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납득의 모순

자유의지인가 거대한 결정론의 톱니바퀴인가

by 그루미루

고등학생이 될 무렵부터는 무슨 일이든 내가 납득이 되어야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합리화의 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항상 스스로 이유를 찾고야 마는 피곤한 성격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도

단순히 “해야 하니까”로는 부족하다.


운동을 해야 건강을 지키고, 건강해야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일일이 이유와 의미를 부여해야 비로소 몸을 일으킨다.


스스로도 가끔은 이런 성향이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세상엔 아무 생각 없이도 척척 해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리도 스스로를 설득해야만 움직일 수 있을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모순적 성향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적어도 내가 하는 행동의 주체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억지로 마지못해 떠밀리듯 하는 대신,

한 번 하더라도 납득하고 뜻을 품고서 하려는 태도는 어쩌면 진정한 자율성의 표현일 수 있다.


철학자 칸트는 도덕적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부과한 법률에 따르는 것이 바로 자유로운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해, 타인이 준 규칙이 아니라 내가 내린 원칙에 따라 행동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롭다는 뜻이다.


내가 이치에 맞아 받아들인 이유로 움직일 때,

그것이 설령 남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일상일지라도 내겐 하나의 의미 있는 선택이 된다.


그러니 “납득이 되어야 움직인다”는 나의 모순은

실은 "내 삶의 법칙은 내가 세운다”는 고집스러운 자유의지의 다른 말인지 모른다.


더욱이 이러한 성향은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예시라고 생각한다.

기계나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면 주어진 입력에 따라 정해진 출력이 즉각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하기 싫어도 하라면 한다”는 공식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누가 시킨 일에 오히려 반항심이 드는 우리의 마음,

내키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우리만의 고집은,

인간이 단순한 입력-처리-출력 기계와 다르다는 증거다.


앞서 2편에서 말한 것처럼 외부에서 동기를 주입할 수 없다는 지적이 그 방증이다.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 동기부여되지 않는다

결국 움직이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동기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자유의지를 중시한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이 점을 강조해 왔다.


우리가 스스로 이유를 느낄 때에만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불편한 진실이지만 또한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특징이다.


만약 누구든 버튼만 누르면 원하는 행동을 끌어낼 수 있는 존재라면,

인간에게 도덕적 책임이나 존엄성 같은 개념도 없었을지 모른다.


내 마음이 움직여야 행동한다는 나의 개인적 모순은,

역설적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고유한 속성인 셈이다.

그리고 나는 그 속성을 스스로 유난히 강하게 느끼는 사람일 뿐이다.


물론, 이렇게 내적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행동하는 태도에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따른다.

세상은 늘 내게 이해할만한 이유를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고,

때로는 의무책임을 그냥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모든 일을 내 취향대로 고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 속에서 나고 자라며 나도 모르게 스며든 사회적 도덕을

'스스로 부과한 법률'로 생각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 '마음이 따르는 일'로 느껴왔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고민한다.

과연 어디까지가 내 자유이고, 어디부터가 내가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흐름일까?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더 큰 맥락의 논쟁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즉,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우리도 거대한 결정론의 톱니바퀴에 불과한가 하는 문제다.


**다음 글에서는 이에 대해 작성될 예정입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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