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만성우울증은 시작되다

뿌리가 뽑혀서 둥둥

by 몰리

가족들만 알았다면 우울감이 덜 했을까?

그건 모르겠다. 다음 날 아침, 밥을 먹고 논바닥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그 전쟁 같은 시간들은 어디로 간 건지 이상하게도 평온하기까지 했다. 이제는 거짓말을 안 해도 된다는 것, 더 이상 들킬까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묘한 안정감이었었나 보다.
하지만 며칠 뒤, 친구의 말에 나는 그만 부여잡고 있던 세상을 잃고 만다. "그동안 천 원, 이천 원 몰래 훔쳤던 게 너라면서?"

소꿉친구 아이가 그랬다. 내가 너무 놀라 얼어붙어서 묻자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네 언니가 마을회관에 마실 와서 그러더래. 맞아? "


열두 살의 아이에게 시골 동네는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둘째 언니 - 어린아이 정도의 정신연령을 가진 언니였다 - 때문에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내가 도둑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구나.......

아이의 머리 위로 수치심과 죄책감이라는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학교 오고 갈 때 동네 사람이라도 마주칠 때면 인사를 받아주더라도 왠지 한심하게 보는 것만 같았고 돌아서서 조용히 수군거리는 것만 같았다. 형제들의 비아냥, 엄마의 냉대는 갈수록 심해졌다. 작은 실수에도 큰 소리로 혼나는 일이 일상처럼 되자 아이는 자기가 저지른 일은 중죄이며, 그것은 이제 되돌릴 수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으며 이렇게 버림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단 몇 달 사이만에 행복하고 기쁨에 차 있던 노랑나비는 어느새 징그럽게 생긴 지렁이로 변해 있었다.

겨울날이었던가, 이른 아침잠이 덜 깬 체로 대청마루에서 요강에 오줌을 누고 있는데 엄마가 지나가면서

" 쯧쯧, 오줌도 하나 시원하게 못 싸네." 태어날 때부터 그러셨다면 절망감이 덜 했을까? 나는 방법도 모르면서 이런 불량품은 이제 그만 죽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세상에 온통 소문이 퍼져서인지, 내가 버림받은 것을 알아서인지 동네 한 오빠의 성추행도 어느 날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몇 달 집에서 쉬는 중이었던 고등학생이었는데 내가 버림받아 뿌리가 뽑혀서 둥둥 떠다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처음에는 인형장난감을 주겠다고 불렀다.

연락책은 그때도 공교롭게도 둘째 언니였다.

나는 내 몸에다 끈이 묶여버렸는지 그가 잡아당길 때마다 언덕배기 그의 집까지 힘없이 끌려가곤 했다. 언제는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마당에서 일을 하다가 내가 그놈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도 별말을 안 했다. 참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저분들도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그가 옳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들의 심심함을 채워주는 아이가 와줌이 고마웠던가 혼란스러웠지만 나는 다리에도 마음에도 아무런 의지나 힘이 없었기 때문에 저항 또한 없었다.


몇 년 전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그를 40여 년 만에 보았다.

바로 앞에 두고도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어쩌면 지금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사과를 요청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공무원처럼 도덕적으로 예의 바르게 앉아있는 모습이 얼마나 이중적이고 역겨운 마음이 들던지. 마음이 먹구름 같았던 시절엔 드라마를 많이 봐서인지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아내에게 폭로라도 할까 아니면 아니면 협박을 할까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독을 품는다고 그가 죽는 것이 아님을 안 지금은 용서와 상관없이 덤덤해졌다. 그래도 다음에 우연히라도 보게 되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할 것이다.

" 그 어린 나에게 했던 일에 대해서 사과하라 " 라고 말이다.

분노나 수치심 없이 아주 덤덤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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