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9)

애송이의 사랑

by 마짝꿍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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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정현은 혹시라도 강현이가 그 메시지를 볼까 봐 놀라 하마터면 호출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가까스로 받아 든 호출기를 얼른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다행히 강현이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느라 이쪽을 보지 못한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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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숫자는 삐삐 세대 사이에서 제법 널리 통하는 은어였다. 보통은 ‘오빠 영원히 사랑해’라는 뜻으로 쓰였다. 정현은 그걸 보는 순간, 이건 십중팔구 정후의 장난이라고 확신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삐삐 번호를 알려 준 여학생은 한 명도 없었고, 가족을 빼면 번호를 아는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정후는 꼭 이렇게 한 번씩 58로 시작하는 낯 뜨거운 메시지를 보내 놓고는 나중에 자기가 아닌 척 발뺌하곤 했다. 그 유치함이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강현아, 나 음성사서함만 잠깐 확인하고 밥 같이 먹자.”


“어~”


정현은 번호를 하나씩 눌렀다. 익숙한 DJ DOC의 〈머피의 법칙〉 컬러링이 들리자마자 곧장 3번을 연타했고, 이어 네 자리 비밀번호를 눌렀다.


곧 정후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정현쓰~ 속았지? 여잔 줄 알았지? 크크.”


정현은 속으로 ‘퍽이나’ 하고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이어 정후는 이따가 여덟 시쯤, 국제서림 맞은편 배트맨 노래방으로 잠깐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바로 답장을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배트맨 노래방은 근처 데몰리션 노래방보다 상대적으로 싼 곳이었다. 시간당 삼천 원. 시설은 좀 좁고 추가 시간도 잘 안 줬지만, 주머니 가벼운 학생들 사이에서는 꽤 인기 있는 곳이었다.


정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엉아는 숙제도 해야 하고 동생도 봐야 하거든.’


그런데 정후의 마지막 한마디가 모든 생각을 단번에 뒤집어 버렸다.

“정현아, 잘 들어. 소연 누나 알지? 덕포여상, 무릎녀. 크크. 그 누나도 나오니까 아무 생각하지 말고 나와. 머리에 무스라도 바르고 나오고. 쪽팔리게 교복 입고 오지 말고. 그럼 오는 걸로 알고 있을게.”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 누나가 왜 노래방에?

왜 정후랑?

왜 거기에?


정현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장난 같은 호출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마디를 듣는 순간, 그건 갑자기 다른 일이 되어 버렸다. 단순히 노래방에 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정말로 아주 작게라도, 자기 인생에 뭔가 새로운 일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낯설 정도로 사람을 들뜨게 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가슴 한쪽을 자꾸 조급하게 만들었다.


“형?”


“어, 강현아. 왜?”


“형, 지금 젓가락만 입에 물고 십 분째 멍하게 있는 거 알아?”


“내가? 그랬어? 히히. 내가 뭣 좀 생각하느라…”


강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형의 얼굴을 살폈다.

“형, 연애해?”


“아니!”

정현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튀어나왔다.


“아닌데? 왜? 왜 그렇게 생각했어?”


“뭐야. 얼굴은 왜 빨개지고. 진짠가 보네?”


“응?”


“그냥 한 말인데 형 반응이 신기해서.”


“아, 그런 거 아냐.”


“형, 김치찌개 좀 더 줘.”


“어, 잠깐만.”


정현이 국자를 들자, 강현이가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형, 근데 나 오늘 학교에서 고백받았다?”


정현은 국자를 든 채 멈췄다.

“뭐?”


“우리 반에 김진아라고 있잖아. 전에 발렌타인데이 때 나한테 초콜릿 준 애. 걔가 오늘 나한테 사귀자고 했어.”


정현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었다.


“진짜? 우리 동생 인기 많네. 걔 예쁘다며? 좋겠다?”


“음… 잘 모르겠어. 근데 다른 애들한테 인기는 많아.”


“강현이도 이제 다 컸네? 열 살이니까.”


“그럼 내가 아직도 애인 줄 알아?”


정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강현아. 너 다 컸다. 근데 넌 걔가 별로야?”


“아니, 싫은 건 아닌데… 나도 걔를 좋아해야 해? 걔가 나를 좋아하니까?”


정현은 잠깐 말을 골랐다. 방금 전까지 자기 머릿속을 휘젓고 있던 생각들이 아주 잠깐 다른 모양으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건 아니지. 그 친구 마음도 중요하지만, 네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하지. 누가 널 좋아해 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네가 꼭 같은 마음이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고맙다고 말하고, 그다음에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강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근데 형은 어떻게 그런 걸 알아?”


“뭐가?”


“형이 좀 어른스럽게 느껴져서.”


정현은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고럼. 너보다 한~~~참 더 살았잖냐. 내가 너보다 먹은 밥만 해도 천오백 공기는 훨씬 넘는다.”


