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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바트로스 Oct 25. 2024

20. 은총의 곡선은, 신의 구부러진 선이다?

프랑스식 두꺼운 스테이크를 먹었다, 한국에서.

오래간만에 먹어서인지 아주 맛있었다. 따블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네플릭스에서 이탈리아 영화 ‘신의 구부러진 선’을 시청했다.  

나른한 오후시간,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선택한 영화 줄거리. 

특종이 갈급한 기자가 환자로 위장하여 정신병원으로 잠입 한 뒤, 점입가경의 상황에 휘말려든다. 병원관리자들의 횡포를 항의하던 그녀, 위험한 정신병환자로 인식되어 독방에 감금된다. 탈출 실패가 거듭될수록, 더 가혹한 교정단계를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다.      

병원관계자들의 시각은 ‘신의 구부러진 선’으로 만든 존재가 정신질환자다.

치료명목이라는 이름하에 온갖 수단방법으로 환자를 길들인다. 이런 엄격한 규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환자는 독방에 감금되고. 혼자 격리된 환자가 공포로 복종하는 모습을 교정효과처럼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환자는 ‘신의 구부러진 선’으로 태어난 열등한 존재, 오직 교정대상으로 보는 우월적 인식에서 행해지는 폭력성을 고발한 영화. 폭력성 주체는 인식의 오류라는 메시지다. 


동료기자의 도움으로 탈출한 병원 정문에서, 환하게 웃는 여기자!

그녀 따라, 나도 웃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그녀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그녀가 나인지, 내가 그녀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댔다. 누가 봤다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로 여길 정도로. 

비로소, 오늘 해방된 나. 

영화 ‘신의 구부러진 선’은 나를 구출한 동아줄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허우적대던 미움의 늪에서, 기적처럼 빠져나온 나.      


19세기 가톨릭 시인 잠므의 박사과정 논문심사 장소.

참관자는 3인의 교수들, 소설전공자 2인 그리고 냉담하기로 소문난 시 전공자. 그를 별견한 순간, 불안한 전율이 온몸으로 흘렀다. 

뭔가 꼬이는 예감이 든 것은, 그에 대한  유쾌하지 못한 기억 때문이다. 

대학원 지도교수와 박사과정도 함께하기로 합의한 뒤, 1년 동안 미국 교환교수로 떠난 뒤. 

시인 프랑시스 잠므(Francis Jammes,1868~1938) 작품분석 및 필수과목 수강의 과제물만 제출하는 모처럼, 다소 느긋한 시기였다.

9월 박사과정 등록하러 갔던 날이다. 지도교수 사무실 책상에서, 대리 업무를 보고 있던 그가 평소와 달리 미소로 반색했다. 대학 내에서 19세기 시 전공하는 유일한 학생인 나, 유일한 시 전공교수인 그와 만난 자리다. 

석사과정 지도교수가 박사과정도 지도한다고 첨언 설명했다. 

갑자기 표변한 기색으로 돌멩이 내던지듯, 

“그 교수로부터 어떤 언질도 받은 봐가 없어요. 따라서 박사과정 입학은 불허합니다.” 

그가 오해했던 것일까? 지도교수 제안하러 온 줄로? 

합의된 내용이라고 거듭 말하는데도, 미국으로 확인 전화한 그. 

지도교수는 강의 중이었다. 1시간 후, 온 회신 메일 내용,

“출국 전에 지도교수 수락했으니, 박사과정 등록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귀가 길에 혼잣말로 “역시 소문 대로구나.”

소문난 학자인데도, 1명의 제자도 없던 그와의 불편했던 면담. 

        

그 불편한 기억으로 논문심사 시작 전에, 이미 반쯤 주눅 든 나.

지도교수는 논문내용을 지지하는 발언도 평점도 줄 수없는 참관자 일뿐.

다른 두 교수만 논문 내용을 논평하며 평점을 주는 시스템이다.  

시전공자교수라는 이유로 심사위원장이었던, 그는 시작부터 송곳 질문으로 논문의 허술한 지점을 빠짐없이 찔러댔다. 

도대체 무슨 말로 항변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고양이 앞에 쥐처럼 오그라들었던 것 같다.

드디어 마무리 총평하는 순간, 비웃듯이 차가운 목소리로,

”프랑스아카데미가 우습게 보이나요? “ 

떨리는 목소리로 방어했던 나를 향하여, 모멸적인 질문을 투창처럼 던졌다. 방어 발언권 없는 지도교수가 나서며,

”너무 심한 표현 아닌가요? “

개선장군 같은 미소로 총평하는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 싸늘함에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아파트 문을 닫고 들어서면서부터, 연달아 터져 나온 ”XXX!“

개 무시당한 억울한 분통을 쏟아내며, 밤새도록 꺽꺽댔다. 

석사 논문은 수정 없이 제출했는데도, 기분 좋게 통과됐다.

학장으로 승진된 지도교수가 1년간 미국 간다는 갑작스러운 발표 후, 논문을 수정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 아쉬움을 되새기며, 참으로 꼼꼼하게 준비했다. 무려 30번이나 수정했는데도, 결과는 수정 않고 통과한 석사논문과 동일한 점수. 최고의 점수를 받고 싶다는 소망으로 꼼꼼하게 준비한 논문, 비웃으며 악평을 쏟아내던 그!  

