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에 찍힌 번호
송곳(8)
호주머니를 뒤져 서둘러 확인한 호출기 액정 화면에는 '8282'라는 숫자가 띄워졌다. 긴급호출이 필요할 때마다 삐삐 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이 은어에 독촉받는 것이 어째선지 싫지만은 않았던 나는 얼른 주변에 공중전화가 있는지 둘러보았다. 마침 근처 슈퍼 앞에 공중전화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최근에 설치했는지 전화기에 반질반질 광이 흐르고 있었다. 요즘은 동전 삽입 방식의 전화기는 거의 다 사라져 가는 추세다. 나는 지갑에서 이름 모를 빨간 새가 죽기 살기로 날개를 퍼덕이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2천 원짜리 공중전화 카드를 꺼내 카드 투입구에 넣었다. 곧이어 신호음이 울리고, 나는 신속하게 내 삐삐 사서함에 접속했다.
'삐~~ 한 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들으시려면...'
나는 메시지가 끝나기도 전에 1번 버튼을 연타했다.
'정현아, 아빤데 어디냐? 서둘러 좀 들어와라.'
호출기가 생긴 지 2년째, 무뚝뚝한 아버지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내 호출기에 메시지를 남긴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나는 정후에게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얼른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혹시라도 김영광 일행이 복수하겠다고 진이라도 치고 있을까 봐 살피며 조심히 갔지만 의외로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 집은 바닷가에 지어진 15층짜리 아파트 5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닷바람의 짭조름한 냄새가 진해지면 집에 거의 다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데 발 밑에 뭐가 쓱 하고 움직였다. 아래를 보니 작은 게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른 손가락 위에 올려 다시 보니 내 검지 손톱보다도 작은 초소형 게였다.
"넌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니?" 비가 와서 해수면이 높아지거나 하면 아파트가 바닷가에 딱 붙어 있어서 이런 작은 해양생물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나는 게를 집어다가 다시 밖에 풀숲 쪽에 내려주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마 좀 전에 누군가 치킨을 시켜 먹었는지 기름냄새가 확 올라왔다. 나는 습~ 하고 공기를 들이마시며 "아~ 냄새 좋다~"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강현이가 치킨 사달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큰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난 뒤, 보증을 섰던 우리 집도 덩달아 파산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자신들만 간직하기로 결정하셨고 우리 자식들에게는 그런 짐을 지워주지 않으시기 위해 그야말로 피땀 흘려 일하셨으며, 지금은 치킨 한 마리 정도의 여유는 생긴 상황이지만 되돌아보면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언감생심 저녁에 치킨 한 마리 먹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었다. 몇 년 전엔가 부모님이 우리 형제를 데리고 해수욕장에 간 적이 있었다. 아마 내가 6학년이었고, 동생 강현이가 1학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자리잡은 해수욕장 한 켠 바로 옆에 다른 가족들이 막 튀겨 온 치킨을 먹고 있었다. 슬슬 피어 오르는 고소한 냄새에 우리 형제는 계속 그 집 냄비를 힐끔힐끔 쳐다 보았다.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눈이 자동으로 그 쪽으로 향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엇다. 동생은 급기야 잠시 그 쪽 집 가족들이 치킨을 먹다 두고 해수욕을 하러 갔을 때 자기도 모르게 그 집 치킨에 손을 댈 뻔해서 어머니께 꾸중을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닭 한 마리 사주기 어려운 형편에 너무 가슴이 아프셨었다고 한다.
내가 핏덩이일 당시 우리 집은 파산을 경험했고, 동생 강현이는 부모님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나서야 비로소 가진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5살의 터울이 생긴 것이었다. 여느 집이 다 그렇듯이 나는 장남이라서 부모님 눈치를 많이 보고,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잘 사달라는 말을 못 하고, 용돈이 다 떨어져도 부모님이 먼저 주시기 전에는 용돈이 없다는 말도 못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강현이 녀석은 아직 어려서 그럴테지만 뭐가 그렇게 필요한 게 많은지 곤란해하시는 부모님의 표정도 읽지 못하고 뭐든 사달라고 하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조르기 일수였다. 가끔 나는 내 용돈을 녀석에게 나누어 주고는 했는데, 동생을 아끼고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부모님의 형편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띵~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전에 살던 아파트는 5층짜리 주공아파트였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연탄을 떼어 난방을 해야 해서 아파트 층과 층 사이에 커다란 고무다라이가 있고 거기에 사용하지 않은 연탄이 높이 쌓여 있어서 다닐 때마다 저것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무서웠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파트는 15층의 고층 아파트로 통로는 깨끗하고 환한 전등이 비추고 있다. ‘그새 우리 형편이 많이 좋아졌구나’ 이 치킨 냄새가 우리 집으로 배달 온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도착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문을 열어주는 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들어가는데 어머니가 내 몰골을 보고 깜짝 놀라셨다. "정현아, 늦게 왔네... 어머나 이게 뭐야? 왜 교복이 다 뜯어져 있어? 얼굴은 왜 그렇게 된 거야? 무슨 일이야?" 또 학교에서 선생님께 맞은 거야? 어머니가 '또'라는 글자에 힘주어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지난번 김재덕 선생님께 맞고 온 이후 계속 마음에 두고 계셨구나 싶었다.