강현이가 바로 받아쳤다.

“그래서 좋겠다. 밥 많이 먹어서.”


정현은 웃으며 손을 들어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이 녀석이 형한테.”


식탁을 치우는 동안 정현은 강현이에게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으라고 한 뒤 설거지를 시작했다. 수세미를 움직이는 손은 바빴지만, 머릿속은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내가 소연 누나를 좋아하는 걸까.

이런 게 좋아하는 감정인가.

아니면 그냥 잠깐 스쳐 지나가는 마음일 뿐일까.


그런데 단순히 좋아한다는 말로는 좀 부족한 것 같기도 했다. 그 누나를 다시 보러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자기 앞에 닫혀 있던 무언가가 아주 조금 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가, 다른 공기가, 다른 속도가 자기 쪽으로 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조급해졌다.


‘하아… 이따 나갈까? 근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당장이라도 정후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겨 어떻게 된 일인지, 왜 소연이 노래방에 나오는 건지 자초지종을 캐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정후가 순순히 다 설명해 줄 거였으면 애초에 메시지에서 말했을 것이다. 결국 직접 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텔레비전에서는 수요일 저녁답게 가요톱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양파의 〈애송이의 사랑〉이 울려 퍼졌다. 손범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한층 들떠 있었고, 결국 양파가 룰라의 〈연인〉을 꺾고 1위를 차지한 모양이었다. 이내 앙코르곡이 흘러나왔다.


조금만 더 가까이
내 곁에 있어줘
널 사랑하는 만큼

기대 쉴 수 있도록
지친 어둠이 다시
푸른 눈뜰 때
지금 모습 그대로
Oh baby
제발 내 곁에 있어줘


몇 주 전부터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간질거렸는데, 결국 1위를 했구나 싶었다.

‘애송이의 사랑이라니…’

정현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꼭 내 얘기 같네.’


시계를 슬쩍 보니 벌써 일곱 시 반도 한참 넘은 시간이었다.


그는 설거지를 서둘러 마치고, 자기가 가진 옷 중 가장 그럴듯한 옅은 하늘색 남방과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강현이에게 말했다.


“강현아, 형 잠깐 나갔다 올 거야. 이 닦고 잘 준비하고 텔레비전 보고 있어. 엄마 아빠는 늦게 오실 거니까 형이 이따 열 시 되기 전에 들어올게.”


강현이는 대충 알겠다는 듯 대답하고는 다시 텔레비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모컨을 만지는 눈이 벌써 반쯤 감겨 있는 걸 보니, 조금 있으면 그대로 잠들 것 같았다.


정현은 열쇠 들고 나가니까 누가 와도 문 열어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뒤 서둘러 오른발을 신에 밀어 넣었다. 현관 거울 앞에서 잠깐 멈춰 머리에 무스를 바를까 고민했지만, 평소 하지 않던 짓은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왼발까지 신에 밀어 넣고 바닥에 신발코를 콩콩 찍으며 발을 맞췄다.


시계를 보니 벌써 일곱 시 오십삼 분이었다.




자전거로 노래방까지 평소 십 분 거리.

지금부터 부지런히 밟으면 먼저 도착하지는 못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계산이 서자 그는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페달을 밟자마자 다리가 먼저 속도를 냈다. 자주 다니던 길이었다. 저녁 시간대라 차도 아주 많지는 않았다. 코너만 조금 조심하면 여덟 시 안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정현은 자꾸만 손목시계를 확인하게 됐다. 그때마다 마음이 더 앞으로 쏠렸다. 기어는 가장 낮게 걸려 있었고, 허벅지는 터질 듯 부풀어 청바지를 안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골목 불빛들이 양옆으로 미끄러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뒤로 밀렸다.

모든 것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정현은 자전거를 타고 있는 게 아니라, 뭔가 자기 앞에 열릴지도 모르는 쪽으로 몸 전체가 끌려가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냥 노래방에 가는 것뿐인데도, 오늘 밤이 지나면 뭔가가 아주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래서 더 늦고 싶지 않았다.


‘이제 코너 두 개만 돌면 도착이다.’


페달을 한 번 더 세게 밟았다.

다음 골목까지의 거리가 짧게 접혔다.

가게 간판 하나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정현의 숨도, 심장도, 자전거 바퀴도 점점 더 빨라졌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어떤 일이든 성급하면 될 일도 안 된다고.

하지만 그 말을 떠올릴 새도 없이 정현은 코너를 조금 급하게 돌아 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맞은편 골목에서 똑같이 급하게 우회전해 들어오는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정현은 본능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끝까지 꺾고 브레이크를 움켜잡았다.

끼이이이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그 순간 정현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뭔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세상은 꼭 그럴 때,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끼어드는 법이었다.


(계속)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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