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이의 사랑
58012486
'헉...'
나는 혹여라도 강현이가 이 메시지를 볼까 놀라서 그만 삐삐를 떨어뜨릴 뻔했다. 가까스로 잡은 호출기를 바지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었다. 티브이 채널을 넘기느라 강현이는 다행히 못 본 모양이다.
58012486은 우리 삐삐세대가 널리 사용하는 은어로 보통 '오빠 영원히 사랑해'라는 뜻인데, 이건 안 봐도 정후 녀석이 장난으로 나한테 메시지를 보낸 게 틀림이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삐삐 번호를 알려준 여학생은 아직 아무도 없었고, 사실 내 번호를 아는 사람이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손에 꼽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후 녀석은 이렇게 한 번씩 58..로 시작하는 낯 뜨거운 메시지를 보내고는 자기가 아닌 척하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강현아, 나 음성사서함만 잠깐 확인하고 밥 같이 먹자~"
"어~"
012-***-**** 번호를 하나씩 꾹꾹 눌렀다. 익숙한 DJ Doc의 '머피의 법칙'이라는 흥이 나는 컬러링이 들리자마자 나는 3번을 연타했고 곧장 네 자리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정현쓰~ 속았지? 여잔줄 알았지?ㅋㅋㅋ"
나는 속으로 '퍽이나'라고 말하며 피식 웃었다. 이어서 정후는 이따가 8시쯤에 잠깐 국제서림 맞은편 배트맨 노래방으로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고 바로 답장을 주라고 했다. 배트맨 노래방은 근방의 데몰리션 노래방 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곳으로 시간당 3천 원 하는 곳이라서 시설은 좀 작고, 추가 시간도 거의 안 주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가 많은 노래방이었다. 나는 속으로 '엉아는 숙제하고 동생 돌봐야 한단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후의 마지막 한마디에 나는 그만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고 말았다.
"정현아, 잘 들어... 소연 누나 알지? 덕포여상? 무릎녀! ㅋㅋㅋ 그 누나도 나오니까 아무 생각하지 말고 나와. 머리에 무스라도 바르고 나와라. 쪽팔리게 교복 입고 오지 말고 그럼 오는 걸로 알고 있을게ㅋㅋㅋㅋ"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 누나가 왜? 노래방에? 왜 정후랑? 나는 왜? 나는 강현이가 밥 안 먹냐고 날 부를 때까지 그 자리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느라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형?"
"어, 강현아. 왜?"
"형, 지금 젓가락만 입에 물고 십 분째 멍하게 있는데 알아?"
"내가? 그랬어? 히히. 내가 뭣 좀 생각하느라..."
"형, 연애해?"
"아니!! 아닌데? 왜? 왜 그렇게 생각했어?"
"뭐야.. 얼굴은 왜 빨개지고.. 진짠가 보네?"
"응?"
"그냥 한 말인데 형 반응이 신기해서."
"아, 그런 거 아냐."
"형, 김치찌개 좀 더 줘."
"어, 잠깐만."
"형, 근데 나 오늘 학교에서 고백받았다?"
"뭐?"
"우리 반에 김진아라고 있잖아. 전에 발렌타인데이 때 나한테 초콜렛 준 얘. 걔가 오늘 나한테 사귀자고 했어."
"진짜? 우리 동생 인기 많네. 걔 예쁘다며? 좋겠다?"
"음... 잘 모르겠어. 근데 다른 애들한테 인기는 많아."
"강현이도 이제 다 컸네? 10살이니까ㅋㅋ"
"그럼 내가 아직도 앤 줄 알아?"
"ㅋㅋㅋㅋ 그래 강현아, 너 다 컸다. 근데 넌 걔가 별로야?"
"아니, 싫은 건 아닌데 나도 걔를 좋아해야 해? 걔가 나를 좋아하니까?"
"그건 아니지, 그 친구 마음도 중요하지만 네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하지. 난 강현이가 그 친구랑 사귀고 안 사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친구가 널 좋아해 주는 마음이 고마운 거니까 고맙다고 말하고, 그다음엔 강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좋을 것 같아."
