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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약을 진작에 먹었더라면!

우울증 약과 ADHD약을 복용해본 후기

by 해닌

인생, 한국산으로 계산하여 34년차.

살아온 만큼 나름의 루틴과 나 훈련법을 갖추고 그럭저럭 적응해왔다고 자부해온 순간들이 있다. 스스로의 약점도, 강점도 대충은 알 법한 나이니까. 그 과정에서 '내가 혹시?'하는 순간들은 종종 있었지만 제발로 정신과를 찾아가 약을 주세요 하는데에는 꽤 용기가 필요했다. 인터넷 자가진단이란게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도 있고, 그래도 여태 직업을 가지거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그러나! 약을 먹어보니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하드모드였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이 글을 남기게 되었다. 이 글이 흘러 흘러 나와 비슷한 케이스의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선 우울증 약. 내가 먹는 약의 이름은 '렉사프로정' < 안 외워놔서 나중에 확인하고 편집할 예정

가장 대표적으로 많이 먹는 약이며, 부작용이 적어 처음 약을 먹는 사람에게 많이 권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도 나는 어지간한 약물에 모두 반응이 좋고 부작용은 없는 편이라 딱히 두려움 없이 먹었던 것 같다. 워낙에 저용량으로 시작하기도 했고...


먹고 나서 기록한 메모를 덧붙여 보겠다.


복용첫날 :

씻는데 오랜만에 개운하다고 느낌. 우울감이 줄어들고 평화로운 마음이 생김.


둘째날 :

멍한 느낌이 있는데 속도 같이 조용해짐.

싫은 일이 생겨도 거기서 확장되서 늪으로 빠지는게 아니고 아 싫다. 하고 끝남.

일상적인 활동을 할 때 힘들다는 기분이 들지 않음

타인에 대한 불안(경계심)이 눈에 띄게 낮아짐.

식욕이 돌아옴

몸이 늘 몸살걸린 것처럼 무거웠는데 가벼워짐


셋째날 :

취미활동을 했을때 재미있다는 느낌이 생생하게 듬

약간 어지럼증은 느껴짐


기록은 여기까지였다. 그뒤로는 일상처럼 느껴져서 추가적인 기록을 하지 않았던 듯하다.


고작 5mg의 약을 하루에 한 번 먹은 것 만으로도 이렇게까지 삶이 달라진다는게 충격적이었다. 물론 나는 약빨이 너무 잘 받는 편이라 상비약도 복용량의 절반씩만 먹는 사람이라는 건 감안해야겠지만... 나는 심지어, 검사지에서 불안에 대해 묻는 항목에 '불안이 뭔가요?'하고 멍청하게 되묻기까지 했던 사람이란게 웃기다. 평생 그러고 살아서 불안이 뭔지도 몰랐다. 기본값이 늘 그렇게 전전긍긍 불편한건 줄로만 알았지...


첨언하자면, 우울증 약을 먹었을 때는 뇌가 멍해지면서 2차적인 부정적인 생각의 고리를 끊고 배쪽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스트레스성 위장장애가 있었는데 약 먹으니까 같이 좋아지는 게 신기했다. 직장 스트레스로 복용량을 늘리자 대사 작용 자체가 둔해지는 느낌이 들어 위장장애용 약을 추가로 받기도 했다. 지금은 필요할 때만 먹는다.


이것만으로도 '진작에 약 좀 먹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에 정신과에 가지고 있던 편견(아주 심한 상태인 사람만 가야 하는거 아닌가? 나 정도는 꾀병 아닌가?)과 약값.. 매달 나가면 비싸지 않을까... 하는 걱정 등이 정신과에 대한 장벽이었는데 정말 허튼 생각이었다. 판단은 의사가 하는게 맞다! 그리고 약값 별로 안비싸다! 그냥 감기약과 비슷하거나 좀더 비싼 정도? 그런데 감기약은 보통 길어봐야 1주일치 약을 받는데 정신과는 4주치 약을 받아오니 체감상 그렇게 느껴질 뿐 실제로는 비싼 가격이 아닌 셈이다.


그리고 대망의 ADHD.