"아니에요. 우연히 불량배들에게 걸려서 싸움이 있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더 많이 때렸어요."
"그래도..."
"그런데 왜 일찍 오라고 하셨어요?" 나는 걱정하며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어머니의 말 허리를 냉큼 잘랐다. 어머니는 사랑의 크기만큼 잔소리 가방도 커다란 편이기 때문이다. 때마침 안방에서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나오는 아버지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헛기침을 하셨다.
"왔냐?" 아버지는 서둘러 옷을 입으시느라 나를 제대로 보지도 않으셨다.
"네, 어디 가세요?"
"응, 명성교복이라고 알지? 너 중학교 입학할 때 네 교복 지어주신 박사장님께서 오늘 낮에 돌아가셨다. 엄마랑 장례식 좀 다녀올 테니 강현이랑 밥 챙겨 먹고 있어라."
"네, 알겠어요."
어머니는 냉장고 안에 있는 콩자반이랑 두부조림을 꺼내어, 냄비에 있는 콩나물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데워서 저녁을 차려 먹으라고 하셨다. 동생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치찌개가 있다는 소식에 기쁘기보다, 박사장님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에 놀란 마음이 더 컸다.
"그런데 어쩌다가 돌아가셨어요?"
"응, 오늘 시내에서 음주 운전하는 차량과 정면 추돌을 했다는구나. 상대방은 외지인인데 크게 다치지는 않아서 지금 덕포 경찰서에서 조사를 하고 있다더라. 박사장님이 하필 안전벨트를 안 메고 있어서 현장에서 바로 즉사했다고 하더라. 그 댁 사모님도 장애 때문에 몸이 불편하신데 그 집 딸들이 아버지 학교 학생들 아니냐?"
"아 그래요?"
"민희라고 그 집 큰 딸이 작년에 우리 반이었거든. 그분이 가난한 학생들 교복도 원가만 받고 많이 지어주신 훌륭한 분이셨는데 참 안타깝게 됐다.
"네... 그러게요."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얼른 가봐야겠다. 강현이 숙제 좀 봐주고, 저녁 잘 챙겨 먹어라."
"네, 아버지 어머니 잘 다녀오세요."
끄이이익 턱! 찰칵
무거운 현관문이 다소 피곤한듯한 소리를 내고는 닫혔고, 나는 항상 문단속을 잘해야 한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얼른 문을 잠갔다.
"아니 그런데 이 놈은 아버지 어머니 나가시는데 도대체 뭘 하길래 코도 안 비추는 거야?" 동생 방문을 벌컥 열었다. 전에는 동생과 한 방을 썼지만 이곳 비치아파트로 이사 온 뒤로는 동생과 내가 방을 각자 쓸 수 있었다. 침대 귀퉁이에 누워 도로롱 코를 골고 자고 있는 강현이 녀석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기며 깨웠더니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하아아암~ 형 왔어? 엄마는?" 이제 겨우 열 한 살인 동생은 키는 또래 애들보다 조금 작고, 눈은 부리부리한 똘똘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어, 지금 장례식장 가셨어. 형이랑 밥 먹고 숙제 같이하자."
"나 오늘 숙제 없는데?"
"너 지난번에도 숙제 없다고 했었는데 사실은 있었잖아."
"헤헤헤 이번엔 진짜 없어."
"알겠어, 김치찌개 데워줄게 밥 먹자. 계란 후라이 해줄까?"
"응, 형이 해주면 맛있어."
"그래 알았어. 티비에 재밌는 거 뭐 하는지 켜 봐."
"어, 근데 형 입에 피나."
"어, 오늘 동네 양아치들이랑 싸웠어."
"헐, 형이 이겼어?"
"ㅋㅋㅋ 이겼지."
"와, 우리 형 짱이다."
"짱은 아닌데 우리 강현이가 어디서 괴롭힘 당하면 형이 지켜줄게."
"그래~"
달궈진 프라이팬에 샘표 식용유를 두르고, 손바닥으로 팬의 온기를 확인한 이후 능숙하게 달걀을 탁 하고 깨뜨린 다음 두 알을 팬에 부쳤다. 티티틱 하고 기름이 튀어서 팔에 떨어졌다.
"으뜨뜨.. 기름 튄다." 얼른 싱크대에서 찬물로 열을 식히는데 호출기에 또 알람이 울렸다.
'58012486'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