오만정이 다 떨어진 날이다. 

프랑스인도, 프랑스 문화도, 프랑스 문학도, 프랑스 시까지도. 

    

그 충격으로 드러누운 몸과 맘은 폭풍우에 휘둘린 풀잎처럼, 맥없이.

가톨릭 시인 잠므가 예찬하는 자연의 부드러움은 ‘은총의 곡선’이라는 논문이 난도질당한 날로부터. 

평정심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거의 한 달이나 걸렸다.

박사과정 논문논거를 입증하는 작업, 작품내용을 추가적으로 제시하고 입증해야 하는 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하는 데에는. 

다시 일어날 때마다, 점점 기력이 잦아들며 소멸되는 느낌이다.

내면에서 주고받는 두 목소리. 

현실적인 내가, 몽환 속의 나에게 던지는 질문,

”왜 힘들게 매달리니? 아무런 장래 보장도 없는 프랑스 시에? “

”나도 잘 몰라. 그냥 좋았어. 오래전부터. “ 

”야! 꿈 깨라! 그만두고, 좀 편한 길을 찾아봐. “

”그만두면, 껍질만 남는 빈소라인데? “   

이런 내면의 소리가 자주 들릴 만큼, 점점 지쳐가고 있던 시기.     


그 동안 쓴 논문 분량을 지도교수에게 점검받는 날이다.

논문전개방향에 관한 구체적인 주문과 설명을 끝내던 그, 

”다음 학기 3월부터, 다른 대학으로 이동합니다. “

최소한 매달 2번은 만나서 논문 첨삭지도를 받아야 하는데... 다른 도시까지, 먼 거리를 오고 가기에는 무리다. 난감해하는 표정을 눈치채고,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아르바이트 자리는 구해 줄 수 있어요. “

이사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이사도 아파트도 비용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다.

터덜터덜 귀가하는 중이다. ‘어떻게 해아 하나’를 돼 뇌이며.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던 길옆의 공동묘지! 

도시 안에 있던 공동묘지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굉장히 놀랐다. 지금도 여전히 생경한 모습이다. 그 옆을 지나다가 불현듯 스치는 생각,

“이곳에 묻히고 싶지 않아. 부모님이 묻힌 곳으로 귀향해야지.” 

누군가가 남아있어 달라고 붙잡는 이가 없는데도,

”프랑스 땅에서 늙어가고 싶지 않아. 공동묘지 비석위에다가, 내 이름 새기고 싶지도. “     


갑작스러운 TV 기자 회견.

계속된 실업률 상승으로 인하여, 정부 내각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노동부 장관도. 외국인 장기 체류자가 프랑스 노동자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확신한 그는 ‘유학생은 자국에서 매달 최소 2500프랑 송금되어야 한다.’는 조항과 함께 ’한 달에 20시간 이하만 노동할 수 있다’는 일명 ‘빠수꾸와법’을 공표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유학생에게는 그저 스쳐가는 바람소리인 그 뉴스, 겨울 광풍처럼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프랑스에 왔을 초창기에는 체류증 발급 과정은 이렇게 엄격하지 않았다.

지금은 체류증 발급받는 날이면, 온몸의 세포들이 질러대는 외침,

“돌아가리라, 떠나왔던 내 나라로!”      

시나이 산 돌에 새겨졌던 10 계명처럼, TV에서 발표한 빠스꾸와 법령도 심층깊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 기자회견은 맨손 유학생인 나에게는 비정한 엄포였지만, 지금 회상해 보면 자국의 노동자를 보호를 위한 정책을 발표했을 뿐이다.

나더러 출국하라고 모질게 몰아세운 적도 없고, 다만 우리는 각자의 처지가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도 독특한 그 이름은 지워지지 않은 채, 왜 지금껏 남아있는 걸까? 

대책 없이 내쫓기는 것 같았던 씁쓸함도 ‘시간이 약이다’라는 속담처럼, 그도, 정책도, 이해된 지 오래다.   

    

아직도 수시로 미움의 늪으로 나를 밀어 넣는, 비웃던 목소리.

박사과정 논문 심사 시간에 냉랭한 표정으로, 논문주제 ‘은총의 곡선’을 비웃던 교수. 가톨릭 시인 잠므 시에서 드러난 글자와 문장만 독해한 그는 시인 영혼의 바탕색인 종교 색깔을 알아보지 못했다. 

시인의 자연 찬가는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현존예찬으로 파악한 나. 

잠므가 노래한 자연의 아름다움은, 자연 안에서 숨 쉬는 창조주 예찬, ‘은총의 곡선’이라는 논거를 모질게 비웃던 그. 

전혀 다른 인식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귀국한 후에도 가끔 환청처럼 들렸다, 그날의 그 목소리가. 

그의 얼굴도 목소리도, 소멸된 오늘! 

“신의 구부러진 선” 영화 덕분으로.

동서양간에는 절대로 공감될 수 없는 인식이나 개념도 존재하나 보다. 

내가 보는 ‘은총의 곡선’은, 그의 인식에는 ‘신의 구부러진 선’처럼. 

비로소 그가 이해된 오늘, 심층바닥 상처의 굳은살 위에 깃발을 꽂았다.

아주 크고도 굵은 글씨로, 은총의 곡선은신의 구부러진 선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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