"응, 그럴게. 근데 형은 어떻게 그런 걸 알아?"
"뭐가?"
"형이 좀 어른스럽게 느껴져서..."
"고럼 너보다 한~~~참 더 살았잖냐ㅋ 내가 너보다 먹은 밥만 해도 천 오백 공기도 훨씬 넘는다고ㅋㅋㅋㅋ"
"ㅋㅋㅋㅋ 그래 밥 많이 먹어서 좋겠다."
"이 녀석이 형한테~"
나는 강현이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식탁을 치우는 동안 강현이에게 티브이나 보고 있으라고 하고서 나는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내가 소연누나를 좋아하는 걸까? 이런 게 좋아하는 감정인가? 그냥 잠깐의 스쳐가는 감정은 아닐까? 그리고 좋아한다고 해서 그걸 티를 내는 게 맞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아... 이따 나갈까? 근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정후에게 당장이라도 음성메시지를 남겨서 어떻게 된 건지 왜 그 누나가 우리랑 노래방에서 만나게 되는지 사건의 전말에 대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는데 정훈이가 순순히 다 설명해 줄 거였으면 먼저 보낸 메시지에서 다 말했을 것이었다. 일단 가봐야 할 것 같았다.
티브이에서 수요일 저녁이라 가요톱텐에서 양파의 <애송이의 사랑>이 흘러나왔다. 손범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격양되는 듯하더니 결국 양파가 룰라의 <연인>을 꺾고 1위를 차지한 듯했다. 앙코르곡으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조금만 더 가까이 내 곁에 있어줘 널 사랑하는 만큼 기대 쉴 수 있도록 지친 어둠이 다시 푸른 눈뜰 때 지금 모습 그대로 Oh baby 제발 내 곁에 있어줘
몇 주 전부터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간질간질하다 했더니 결국 1위를 차지했구나 싶었다. '애송이의 사랑이라니.. 뭔가 내 이야기 같네?' 나는 얼른 시계를 살짝 봤다. 벌써 7시 반도 한참 넘었다. 나는 서둘러 설거지를 마치고 내가 가진 옷 중에 가장 그럴듯한 옅은 하늘색 남방에 청바지를 입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강현이에게 말했다.
"강현아 형 잠깐 나갔다 올 거야. 이 닦고 잘 준비하고 티브이 보고 있어. 엄마 아빠는 늦게 오실 거니까 형이 이따 10시 되기 전에 들어올게." 강현이는 알겠다고 하고는 다시 티브이로 눈을 옮겼다. 리모컨을 누르며 티브이를 강현이의 눈이 벌써 반쯤 감겨있는 것이 곧 잠들 것 같았다. 나는 열쇠 들고나가니까 누가 와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오른발을 신에 밀어 넣었다. 현관 거울을 보며 머리에 무스를 바를까 하다가 평소에 하지 않는 짓은 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며 왼발을 신에 마저 미끄러지듯 밀어 넣고 땅에 신발코를 콩콩 찍으며 신을 신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7시 53분이었다.
'자전거로 노래방까지 평소에 10분 거리, 지금부터 부지런히 밟으면 먼저 도착하지는 않아도 늦지는 않겠지?.' 대충 계산이 서자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자주 다니던 길이고, 인파는 있어도 저녁 시간대에 차가 많이 다니지는 않는 곳이라 코너에서도 속도를 조금만 줄이며 가면 대략 8시까지 도착할 터였다. 나는 손목의 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조금 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기어는 가장 낮게 설정되었고 허벅지는 이미 터질 듯 부풀어 청바지를 밀어내고 있었다.
'이제 코너 2개만 돌면 도착이다'
어떤 일이든 성급하면 될 일도 안된다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코너를 조금 급하게 돌던 나는 마찬가지로 맞은편 골목에서 급하게 우회전해서 오는 차량을 보고 급하게 왼쪽으로 핸들을 끝까지 돌리고 브레이크를 잡았다.
끼이이이 이 이이익~ 굉장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