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최악의 날

어쩌면 건너야 할 강

by 이녹

아마 이런 겨울이었을 것이다.

여고생 시절, 학교가 끝난 후 친구와 시내에 가서 돌아다니다가 시장 한편에서 호떡을 사 먹었었다. 미리 구워놓은 호떡이 없어서 친구와 쪼그리고 앉아 아주머니가 호떡 굽는 것을 어색하게 바라보고 있었던가 그랬는데

"너네 대천여고 다니니?"

아주머니가 우리 교복을 보더니 물으셨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덤덤하고, 어찌 보면 한탄 같은 것을 품어 말씀하셨다.

"나도 거기 나왔어. 그렇게 학교 다닐 때는 나중에 이렇게 호떡이나 굽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 짧은 대답이 - 30년은 족히 흘러간 - 오늘 기억이 나다니.

돌아보면 또는 주변을 살펴봐도 예상대로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인생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 것은 고통이 덜 할 수는 있겠지만 즐거움 또한 없을 것이다.


돈 주고도 못 산다는 겨울 햇살이 지금 창을 통해 방안에 가득 들어와 있다. 평온하고, 따스한 순간이다.




어제 거의 1년여, 한집에 살아도 대화를 거의 끊고 사는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이렇다 할 이름도 명명하기 싫어 저장을 안 했더니 숫자만 뜨는 화면을 보고 잠시 누군가 했다. 이전보다 상대하기 덤덤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편안한 상대는 아닌지 박동이 빨라지는 심장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여보세요." 생각만큼 목소리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내 상상의 나래에서는 불에 딘 것처럼 분노에 차서 소리 지르고, 고운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었는데 저쪽도 의외로 덤덤했다. 그것은 앞으로의 경과에 따라 언제든 달라지겠지만. 이런 상황까지 올 수도 있음을 몇 차례 전했던 효과가 있는 듯했다.

"좀 전에 송장 받았다. 나도 이렇게 사는 거 싫지만, 애들 때문에 그냥 사는 거야. 내가 계속 버티면 너는 변호사 비용만 그냥 날릴 수도 있을 거다. 너도 알겠지만, 나 돈도 지금 없어."

더 이상 듣기가 괴롭고, 아니 귀찮았다.


변호사 상담을 받으러 가기 전까지, 또 받고 나서도 다시 결정하기까지 몇 번을 망설였던 선택이었다.

"남들 다 그러고 살아."

"애들 생각하고, 참고 그냥 살아라."

"이혼이란 게 어디 쉽냐?"

이런 말들에 이게 아닌가 발걸음은 종종 멈춰졌고, 이혼절차를 밟아가면서 겪게 될 고통스러운 상황과 순간들을 상상하다가 지레 겁을 먹고도 멈춰졌었다.




헌데, 내가 왜 이 선택을 하려는지 곱씹어보다 어느 동영상을 보니 - 고민하는 시간 동안 수많은 관련 동영상을 섭렵했었다 - 이혼 후의 장단점을 한번 적어보라는 말을 듣고 찬찬히 적어가다 보니 장점이 더 많았다는 것. 그리고 나도 힘들어서 내린 결정이지만 어느 날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었을 때 전화로 어떤 말들을 쏟아냈는지 아빠인 줄 알고, 경직돼서 현관문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눈빛과 몸짓을 몇 번 보고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기도 했다.

인생 전체가 망가진 건 아니지만, 이것은 또 하나의 실패가 될 것이다. 그건 명확하다. 그리고 내 잘못도 물론 여러 가지가 있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징징대고 싶지는 않다.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는 있다는데, 후회가 덜한 선택이라고 믿을 뿐이다.


12월 2일이라는 달력의 날짜를 보다가 '풋' 쓴웃음이 났다. 수년 전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뭐가 뭔지 모르게 정신없이 식을 치렀던 결혼기념일이기 때문이다. 그 아주머니의 말씀대로 그날의 나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상상이라도 했을까? 원고란엔 내 이름이, 피고란에 상대의 이름이 쓰여 있던 색깔 이상한 낯섦이라니.


최고의 날이, 시간이 흘러서는 최악의 날이 되는 것이 이렇게나 덤덤한 일이구나 싶어 다시 한번 쓴웃음이 난다.

두렵고, 무섭기도 하지만 그것에 알 수 없는 설렘도 가득하다. 그래서 그저 신기할 뿐이다.


- 내 인생 최악의 날에


내 인생 최악의 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고

눈물마저 고갈되어

내 몸이 바싹 마른 물항아리처럼

텅 비었을 때

나는 밖으로 나가

레몬 나무 옆에 섰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잎사귀 하나의 먼지를

문질러 주었다.

그런 다음 그 서늘하면서도 윤기 나는

잎을 뺨에 대었을 때

소스라치게 놀란

그 강렬한 생의 향기!


엘렌 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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