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매일 보는 학생들은 대부분 의사나 판사 지망생들이다.
의대나 법대 학생은 전공 관련 자격증 시험 날짜가 발표되면, 대부분 서둘러서 주변 정리부터 한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자격시험을 앞둔 여학생이 최우선 순위로 남자친구를 정리한다.
이런 이유로 책상 붙박이 학생들이 갑자기 늘어난 도서관 풍경.
어제까지도 껌 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그들. 주말마다 2박 3일 여행 가는 것도 모자라, 한낮에도 스스럼없이 스킨십에 몰두하던 커플도 예외는 아니다.
이별 통보를 주고받은 양쪽 다, 구멍 날 정도로 책을 보며 침묵하고 있다.
반으로 자른 두부처럼, 따로 떨어져 앉아 책에 집중하는 모습에 놀랐던 나. 한국 정서와 동떨어진 낯선 풍경이다.
한마디도 않고 침울한 옆 자리의 절친 메리암에게,
“왜, 무슨 일 있어?”
“어제, 자비에와 헤어졌어.”
“싸웠어?”
“아니야. 판사자격시험 날짜가 6개월 후로 확정 발표됐어.”
“시험날짜발표와 자비에와 헤어지는 것이 무슨 상관인데?”
“시험공부에 방해되니까. 판사자격시험에 꼭 통과해야 해.”
“너무 이기적이지 않아?”
“이기적이라고? 전적으로 시험 준비하는 내가? 판사시험통과는 내 인생의 로드맵이지만, 남자친구는 언제든지 바뀌는 프랑스야.”
자판기 커피 마시러 나갔다가 만난 낯익은 의대생에게,
“오늘은 왜 혼자 왔어?”
“의사면허시험 때문에 000과 헤어졌어. 올해는 꼭 통과해야 하거든.”
이번에는 처음처럼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그녀들과 나의 다른 점은 비단 외모뿐만 아니다.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도, 미래를 대처하는 태도도 확연히 달랐다.
텍스트가 제대로 이해 안 된 상태에서 과제물제출 날짜가 임박할 때, 논문의 주제를 못 찾고 짙은 안갯속에서 헤맬 때, 경제적 곤란함에 처할 때, 충동적으로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이 곤경에서, 나를 구출해 줄 누구 없소?”
다 포기하고, 난국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자력이 아닌, 누군가의 힘에 편승함으로써 해방되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상대방에게 떠넘기고, 위기를 빠져나가려는 술책이다.
“결혼이나 할까?” 내가 중얼대는 그 상황에서,
메리암은 남자친구에게, “판사시험 준비에 전념해야 돼. 그만 헤어지자.”
그녀로부터 확고한 장래계획과 성숙한 마음을 듣기 전에는, 나의 의식이 철부지 상태라는 인식도 없었다.
무책임하고 또 충동적인 나의 발상에 대해 심각하게 깊이 성찰해 본 적도.
나의 심층에 숨죽인 의타심은 그녀들과는 확연히 다른 의식체계다.
평소의 부드러운 모습과는 달리, 기필코 판사시험에 합격해야 하는 이유를 듣고 온 날이다. 깊이 속내를 들여다본 밤에 드는 자문,
“코뿔소처럼, 충동대로 전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6개월 후, 도서관에 나타난 절친 메리암.
할 말이 있으니 잠깐 밖으로 나가자던 그녀,
“오늘은 공부하러 온 것이 아니고, 널 만나러 왔어. 나, 판사 시험에 합격했어. 지방가정법원에 배정도 받았고. 그리고 자비에와 다음 달에 결혼해. 작은 성에서 결혼식과 피로연 파티를 해. 꼭 올 거지? 초대장이야.”
“세상에! 판사시험과 판사등용 둘 다 합격하다니! 정말 축하해! 이쁜 판사님 결혼식인데, 당연히 가야지.”
얼싸안고, 프랑스식으로 기뻐했다.
둘 다, 눈물 글썽이며 한참이나 진심 어린 기쁨의 탄성을 질러댔다.
절친 메리암에게 근사한 결혼 선물을 꼭 주고 싶었다.
어떻게 마련하나? 언제나 돈이 문제였다. 선물을 마련하지 못해 우울했다.
아무리 궁리해도 신통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 후에 필요한 책을 찾으러 도서관에게 들른 메리암에게
“선물 목록 전부 들어왔어?”
“아직, 목록 전부가 채워진 건 아니야.”
“누군가 옷장도 찜했어?”
“아니, 왜?”
한참이나 주저하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나에게 오래된 옷장이 있어. 예전에 욜랑 언니가 결혼할 때 가지고 온 이태리식 옷장이야.”
너무나 뜻밖으로 반응하는 그녀,
“좋아, 당장 자비에랑 함께 가서 볼까?”
“실망할지도 몰라. 70년이나 된 건데.”
둘 다, 옷장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좋아했다.
옷장에 새겨진 소박한 꽃문양이 마음에 든다고 활짝 웃는 메리암.
