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서의 인간, 자연에 놓인 인간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볼 때, 인간은 철저히 생물학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처럼 보인다.
리처드 도킨스라는 진화생물학자는 “진화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유전자이며, 인간은 그저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 만들어진 생존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고까지 말했다.
그의 스테디셀러 『이기적 유전자』 이후로, 인간 행동의 많은 부분이 유전적 프로그램에 의해 좌우된다는 관점이 대중에게도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내가 어떤 성격을 타고났는지, 지능이나 기질이 어떤지는 상당 부분 타고난 DNA의 설계도가 결정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다.
심지어 기호나 습관마저 유전적 영향이 있다는 연구를 기사로 본 적도 있었다. 나는 “기호를 기호로, 습관을 습관으로 형성하기 시작하는” 어린 시절에 절대적 시간을 많이 보내는 환경-즉 가족-의 영향이 크지 않나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면 내가 지금 느끼는 이 자유의지의 드라마도 실은 유전자가 연출한 각본일 뿐인 걸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뇌와 호르몬 체계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걸까?
하지만 과학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도킨스의 결정론에 반기를 든 과학자들도 있다.
같은 옥스퍼드 대학의 생리학자 데니스 노블은 인간이 유전자의 지배를 극복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우리의 뇌와 의식, ‘자유의지’는 유전자라는 틀에 갇혀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거스르거나 바꿀 힘까지도 지닌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현대 생물학은 예전처럼 유전자가 운명을 100% 결정한다고 보지 않는다.
후천적 경험이나 선택에 따라 유전자의 발현이 바뀌기도 한다는 후성유전학(Epigenetics)의 발견은, 삶의 과정에서 DNA조차 변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내 삶의 주체가 유전자가 아닌 나 자신이라는 노블의 견해는 여러 생물학적 증거들로 뒷받침되고 있다.
노블은 나아가 우리는 단순한 유전자 기계가 아니라 여러 선택지 중에서 고유한 선택을 내리는 존재라 주장하며, 게임이론을 빗대어, 인간은 기본적으로 여러 가능 행동 중 하나를 그때그때 선택하며 살아가는 “혼합 전략” 의 존재라고 설명한다.
결정론적으로 딱 정해진 경로를 따라가는 로봇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때로는 이쪽을, 때로는 저쪽을 택하는 융통성과 불확정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실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많은 결정적 순간에 ‘다른 길도 있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꼭두각시처럼 끌려온 인생이 아니라, 작든 크든 내가 선택해 온 갈림길로 현재의 내가 형성된 느낌 말이다.
이렇듯 유전자나 환경이라는 운명적 조건이 분명 존재하면서도, 우리는 그 안에서 움직일 여지를 갖고 있다.
데니스 노블에 따르면 이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이기적 유전자 복제기의 전횡에 항거할 능력을 가진 유일한 존재로 보인다.
우리만이 자기 운명의 운전대를 어느 정도는 잡을 수 있는 특이한 존재인 것이다.
타고난 운명이 거대한 고속도로라면, 그 위에서 어느 지점에서 빠져나와 어떤 이정표를 따라 어느 갈래길로 갈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즉 누구나 부모를, 태어난 시대를, 타고난 신체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 이후 삶의 국면에서 어느 길로 틀지는 우리 나름인 것이다.
철학 역시 일찍이 이런 논쟁과 함께했다.
칸트는 자연세계가 엄격한 인과법칙에 지배되더라도, 인간은 도덕법칙을 따를 자유를 가진 특수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자율적 이성을 통해 스스로 법을 세우고 따를 때 비로소 도덕적 존엄을 얻는다고 역설했다.
이번 브런치북의 1편에서 언급한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을 던지며,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한 면을 짚어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누구도 자신의 탄생을 선택하지 않았고, 주어진 환경과 배경 속에 던져진 채 삶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굴레만 씌워진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사물과 인간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의자나 돌멩이는 이미 완성된 채로 그 자리에 있을 뿐이지만, 인간은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가능성으로서 세계에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던져진 운명을 안고 태어나지만, 동시에 그 운명 속에서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열려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점이 내가 앞서 이야기한 고속도로와 갈래길 은유와도 맞닿아 있다.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의 구조를 분석했다면, 칼 융(Carl Jung)은 자기(self)와 개성화과정을 통한 인간의 통합을 강조했다.
인간은 자기(Self) 실현을 통해 무의식과 의식의 전체성을 완성한다는 주장인데, “인간의 운명은 일부 정해져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느냐는 개인의 몫”이라며 삶에서 무의식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즉, 개인이 자신의 무의식을 의식화함으로써 운명처럼 보이는 외부의 사건들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어쩌면 인간이란, 주어진 조건들 위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가능성의 탑을 지탱하며 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유전자와 환경이라는 고속도로 위에 던져졌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나’를 만들어가려 애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 삶의 본질이자, 재미라고 난 생각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건 과연 어떤 상태일까?
누군가가 짜놓은 인생의 설계도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인간,
그 가능성과 어려움, 그리고 그 길 위의 불안함까지 정면으로 마주하며 사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다음 편에서는, 하이데거가 말한 ‘본래적 자기 자신’, 그리고 내가 다시 배우게 된 자율성과 건강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