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타인의 기준에 맞추지 않는 자기 돌봄이 필요해요
이현정 교수의 <우리는 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 리뷰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이현정 교수의 책 <우리는 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를 읽었다. 이 책의 주제는 타인 지향적인 삶에서 벗어나 자기 돌봄의 철학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한국 사회의 급속한 경제적 성장과 가족주의 문화 등으로 획일화된 삶의 기준을 따라 천편일률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는 점에 문제의식을 갖고 타인의 욕망에 내 삶이 이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1장은 '몸'에 대해, 자신의 몸인데 타자의 기준에 의해 건강을 해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이야기한다. 2장은 우리나라 '가족'의 특성을 파악, 가족주의 문화의 덫에 대해 문제점을 말하고 가족에 대한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함을 말한다. 3장은 '젠더'에 대한 우리 사회 젠더 갈등을 말하고, 혐오가 아닌 실질적 평등, 성평등을 이야기한다. 4장은 '자기 돌봄'의 필요성을 말한다. 타인 지향적 삶이 아닌 다양한 삶의 가치가 인정되는 관용의 문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먼저, 우리 사회에 범람하는 '몸 프로젝트'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고 자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재료일 수 있다. 몸을 가꾸고 관리하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와 지위, 성향 등을 표현하는 상징이 되었다. 젊어서부터 노화 속도를 조정하고, 성인병을 사전에 관리하며, 몸매 가꾸기, 영양식품 섭취 등 삶의 주된 관심이자 자아를 들어내는 지표가 되어 버렸다.
신체가 대상화되면서 타인이 보기에 적절한 몸인지의 여부가 사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 버렸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타자화해 관리하는 것을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때로는 타인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병적으로 자신을 관리하고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며 고통을 주는 경우도 많다.
몸이 자아의 반영이라는 자기모순적인 사고는 자기 문제, 자기혐오까지 갈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고단백, 고칼로리의 음식을 마구 먹으라고 자랑하면서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 되는 몸을 요구하는 것이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스스로를 관리하고 날씬한 몸매가 되어야 된다는 요구를 수행하지 못하면 뒤처지고 부족하며 게으른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때로는 사회가 몸의 질병을 만든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미국의 작가 '록산 게이'의 사례가 그것이다. 록산 게이는 어린 시절 남학생들에게 집단적 성폭행을 당하고, 내 존재가 관심을 끈다는 것이 폭행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깨닫고, 스스로를 없애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몸을 추하게 만들기 위해 거구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삶면서 거구가 된 자신을 사람들이 무시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뚱뚱한 몸을 가진 사람은 함부로 무시해도 되는 것, 인간의 권리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 인식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폭식증 등 섭식장애로까지 이어진 내용을 책으로 펴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노력했지만 끝내 허기를 충족하지 못해 결국에는 자기혐오에 이르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 록산 게이의 사례는 몸에 대한 시선이 개인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나타낸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상황', 우리 몸은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에 노출되고 끊임없이 평가를 받는다. 거식증 환자가 증가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다. 젊은 여성에게 우리 사회가 날씬한 몸을 요구하는 분위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가는 문제를 제기한다.
