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자판기
사고가 나기 전까지 나는 다리가 그저 달리고, 차고, 버티고, 도망치는 데 쓰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 다리를 내놓고서라도 내 다리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날 이후로 내게 다리는 전과 같은 것이 아니게 되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걷는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걸 배우기 시작했다.
원래 걷는 건 그냥 되는 일이었다. 일어나면 걷고, 뛰고 싶으면 뛰고, 버스 놓칠 것 같으면 미친놈처럼 달리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다리 하나를 침대 밑으로 내리는 것조차 작전이었고, 허리를 세우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났다.
재활실은 들어가는 순간부터 숨이 막혔다. 소독약 냄새 위에 사람 땀 냄새가 얇게 덮여 있었고, 오래된 매트에서는 고무 냄새가 올라왔다. 금속 봉은 차갑고, 침대 시트는 바삭했고, 환풍기는 돌아가는데도 공기는 한 번도 시원한 적이 없었다. 어딘가에선 누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키고 있었고, 어딘가에선 치료사가 “하나, 둘, 셋” 하고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 모든 소리가 벽에 달라붙어 오래 남는 것 같았다.
“자, 조금만 더 해보자.”
물리치료사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잔인하게 들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꼭 남들은 다 쉽게 하는 일을 나만 못하는 것 같을 때 들리는 말이 그런 말이었다.
왼쪽 다리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는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 하는데도 허벅지며 골반이며 갈비뼈까지 온몸이 다 같이 비명을 질렀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그대로 멈췄다. 움직이면 아프고, 안 움직이면 더 무서웠다.
“그래, 잘하고 있어. 한 번만 더.”
잘하고 있긴 개뿔.
나는 속으로 욕을 했다. 유도를 6년이나 한 놈이, 학교에서 애들이랑 몸싸움 좀 한다고 으스대던 놈이, 지금은 침대에 걸터앉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시뻘게져 식은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잘하고 있다는 말은 위로라기보다 모욕처럼 느껴졌다.
내 몸에서 나는 땀 냄새조차 싫었다. 병원 냄새와 섞이니까 더 싫었다. 내 몸이 어느새 내 몸이 아니라 환자 몸이 된 것 같아서. 환자복에서 나는 세제 냄새도 싫었고, 간호사가 갈아준 시트에서 나는 마른 천 냄새도 싫었다. 세상은 다 멀쩡하게 돌아가는데 나만 병원 냄새에 절여져 있는 기분이었다.
재활 비슷한 걸 끝내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나는 거의 젖은 빨래 같았다. 몸에서 힘이 다 빠진 채 침대에 기대 누웠다. 다리가 아픈 건 둘째치고, 몸이 내 말을 안 듣는다는 사실이 제일 짜증났다. 예전엔 내가 몸을 쓰는 사람이었지 몸한테 끌려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제는 팔 하나 뻗는 것도, 허리 조금 움직이는 것도 전부 눈치를 봐야 했다.
게다가 내가 누워 있는 곳은 1인실 같은 데가 아니었다. IMF다 뭐다 해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우리 집에서 그런 방을 쓸 리가 없었다. 나는 커튼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환자들이랑 숨소리와 기침 소리와 면회객들 목소리까지 다 나눠 써야 하는 다인실에 누워 있었다. 옆자리 아저씨는 신문을 넘길 때마다 꼭 침을 손가락에 묻혀 종이를 넘겼고, 맞은편 할머니는 잠들 때마다 아주 작게 끙끙 소리를 냈다. 새벽에는 누가 코를 골았고, 낮에는 누가 보호자랑 작은 소리로 돈 얘기를 했다. 병원은 쉬는 곳이 아니라, 아픈 사람들이 각자 버티는 곳 같았다.
