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자판기“

by 황수선화

꽃 자판기/황수선화


비가 내린다.

지하철 개찰구 옆,

오래되어 퀘퀘한 냄새가 나는 그 구석에,

한 자판기가 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벗 삼아

애써 자신을 치장한 듯한,

그러나 낡고 차갑고, 녹이 슨 자판기.


페인트는 벗겨지고

전단지를 떼어낸 테이프 자국은 그대로 남아,

그 치장이 오히려

상처를 더 도드라지게 만든다.


비에 흠뻑 젖은 몸,

볼품없고 초라한 형체.


그 안에서,

언제였는지도 모를 누군가 놓고 간

작은 제비꽃 한 다발을

자판기는 제 전부인 듯

품에 안고 있다.


자판기 유리 위로 빗물이 흐른다.


나는,

그 품 안의 꽃이 궁금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


자판기는,

내리는 비 한 방울도

꽃에게 닿을까

행여 차가운 빗방울에 떨까 봐,

몸을 더 웅크린다.


녹슨 철 틈 사이로

작고 떨리는 손을,

조심스레 뻗는다.


그 손은,

짙은 자주색의 꽃잎이

상처 입을까 봐,

두 손 모아, 살포시 감싼다.


나는 숨을 죽이고 꽃을 바라본다.


그때, 자판기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연다.



이,

꽃은,

내 전부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고,

내 세계입니다.


하지만…


내 자격 없는 욕심으로,

이 소중한 세계가

불행해질까 봐, 두렵습니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거칠고 축축한 공기,

억센 비와 바람이

이 아이에게 닿을까 봐,

급히 품으로 감싸 봤지만


그 아이는 점점 시들어갑니다.


나는 그저

내 품 안의 꽃이

행복하길 바랐을 뿐입니다.


하지만,


초라한 몸과 희미한 불빛으론

그 아이의 미소 하나조차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자판기의 떨리는 손끝이

짙은 자주색 꽃잎을 어루만진다.


그리곤 힘겹게 다시 말한다.


내가 지키려 했던 이 세계는

시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나에게 한 줌의 비명조차,

토해내지 않았습니다.


내가 상처받을까 봐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제 나는 알았습니다.

그 아이의 침묵은, 나를 향한 인사였다는 것을.


잠시 후,

녹이 슬어 굳게 닫혀 있던 자판기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린다.


그 아이가 미소 지을 수 있는 곳은,

내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엔,

작은 손으로 지켜내던

조금 시든 제비꽃 한 다발이 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바라보며

자판기는 마지막 말을 건넨다.


제 전부인 이 세계를

부탁드립니다.


이 외롭고 차가운 품이 아닌,

더 넓고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햇살이 있다는 걸

바람이 사랑을 품는다는 걸

꽃이 미소 지을 수 있다는 걸


그 아이에게 알려주세요.


이 아이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


부디, 나를 끝없이 원망해 주세요.


….


그렇게라도 나를 기억해 주세요.


….


나의 세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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