내 몸의 주체를 되찾는 자기 돌봄의 철학이 필요하다. 미셀 푸코는 '규율 권력'이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을 스스로 내면화하여 순종하는 모습이다. 스스로를 감시하는 것이다. 스스로 감시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미세한 몸짓, 특정한 말투, 신체 등 우리의 모습은 스스로 규율하고 감시하는 체제 속에 놓는다.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내면화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어떠한 비판이나 지적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혐오의 태도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감시하는 것이다. 이를 미시적으로 일어나는 규율 권력이라고 말한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라캉은 400여 명의 환자와 상담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 정리했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으며, 유일하게 보는 방법은 거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울에서 보는 모습은 나의 반사된 모습일 뿐 진정한 나 자신의 모습은 아니다. 그저 나를 비추는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만 나를 볼 수 있기에, 결국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눈에 비추어진 나의 모습으로 규정된다.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자신의 욕망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그 욕망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바라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타자의 성적 욕망이 되기를 원하며 또한 인정받기를 원한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 속에서 형성된다. 부모님의 기대, 선생님의 기대, 세상의 기대 등 사회의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살아왔다. 라캉은 상징계 속에서 '~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욕망이라는 것이 자신의 욕망이어야 한다. 타자가 자신에게 바라는 욕망이라면, 진정 내 인생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타자의 욕망과 내 욕망을 구분해 알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스스로 소망하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욕망하는 것을 욕망할 수 있는 주체로서 새롭게 정립해 나간다면, 우리 삶이 소외되지 않기 위한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새로운 자기 돌봄의 철학이 필요하다. 타인의 욕망,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저마다 건강과 행복에 대한 다양한 가치와 모양을 꿈꿀 수 있는 모습 말이다. 타인의 욕망에 따라 나의 신체를 규제하고 규율하는 방식의 삶은 내 몸을 세상의 시선에 예속되게 만드는 것, 진정한 자유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어 한다. 외부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숙고한 뒤, 스스로를 더 자유롭게 하고 더 행복감을 주는 방식이어야 한다. 자신을 불안하게 하고, 삶의 족쇄를 채우는 방식은 자기 돌봄이라 할 수 없다.
2장에서는 가족에 대해 말한다. 정상가족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회는 수많은 가족의 총합이다. 하나의 작은 사회는 오늘날의 가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정상가족'이 실존하는 것일까? 사회의 고정관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문화 가족, 1인 가구, 한무모 가족, 고령자 부부, 딩크족 다양하고 그 수가 많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가족'의 이미지는 성인남녀와 어린 남매였다. 1997년 IMF 이후 핵가족의 형태의 가족이 점차 붕괴되는 양상을 보였다. 오늘날도 여전히 정상가족의 이데올로기는 남성 가부장을 중심으로 아내와 어린 자녀들로 구성된 가족의 형태이다. 국가 통치에도 편리하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권위 지속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 정상가족의 형태는 오로지 계급적으로 중산층 집단에서만 가능한 방식으로 점차 바뀌고 있다.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서 가족주의가 강하다. 가족주의가 강력한 이유는 가족의 역할이 구성원의 자유의지나 개별성을 생각하기보다 각자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 하고, 아버지의 몫, 어머니의 몫, 자녀의 몫 등 그 역할에 따른 책임이 규정되어 있다. 가족 내에서 각자가 어떠한 위치를 점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에 응당한 역할과 바람직한 태도가 결정된다. 가족의 집단 이익이 강조되고, 개인의 희생과 노력이 가려지기 쉽다. 한국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다. IMF 금 모으기 운동은 가족주의가 확대된 하나의 국가관, 전 세계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다. 1960년대부터 약 30~40년 정도 급속한 근대화로 인해 인간의 삶에서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문제들, 건강, 돌봄, 안전 등은 등한시되었다. 개인이 의존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가족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가장 급성장하는 시기에 국민을 돌보는 문제는 모두 개별 가족이 떠맡았다.
가족주의는 한국전쟁 이후 만성적인 전쟁 위협, 불투명한 미래 전망, 가족만이 불안한 삶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지지대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권력 다툼, 가족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혈연, 학벌, 동향 등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왔다.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는지 과시, 어디 성 씨, 어느 동향, 조상 중에 어떤 직위, 어느 학교 출신이 지나치게 강조된다. 혈연, 학벌, 동향 등 확대된 가족주의는 패거리주의를 만들어 왔다. 패거리끼리 중요 사항을 논의하고 결정하며, 패거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그 문제에 참여하고자 하면 철저하게 배척된다. 내부 집단 간 결속을 강화하고, 외부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것이다.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
'가족에 대한 헌신'이 지나치게 요구된다면 개개인의 삶을 끊임없는 희생 속에 가두는 것일 수 있다. 지나친 교육열, 교육을 중시하는 집단은 중간층이다.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경제적 자본의 상속과 문화적 자본의 투자인데,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은 문화적 자본에 투자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른 가족들을 경쟁 상대, 심지어 적으로 대하는 태도이다. 진로 선택은 타인이 보기에 좋아 보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전업 주부인 여성의 경우에는 '나'의 존재 가치로 여겨진다. 자녀가 어떤 대학에 다니고, 남편이 어떤 직장을 다니느냐에 따라 평가된다. 자녀의 성공이 곧 가족의 성공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자녀를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주체로 보기보다, 소유물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다. 가족동반 자살이 그러한 현상이다.