부모님도 늘 옆에 있어 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학교를 오래 비울 수 없었고, 엄마도 집이랑 병원이랑 동생 챙기는 일을 오가느라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병실이 조용해질 때면, 나는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으로 침대에 누워 천장만 보는 시간이 많았다. 물 한 컵 마시고 싶은데 손이 잘 안 닿을 때도 있었고, 자세를 조금 바꾸고 싶은데 그 조금이 마음대로 안 돼서 한참을 참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갑자기 사람에서 짐짝 비슷한 걸로 변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나는 약기운 때문인지 몸이 너무 피곤해서인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는데, 엄마는 내가 잠든 줄 아셨던 모양이다. 병실 불은 다 꺼지고 복도 쪽 불빛만 커튼 아래로 희미하게 스며들어 오고 있었는데, 엄마가 병실 문 쪽으로 조금 나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아빠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 강현이는… 당분간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처음엔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엄마 목소리가 너무 작았고, 중간중간 복도에서 카트 끄는 소리가 섞여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뒤에 엄마가 다시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병원비도 그렇고, 지금은 피아노 레슨비까지 낼 여유가 없어요… 정현이 퇴원할 때까지만이라도.”
피아노.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강현이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거의 5년 동안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동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한 번은 엄마한테 강현이는 손가락 끝에 감각이 남다르다고, 이런 애는 그냥 취미로만 치게 두기 아깝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도 있었다. 나는 그때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건 칭찬이 꽤 큰 쪽에 속했던 것 같다. 강현이는 방과 후에 집에 오면 가방도 던져놓기 전에 학원부터 갔고, 집에 돌아오면 체르니인지 바이엘인지 하는 걸 띵똥거리며 쳤다.
엄마는 계속 작게 말했다.
“강현이도 알면 서운해하겠죠… 근데 지금은 어쩔 수가 없어요. 저 애도 재능 있는 거 아는데… 지금은 정현이 옆에 사람도 있어야 하고…”
그 뒤로는 아버지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안 들렸다. 엄마도 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자는 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깨어 있는 걸 알면 엄마가 더 미안해할 것 같아서.
그런데 이상하게 잠은 더 안 왔다.
병원비가 얼마나 나오는지, 우리 집 형편이 정확히 어떤지, IMF라는 게 정확히 얼마나 무서운 건지 나는 다 모르면서도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내가 누워 있는 이 병실이 그냥 병실만은 아니라는 것. 누군가는 밤에 잠든 줄 아는 아들 머리맡에서 작은 목소리로 뭘 포기해야 하는지 계산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계산 속에, 강현이의 피아노도 들어 있다는 것.
엄마는 간호사 선생님이 부르셔서 잠깐 밖에 나가셨다. 병실 안에는 나 혼자였다. 창밖으로는 봄 햇빛이 멀쩡하게 들어오고 있었는데, 나는 그 햇빛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학교는 지금쯤 6교시쯤 하고 있을까 싶었다. 교실 창문은 열려 있을까, 정후 저 새끼는 수업시간에 또 졸고 있을까, 충근이는 점심시간 전에 내 자리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곧 숨이 막혔다. 학교는 저렇게 멀쩡히 돌아가는데 나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아서.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강현이 얼굴을 쏙 내밀었다.
“형.”
“왜.”
학교를 마치고 곧장 온 얼굴로, 강현은 대답 대신 씩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 눈이 먼저 간 건 녀석 손에 들린 종이컵이었다. 종이컵 위로 하얀 김이 아주 조금 올라오고 있었다.
“뭐냐 그거.”
“율무차.”
“야.”
나는 컵을 보고 강현 얼굴을 봤다.
“네가 돈이 어딨어서.”
강현은 괜히 더 으쓱한 얼굴로 종이컵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일단 먹어봐. 뜨거워.”
나는 컵을 받아 들었다. 종이컵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손바닥에 온기가 닿자 기분이 묘했다. 병원 냄새, 재활실 냄새, 식은땀 냄새가 다 몸에 달라붙어 있는데 율무차 김만은 좀 달랐다. 달고, 고소하고, 어쩐지 사람 손이 닿은 것 같은 냄새였다.
“그러니까 이게 어디서 났냐고.”
강현은 의자를 끌어다가 내 침대 옆에 앉더니 몸을 앞으로 바짝 숙였다. 꼭 비밀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형, 나 신기한 거 발견했어.”
“뭔데.”
“자판기.”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멍하니 녀석을 봤다.
“넌 자판기가 신기하냐?”
강현은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아까 나 혼자 병원 복도 끝에 갔거든? 계단 옆에 자판기 있잖아.”
“응.”
“근데 자판기 밑에 50원짜리 하나가 떨어져 있었어.”