이건 좀 웃긴 일화가 있는데, 사실 원래도 스스로 ADHD 의심을 하긴 했었다. A 일을 하다가 갑자기 B 일을 하고, C 일로 넘어가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영상자료에 집중력이 심각하게 떨어지고, 말을 끊는 버릇이 있는데다가.. 무엇보다 평생 지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나오는 지표들의 일부는 들어맞고, 일부는 내 얘긴가? 싶은 정도니 긴가민가만 하고 있었는데..


우울증 약을 처방해주시는 의사선생님께 ADHD 얘기를 꺼내니, 사실 자신도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고(!) 폭탄발언을 하신 것. 아니, 한달에 한 번 10분 대화를 나눌까 말까인데 어떻게?! 하고 매우 놀랐는데... 간단했다. 다른 ADHD 환자들과 비슷한 행동을 했다는 것. 예를 들자면, 우리 '아맞다' 동지들은... 진료실에 일단 들어와서 뒤늦게 노크를 하고는 한다는 것이다. 일단 들어는 왔지만,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는 한거다.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체계적인 행동이 안 될뿐...


자가진단 테스트지를 작성하고, 결과를 보고 신경인지검사를 받기로 했다. 개인적으로는 뇌파검사가 재밌어 보여서 그쪽을 하고 싶었지만 굳이 필요없을 것 같다는 말에 다음을 기약하기로...(포기는 안함)

검사실에 들어가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해 검사하는데, 보통 이런 방식이다. 뭔가를 보여줄 건데, 내가 보여준 게 맞으면 스페이스바를 누르고 아니면 누르지 마시오. 이런 테스트를 일고여덟개 정도 하는 듯하다.


나는 검사실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지능검사 같은데 의사샘이 나를 속인게 아닐까? 내가 멍청이라는 사실을 돈내고 인증받아야 한단 말인가? 하는 배신감과 분노에 몸을 비비 꼬며 고통받는 시간을 보냈다. 검사시간은 무려 29분 정도가 걸렸는데 그와중에 왁싱샵 예약해놓은걸 까먹어서 전화받느라 멀티안되는 고통에 시달리고... 도형 기억 검사에서는 할리갈리할 때 마냥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태로 멍때리며 앉아있고... 지루해서 엎드렸다가 다른거 읽었다가 하며 힘겹게 검사를 끝냈다.


지금 써보고 나니 모든 것이 ADHD를 말해주는 것만 같군. 하여튼 나는 선생님이 나를 속인게 틀림없다는 분노에 차서 다음날 결과를 보러 오라는 말을 회피할 뻔 했다. 이미 약 10년간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친구가 곱게곱게 잘 달래서 힘겹게 가기는 했다만.. 진료실 들어가자마자 '제가 바보라던가요?' 하고 물어봤는데, 사실 일부는 바보가 맞긴했다.


시각인지 어쩌고.. 하여튼 작업 기억 영역에서 무려 하위 1퍼센트를 기록한 것이다. 하하하하하하하 하지만 이건 예견된 결과였다. 나는... 내가 작업 기억이 심각하다는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왜냐면 나는 누군가 자기 전화번호를 불러주면 그것을 한번에 받아적기가 힘들었으며, 1초 전의 기억도 항상 새하얗게 지워지곤 했다. 내 차번호 4자리도 한참을 외우지 못해서 사진찍고 다니다가 몇달이 걸려서야 겨우 외웠던 기억이 있다. 옛날로 돌아가자면.. 구구단을 초등학교 4학년쯤에야 겨우 외웠던 일화도 있다. 이 머리통을 힘겹게 이고 지고서 공시도 통과하고 임용고시도 통과한 나... 너무... 너무 기특하지 않나! 더불어 사람의 표정과 감정을 연관짓는 능력도 심각한 하위권이었다는데, 거... 사회성도 이만큼 끌어올려놨으면 됐지. 라고 생각해 본다.


결론. 높은 확률로 ADHD인 것 같다! 약을 먹어보자 해서 받아온게 바로 어제의 일이다. 의사선생님은 내 얘기를 들으며 내심 어떤 약을 처방해야지 까지 미리 생각해놨다는데... 이게 아침에 먹어야 뾰롱 하고 효과 좋은 약이라 내가 아침에 약을 먹을 순 있을까요? 걱정하는 모습에 속상해하며 (그럼에도 설득하여) 약을 처방해주셨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우울증 약처럼 잘 들을까? 하며 전날 밤 일찍 잠들었다.