정상가족의 개념의 변화 필요하다. 개념 희미해지고,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탄생하는 이유이다. 남녀 성에 따른 역할 구분 현실적이지 못하다. 맞벌이 가정의 비율 증가에 비해 남성의 집안일 비중은 여성에 비해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결혼에 대한 인식 여성에겐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으로 작용하는 추세이다. 혼인이 부부 두 사람을 넘어서는 관계로 확장되는 것에 대해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낀다. 혼인의 의미와 성격 변화는 혼인의 지속성 전보다 약해졌다. 양육의 어려움은 정상가족이 무너진 이유이다. 개인의 생존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조건에서 누군가를 절대적으로 양육한다는 것 자체가 많은 책임과 의무가 필요한 일이다. 아이만 출산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을 어떻게 잘 키우고, 양육해야 할지, 교육적 측면이나 사회적 분위기, 환경 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 현실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법적. 제도적 장치는 정상가족을 기준으로 마련되어 있어서 실상을 반영하지 못한다. 법적, 경제적으로 상호 구조 등 많은 문제들이 정상가족을 기준으로 제도가 구축되어 있다. 정상가족 이외에 제도권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차별받기도 한다. 프랑스는 '시민연대계약'제도가 있다. 결혼을 안 해도 동거 커플을 새로운 가족 형태로 인정되는 법률혼 관계의 부부와 동일한 세제와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제도시행 후 출산율 증가했다고 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친밀감'을 가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하고, 그 형식에 대해 열려 있는 사고를 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에 대한 상상과 더 많은 생각 필요하다. 가부장적 가족, 정상가족이 지닌 문제점이 붉어지도록 방치하지 말고, 삶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친밀감과 협력에 기초한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제도적, 인식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3장은 완전한 행복을 위한 젠더 해방을 말하고 있다.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치관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바람직한 것, 좋은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급격한 경제 성장-개인의 가치관은 사회 변동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세대별로 경험한 사회 모습이 다르며, 사회 관습과 구조에 따라 성별 간의 갈등이 깊어져 다양한 사회문제 야기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조건이 달리 보이며, 차별의 요소가 있다. 젠더갈등은 세대 간, 남녀 간의 극심한 인식 격차를 가진다. 남성과 여성 간의 차별 무는 1~2년 단기적 시점의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여성이 결혼이나 출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놓임.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직업일수록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누가 평등을 말할 수 있을까. 젠더라는 것은 남녀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이 세대에 따라서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사회문화적 맥락과 거시적인 측면에서 함께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남성성의 등장은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20대 남성은 가사와 양육을 남녀가 함께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남성이 가부장으로서 반드시 돈벌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군 입대 남성 차별하는 요인이라고 인식한다. 무겁고 힘든 일을 전적으로 남성에게 시키는 문화도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20대 가족관계, 학교에서 양성평등 실천, 남녀평등이 상식적인 사회적 분위기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노년층과 젊은 층은 서로 다른 젠더 인식을 지닌다. 그 격차가 상당히 크게 존재한다. 남녀 모두 배우자를 고를 때 주요 요인으로 가치관을 높은 기준으로 생각한다. 젠더에 관해 남녀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 역할과 관점이 배우자를 보는 주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형식적 평등이 아닌 '실질적 평등'으로, 헌법 제34조 제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한 권리를 가진다.'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라는, 즉 차이에 대한 존중이다. 국민의 삶을 일정 수준 이상 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것이다. 'Equality'가 아니라 'Equity'이다. 다른 것은 다르게, 형평, 모두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을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젠더를 넘어 성평등으로. 젠더 갈등을 좁히기 위해서는 '세대 간의 경험치가 다르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사회적 풍토가 필요하다.' 비교적 권위와 힘, 능력을 가진 기성세대가 가치관에 있어서 위계 관계를 성립해서는 안된다. 변화하는 세대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 상호 간의 이해와 심적 여유 필요하다. 세대 간 서로에 대한 이해와 인정이 혐오와 미움보다 앞서야 한다. 성별 간의 차이를 마치 세대 간의 차이로 인식하는 오류 범하면 안 된다. 경제 성장을 하면서 여성 차별이 더 심각해졌다. 전통적 젠더 구분, 가족, 남성성, 여성성을 넘어 각자가 편안하게 느끼는 삶의 방식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젠더와 성 정체성을 제시하는 교육, 법제적 장치 필요하다. 성평등은 모든 사람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4장은 '자기 돌봄'이 필요함을 말한다.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 기록하고 있다. 자살률은 2018년 10만 명중 26.6명이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 "남보다 뒤처지지 않은 삶을 살아야 돼" 이 말은 내 삶의 주체는 나에게 있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기준과 욕망에 삶의 조건을 두는 것이다.