“누가 흘렸나 보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주웠어. 근데 율무차가 100원이더라.”
“그럼 못 사는거 아냐?”
“어. 그래서 그냥 한번 넣어봤어.”
“야, 100원짜리 자판기에 50원 넣어서 뭐하게.”
“나도 알아. 안 되면 다시 빼면 되잖아.”
강현은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50원을 넣고, 안 되니까 반환 레버를 돌렸어. 근데 동전이 바로 안 나오더라.”
“고장 났나 보지.”
“그래서 한 번 더 살짝 돌렸거든?”
“응.”
“그랬더니 100원이 나온 거야.”
나는 컵을 든 채 녀석을 빤히 봤다.
“뭐?”
“진짜라니까?”
“구라치지 마.”
“그래서 첨엔 나도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지.”
강현은 여기서 목소리를 더 낮췄다.
“그래서 바로 율무차 안 뽑고 매점 갔어.”
“왜.”
“확인하려고.”
이 대목에서 나는 조금 웃음이 났다. 초등학생이 제딴에는 검증을 하겠다고 매점까지 갔다는 게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그래서 100원으로 풍선껌 샀어. 50원짜리.”
“입에서 껌 냄새 나는 이유가 그거냐?”
“어.”
“그리고?”
“거스름돈으로 50원 받았지. 그걸 들고 다시 자판기 갔어. 이번에도 아까처럼 넣고, 레버 돌리고, 안 나오길래 다시 살짝 돌렸거든?”
“응.”
“또 100원이 나왔어.”
"..."
병실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아니, 어쩌면 내 머릿속이 잠깐 조용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강현은 흥분해서 계속 말했다.
“그래서 이번엔 그 100원을 또 매점에 가서 50원 두 개로 바꿨어.”
“왜 굳이?”
“하나는 율무차 뽑으려고, 하나는 형 보여주려고.”
나는 그제야 녀석 손에 아직 50원 하나가 남아 있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래서 그 남은 50원으로 다시 100원 만들어서 율무차 뽑아 온 거야?”
“어.”
강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 주려고.”
나는 종이컵을 바라봤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자기 다리를 가져가 달라고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천장만 보고 있었는데, 오늘은 초등학교 5학년짜리 동생이 병원 자판기에서 기적 같은 걸 캐 와서 내 손에 율무차를 쥐여주고 있었다.
세상은 슬프려고만 하면 끝도 없이 슬펐고, 또 우습게 보려고 하면 쓸데없는 데서 자꾸 웃긴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컵 가장자리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셨다. 달큰하고 고소한 맛이 났다. 뜨거운 게 목을 타고 내려가자 몸이 아주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때?”
“뜨끈한 맛이 난다.”
“그게 뭔 소리야.”
“맛없다는 뜻은 아님.”
강현이 피식 웃더니 주머니에서 50원짜리 하나를 꺼내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형도 해볼래?”
나는 그 동전을 내려다봤다. 딱히 신기할 것도 없는 납작한 동전이었다. 예전 같으면 문방구에서 풍선껌 하나 값이었고, 지금은 초등학교 5학년짜리 동생이 발견한 기적의 증거가 되어 있었다.
“야, 그게 되겠냐.”
“근데 두 번이나 됐잖아.”
“우연일 수도 있지.”
“그럼 형이 직접 보면 되지.”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안 믿겼다. 자판기가 어떻게 50원을 100원으로 바꿔주겠는가.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내 몸은 지금 내 말을 하나도 안 듣고 있는데 자판기 하나쯤 이상한 짓을 한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더 이상한가 싶기도 했다.
강현이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있어봐.”
“어딜 가.”
“휠체어.”
“야, 됐다.”
“형 눈으로 봐야 믿을 거 아냐.”
나는 됐다고 한 번 더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솔직히 조금은 보고 싶었다. 병원 복도 끝에 서 있는 자판기 하나가 진짜로 이상한 놈인지 아닌지.
강현은 금방 휠체어를 끌고 왔다. 병실 바닥에 바퀴가 긁히는 소리가 괜히 크게 들렸다. 나는 휠체어를 보는 순간부터 기분이 나빠졌다. 차라리 아픈 게 낫지, 남이 미는 의자에 몸을 맡기는 기분은 또 다른 종류로 싫었다. 내가 환자라는 걸 내 몸보다 먼저 휠체어가 증명해주는 것 같아서.
