
부디, 나를 끝없이 원망해 주세요.
….
그렇게라도 나를 기억해 주세요.
….
나의 세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