쇠못이 사용하지 않고 제작된 옷장을 분해하면, 충분히 자동차로 싣고 갈 수 있다고 자비에도 좋아했다.
어디에서도 구입할 수 없는 옷장이라고 좋아하는 모습에 반신반의했지만.
귀한 선물로 받아주는 그들의 태도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프랑스에서 처음 참석하는 결혼식.
루이 왕정시대에 건립된 성에서 치러지는 결혼식도, 연이은 결혼 피로연도, 난생처음으로 참석했다.
고전 프랑스 영화에서는 본 적은 있지만, 실제 모습은 처음이다.
신랑 자비에는 프랑스 전통적인 집안 태생으로, 푸른 눈에 키 큰 훈남이고.
신부 메리암은 아랍 공주처럼 우아한 품위와 깊은 눈매의 보기 드문 미인.
선남선녀의 커플이 화려한 상드렐라의 불빛 아래서 춤추는 모습은 신데렐라의 결혼식 장면이 연상될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이런 멋진 모습의 결혼식은 본 적이 없었고, 이후에도 보지 못했다.
둥근 각 테이블마다, 내빈 명찰이 세워져 있었다.
정 중앙에 지정된 내 자리는 결혼식 광경이 한눈에 들어와서 좋았다.
고전적인 둥근 테이블에 앉은 우리는,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나의 왼쪽에 앉은 수수한 차림새를 한 풍성한 몸매의 아가씨,
“메리암의 고등학교 동창생이에요. 청소부로 일하고요.”
뒤이어 오른쪽에 앉은 초로의 왜소한 아저씨가,
“가정법원 재판장입니다. 메리암 판사와는 같은 법원에서 근무해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들에게,
“남한에서 온 유학생입니다. 불문학 박사과정 19세기 시 전공 중이지만, 매일 헤맨답니다.”
우리 셋 중 그 누구도 주눅 들지 않았고, 또 뻐기는 태도도 없었다. 아주 허물없는 대화를 나눈 유쾌하고도 흡족한 밤으로 기억하고 있다.
프랑스 국기가 상징하는 평등, 그 깃발처럼 배치된 좌석에서 행복한 피로연!
메리암과 자비에 둘 다, 내 친구들이다.
판사시험 날짜가 발표된 후, 메레암은 자투리시간이 없어졌고, 나의 과제물도 점검해 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가 남자친구를 소개하면서,
“과제물 컨펌 걱정하지 마. 자비에가 봐주기로 했어.”
머쓱하게 웃던 그는,
“기대하지 마. 난 문학에는 전혀 소질 없는 젬병이야!”
그날부터 경제학과 대학원생인 자비에와 우리 셋은 친구가 되었다. 그들의 데이트에 내가 가끔 끼일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였던 우리들.
프랑스 여자들이 다소 까칠하고 차가운 분위기인데 비해, 소심한 이방인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따뜻함이 느껴지는 메리암의 눈빛.
남자 친구인 자비에와 이별한 날, 처음으로 우울한 기색이던 그녀가 토로한 내용이다. 그녀가 기필코 판사가 되어야 이유다.
“29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울 엄마가 만삭의 몸으로 프랑스로 왔어. 5살 오빠와 3살짜리 언니를 데리고. 목숨 걸고 국경을 넘어왔대. 도착하자마자, 나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어. 판사는 엄마의 꿈이고, 또 내 꿈이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엄마야.”
또래의 젊은이들에게는 드물게, 자비에는 일편단심으로 6개월 동안이나 메리암을 기다렸다.
그 결과로, 오늘 너무나도 아름답고 능력 있는 판사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의 얼굴은 함박웃음 그 자체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에게 신데렐라처럼 보였다.
한참 뒤 메리암은 엄마를 부둥켜안고 춤을 추었다. 고운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낯선 프랑스에서 혼자 아이 셋을 키운 엄마를 꼭 안고서. 그 모습에 우리 어매가 떠올라, 덩달아 내 눈에도 눈물이.
신랑신부 둘 다 착한 심성 영향인지, 젊은 내빈들이 많았다. 그들의 유쾌한 웃음소리와 큰 목청으로 다소 소란스러웠지만.
음식은 프랑스식과 아랍식이 혼합된 다양한 메뉴들, 처음 맛보는 요리들로 흡족한 결혼식 피로연이었다.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흥겨운 춤꾼들, 그중 누군가가 춤추자고 제안할까 봐 살그머니 빠져나왔다. 다행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내빈용 숙소로 돌아와서 깊이 잠들었다.
얼마 전, 조카 결혼식에 참석했었다.
잘 각본 된 행사처럼 재빨리 지나갔다. 여러 가지로 다른 점이 많았다.
오후 내내, 선명하게 떠오른 프랑스 결혼식 장면.
우아한 결혼식과 느긋한 피로연에서 행복하게 춤추던 신랑신부와 하객들.
고풍스러운 성의 넓은 홀에서 신데렐라처럼 웃던 판사 친구, 메리암 결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