“형, 일어날 수 있겠어?”
“말을 말든가.”
나는 침대 난간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세우는 순간 갈비뼈가 먼저 욱신했고, 오른쪽 다리를 잘못 건드릴까 봐 식은땀이 났다. 몸을 반쯤 돌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졌다.
“천천히 해.”
“시끄러.”
강현이 얼른 내 팔꿈치 쪽을 받쳤다. 그게 짜증나면서도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더 짜증났다. 나는 이를 악물고 왼쪽 다리에 힘을 주고, 오른쪽은 최대한 허공에 뜬 것처럼 조심하면서 몸을 옮겼다. 휠체어에 엉덩이가 닿는 순간까지도 한참이 걸린 것 같았다.
겨우 앉고 나니 숨이 찼다. 고작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겨왔을 뿐인데, 누가 내 몸 안의 힘을 죄다 퍼간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고, 환자복이 등에 달라붙었다.
강현이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괜찮아?”
“안 괜찮으니까 병원에 있지.”
“그 와중에도 말은 잘하는거 보니 입은 확실히 안 다쳤네.”
“닥쳐.”
강현은 픽 웃더니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다.
“야.”
“왜.”
“멀면 그냥 돌아온다.”
“안 멀어. 진짜 조금만 가면 돼.”
병실 밖으로 나오자 복도 소음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소독약 냄새, 바퀴 구르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 어디선가 보호자가 낮게 말다투는 소리까지 다 섞여 있었다. 휠체어 바퀴가 바닥 줄눈을 지날 때마다 자잘한 진동이 엉덩이와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자판기는 고작 복도 끝 계단 옆에 서 있었는데, 나한테는 꼭 운동장 건너편처럼 멀어 보였다.
나는 두 번쯤 그냥 돌아가자고 말할까 고민했다. 고작 자판기 하나 보겠다고 이 난리를 치는 내가 우습기도 했다. 그런데 강현은 진지했다. 꼭 엄청난 비밀을 보여주러 가는 사람처럼 앞만 보고 휠체어를 밀었다.
“거의 다 왔어.”
“너 아까부터 계속 거의 다 왔다고 하거든?”
“이번엔 진짜야.”
정말로 몇 걸음쯤 더 가자 복도 끝 계단 옆에 자판기가 보였다. 누렇게 바랜 음료 그림들 사이에 율무차 버튼이 있었고, 그 아래엔 1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자판기를 올려다보다가 괜히 숨을 한 번 골랐다. 고작 여기까지 오는 데도 이렇게 힘든데, 병원 생활이라는 게 앞으로 얼마나 더 길지 순간 아득해졌다.
강현이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형, 이거.”
녀석이 50원짜리 하나를 내 손에 쥐여줬다.
“넣고, 레버 한 번 돌리고. 안 나오면 조금 있다가 다시 한 번.”
“네가 아까 한 대로?”
“응.”
나는 손에 든 50원을 내려다봤다. 자판기를 보니 갑자기 우스웠다. 학교에 있었으면 절대 안 했을 짓을 지금 나는 병원 복도에서 아주 진지한 얼굴로 하려 하고 있었다.
“넣는다.”
“응.”
동전을 넣었다.
달칵.
반환 레버를 한 번 돌렸다.
아무 소리도 안 났다.
강현이 숨을 죽였다.
“한 번 더.”
나는 조금 기다렸다가 레버를 다시 살짝 돌렸다.
달그락.
우리는 동시에 아래 동전 반환구를 내려다봤다.
거기엔 진짜 100원짜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 동전을 집어 들었다. 분명 내가 넣은 건 50원이었는데, 손바닥 위에 놓인 건 100원이었다. 동전은 평범했다. 다른 100원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손안에 올려놓고 보니 이상하게 조금 뜨거운 것 같았다.
“뭐야…”
그 말밖엔 안 나왔다.
강현은 거의 제자리에서 뛸 듯이 기뻐했다.
“봐봐! 내가 거짓말 안 했지?”