약 이름은 '메디키넷'. 설명에 따르는 유명한 콘서타에 비하면 약 성분이 종일 가진 않지만, 정신이 깨는 효과는 조금 더 좋다고. 더 센것도 있지만 약효가 너무 잘 받는 체질이므로 중간정도의 효과를 가진 약을 처방해보신다 했다. 만약 먹고 효과가 없다치면 선생님이 나에게 사기를 쳤어... 하지말고 그냥 한 알 더 먹어보라고. 사기꾼 취급 당한 것이 내심 억울하셨나본데....


아침에 자리끼물과 함께 대충 먹어본 약의 효과는.. 굉장했다!(포켓몬 브금을 떠올리며 읽어주시길)

내 뇌는.. 정신머리는 항상 안개낀 호수같았다. 거기서 무언가 기억을 떠올리려해도 희미하게 단어가 둥둥 떠오르면 그거 주워서 이거 맞나? 하며 확신없이 중얼거리는게 고작이었다. 이미지나 도형류는 아예 못 떠올리는 수준. 정면샷은 부모님 얼굴도 못 떠올리고 측면으로만 얼핏 기억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약을 먹자마자... 그 안개가 싸악 걷혔다. 맑은 물의 호수와 평화로운 풍경이 비쳤다. 아름다웠다.


더욱 아름다운 건, 바로 지각을 면했다. 아침에 나의 뇌는 희미하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맑은 뇌로 떠올려보면 그건 한 5순위 정도의 목표였다. 왜냐면 출근하기가 너무 싫으니까! 막 잠에서 깬 뇌는 졸리다. 침대는 푹신하다. 고양이는 보들하다. 전기매트 따뜻하다. 정도의 생각에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이 뒤로 밀리고.. 에잉 졸려 하고 뇌 스위치를 꺼버리곤 했다. 그래서 아침에 잘 일어나는 사람이 너무나 신기했는데. 그냥 명료하게 아 일어나야 하는군. 하며 일어나졌다. 세상에 이게 정상인의 뇌라니! 남들은 이렇게 살아왔다니!


평생... 어찌저찌 살아는 왔지만 나는 왜 이걸 못할까. 저게 안될까 하며 스스로 자책하고 스트레스받으며 살아왔다. 정말 중요한 날에는 극도의 긴장상태로 잠들어서 가까스로 지각을 면하며 살아온 정도. 매일의 루틴인 출근은 정말 힘든 과제였다. 그러니까 은은한 ADHD였던 나는.. 평생을 하드모드로 살아왔던 거다.


너무... 속상하고 원통하다. 카페인에도 민감해서 커피도 못먹고 매일 멍하니 졸면서.. 이악물고 억지로 공부하면서 원래 공부는 힘든거구나 생각해왔다. 심지어 집중을 하기 위해 정신을 분산시켜야 해서 모바일 게임을 하며 학원 수업을 들은 적도 있었다. 머리가 항상 멍해서 나는 원래 멍청한가보다... 하고 살았다. 모두의 뇌가 이런 줄 알았으니깐. 매일 지각하는 건 게으른 탓인 줄 알았다. 다들 그렇게 비난해왔으니까.


EBS 수학 문제집을 주문했다. 평생 수학 못푸는 뇌인 것을 억울해 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풀 수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게 기분 탓인지 아닌지는 내일 강의 들어보면 알겠지.


만약 나처럼 과잉행동은 없긴 한데, 뭔가 뇌속에서 과잉 생각이 많은 분이 계시다면...

그럭저럭 직장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시간맞춰서 딱딱 해야 하는 업무에서 유독 고생하고 계시다면,

다른 사람의 말에 집중하기 어렵고 자꾸만 끊는 버릇이 있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정신과 문을 두드려보길 바란다.

비록 들어가고 나서 노크하는 일이 생길지라도, 우리는 분명히 노크했다.

우리의 최선은, 지금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


모두의 일상에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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