한국 사회 발전은 무조건 성장 중심, 개개인의 삶의 질과 행복감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오히려 등한시했다. 물질적 팽창에 수반되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모른 척하거나 경시하여 큰 재난에 직면했다. 국가경제 및 개별 기업들의 급속한 성장이 시민들의 안전을 희생시킨 바탕 위에서 편법과 탈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안전 불감증, 관행화된 부패, 국민에게 규율과 원칙이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는 경험을 안겨주었다. '힘 있는 자가 되어 성공해야 한다'라는 생각에 언제나 불만족스럽고 불안한 삶에 자신을 위치시키도록 만들었다.
우리 사회의 단면은 똑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똑같은 지향과 똑같은 목표를 향해 사는 것처럼 보인다. 부족사회가 아님에도 엇비슷한 목표와 바람을 갖고 산다. 의대, 로스쿨, 대기업, 강남에 집 한 채 소유, 외제차, 명품백, 영끌하여 집을 사려하고, 주식 투자 하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다고 여긴다. 천편일률적인 삶이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생애 주기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고정적이다. 조금 다른 삶, 다른 선택을 원한다면 그 앞에 수많은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실패를 두려워하는가. 한국 사회 특징은 경멸과 배제의 문화이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실패할 경우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실패했구나, 이제 저 사람은 끝났네' 낙인, 배제하는 태도 존재한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고, 성공에 집착, 지나치게 선망한다. 한국 사회 실패에 대한 낙인은 일상적일 정도로 흔하다. 학벌, 출신 지역, 성별, 키, 외모, 입맛과 취향 등에서도 나타난다. 남들이 하는 방식에 따르는 것을 근거 없이 당연시한다. "나는 이렇게 불안한데, 저 사람은 그렇지 않아. 저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어야 돼, 저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어"라고 사고한다.
혐오하는 사회, 누군가를 배제하고 미워하는 이유는 '불안' 때문이다. 사회적 기준에 맞춰 살아가면서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고 자유롭지도 않다고 여긴다.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비난과 혐오의 마음으로 뒤바뀐다. 가진 자에 대한 지나친 인정,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강한 멸시가 동시 존재한다.
질투와 혐오의 문화는 '실패'를 과정이 아닌 결과로 보고, 실패한 사람은 곧 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긴다. 기회가 제동 되지 않는 세상에 억울함과 분노가 사회적 약자를 향하고 여성, 장애인, 노인 등 취약 계층이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질투와 혐오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은 집단 간의 차이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옳고 우월하다는 관점이 너무나 분명하고 고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을 더 얻기 위해 서로서로 싸우는 각자도생의 사회가 현재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다양한 삶의 가치가 등장해야 하고 관용의 문화가 필요하다. 실패의 경험, 다른 방식의 삶을 인정, 그것이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 필요하다. 생애 단계마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을 지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고민 필요하다.
- 출처: 이현정. <우리는 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 21세기북스. 2022.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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