나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 100원을 만지작거렸다. 병원 냄새도, 재활실 고무 냄새도, 소독약 냄새도 그 순간만큼은 아주 잠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세상이 전부 내 뜻대로 안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병원 복도 구석에 선 낡은 자판기 하나만큼은 이상하게 내 편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100원을 강현 손에 쥐여줬다.
“야, 이거 매점 가서 50원 두 개로 바꿔와.”
“왜?”
“한 번 더 해보게.”
강현은 피식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복도 끝 매점 쪽으로 냅다 뛰어갔다. 나는 자판기 앞에 앉은 채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조금만 움직여도 등이 젖을 만큼 아팠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몸보다 자판기 쪽이 더 신경 쓰였다.
잠시 뒤 강현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손바닥 위에 50원짜리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바꿔왔어.”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다시 자판기에 넣었다.
달칵.
이번엔 반환 레버를 돌릴 때 손끝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한 번. 아무 소리도 없었다.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한 번.
달그락.
또 100원이었다.
나는 이번엔 웃음이 먼저 났다. 어이가 없어서 웃는 건지, 기분이 조금 좋아서 웃는 건지 나도 잘 몰랐다. 어쨌든 웃음은 웃음이었다.
나는 그 100원을 다시 자판기에 넣고 율무차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종이컵이 떨어지고, 뜨거운 율무차가 종이컵 안으로 졸졸 쏟아졌다. 그 소리를 듣는데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율무차를 자판기에서 꺼내 들었다.
“마셔.”
강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이 마셔야지.”
“아까 마셨잖아.”
“그건 내가 형 준 거고.”
“그러니까 이번엔 너 마시라고.”
강현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럼 반만.”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반만.”
강현은 종이컵을 받아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혀를 내밀며 얼굴을 찡그렸다.
“뜨거워.”
“식혀 먹든가.”
“형이 먼저 마시라니까.”
나는 컵을 다시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달큰하고 고소한 맛이 났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병원 냄새가 싫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율무차 김만 가까이 두고 싶었다.
우리는 자판기 옆 복도 창문 아래에 잠깐 멈춰 섰다. 정확히는 나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강현은 그 옆에 서 있었다. 창밖에는 병원 화단이 보였고, 햇빛을 받은 나무 잎들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렸다.
나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했다.
내 몸은 여전히 내 말을 잘 안 들었다. 다리는 아직도 남의 것처럼 무겁고, 재활은 끔찍하게 아프고, 내일도 또 식은땀을 흘리게 될 게 뻔했다. 부모님은 늘 바빴고, 병실은 늘 시끄럽거나 혹은 너무 조용했고, 나는 혼자서 이 모든 시간을 버텨야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날의 율무차는, 세상이 잠깐 내 편을 들어준 것 같은 맛이 났다.
“형.”
“왜.”
“우리 이거 비밀로 할까?”
나는 컵을 든 채 고개를 돌려 강현을 봤다.
“왜.”
“엄마가 알면 하지 말랄 것 같아.”
그건 맞는 말이었다. 엄마는 정직하지 못한 돈 장난이라며 딱 질색할 사람이었다.
“그래. 비밀.”
강현이 씩 웃었다.
“우리 둘만 아는 거다?”
“어.”
나는 다시 자판기를 봤다. 누렇게 바랜 음료 그림, 헐거운 반환 레버, 손때 묻은 동전 넣는 구멍. 누가 봐도 평범하고 낡은 병원 자판기였다. 그런데 어쩐지 그 안 어딘가에 아주 작고 이상한 틈이 하나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이 늘 정직하지만은 않다는 걸, 꼭 나쁜 쪽으로만 굴러가지는 않는다는 걸, 병원 복도 한구석에서 말없이 보여주는 틈.
그날 저녁, 병실로 돌아와 누웠을 때도 내 다리는 여전히 무겁고 아팠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어제보다 덜 가라앉아 있었다.
혹시 다리도 저 자판기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내 편으로 돌아와 주는 날이 올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오른쪽 발끝에 힘을 줘보았다.
아주 미세하게였지만, 뭔가가 내 안에서 움찔한 것 같았다.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병원 자판기가 50원을 100원으로 바꿔준 날이었으니까.
그 정도 기분 탓쯤은, 믿어도 될 것 같았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