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억 속에
작년 이맘때, 선배들이 분주하게 홍보를 준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그 역할이 우리 차례로 넘어왔다. 선배들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모든 걸 맡겼다. 방식도, 준비도, 실행도.
그런데도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처음 들어올 땐,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입부 이후의 나는 그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부회장 누나와의 좋지 않은 연애 마무리, 학교생활에서의 인성 문제, 그 외에도 자랑할 만한 건 많지 않았다.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동아리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거, 그 하나뿐이었다. 어찌 보면, ‘1등을 만들겠다’ 던 약속은 지킨 셈이다.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서기가 홍보를 준비하는 걸 곁눈질로 보았다.
정성껏 만든 팸플릿, 균형 잡힌 글씨체, 감각적인 색감.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랑 거리가 먼 감성적인 부분이었다.
시간은 흘러 수요일이 되었다. 난 동아리 홍보엔 관심이 없었고, 친구들과 점심식사 후 운동을 마치고 PC방에 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동아리 쪽에서 연락이 왔다. 제발 한 번만 얼굴을 보여 달라고, 사물함 앞에 걸터앉아 있기만 해달라고.
사실, 나는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 동아리에 이런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얼굴마담 역할이었다. 물론 내가 이 동아리에 있다는 걸 모르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친구들과의 의리를 택할지, 동아리의 부탁을 들어줄지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PC방은 가지 않기로 했다.
수요일 아침.
등굣길에, 우리 동아리 홍보 게시물을 하나하나 읽었다.
생각보다 정성스럽고 따뜻한 말들이 많았다.
시간이 되었다.
우린 2학년 교실 중 한 곳을 빌려 면접을 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우리 동아리가 경쟁률 1등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말은, 그만큼 많은 이들이 떨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후 1시쯤.
담배는 피우지 않았고, 후드집업 하나 걸친 채 딸기우유 몇 개와 내가 먹을 햄버거를 들고 면접실로 향했다. 교실에 도착하니 어떤 남자애가 열심히 대답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인사를 건넸다. 기숙사에서 마주친 적이 있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괜히 경직될까 봐, “편하게 해”라고 짧게 말해줬다.
가만히 있기 어색해서, 딸기우유를 하나씩 나눠줬다. 교실 뒤편, 햇살이 드는 창가에 걸터앉았다.
햇빛은 따뜻했고, 문득 PC방에 간 친구들이 부러워졌다.
몇 명이나 면접을 보느냐고 물으니, 6시, 늦으면 7시까지는 봐야 할 거라고 했다.
그 시간까지 그냥 앉아 있기만 할 순 없었다. 이왕 온 김에 질문도 하고, 지원자들이 낸 자기소개서를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조금 무안해졌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자기소개서들.
‘내가 이런 동아리에 어떻게 들어왔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공이 생명과학 쪽이다 보니, 여후배들의 지원이 많았다.
뒤에서 조용히 면접을 지켜보다가, 간혹 질문을 던졌다.
어떤 질문은,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기도 했고,
어떤 후배는 울먹이기도 했다. 미안했다.
그래도 큰 문제없이, 무탈하게 면접은 끝났다.
"이거 왜 하는 건데?"
신입생 환영회를 치킨집에서 열었다. 후배들과 조금이라도 친해지자는 취지였다.
그리고 마니또 게임이 시작됐다. 누군가에게 몰래 선물이나 응원의 말을 전하며 정체를 숨기는 그런 게임.
“이거 왜 하는 거냐고.”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리면서도 종이를 집었다.
내 마니또는 누굴까.
그 순간만큼은 제발 남자애, 남자애 나오길 바랐다.
하지만 말을 한 번도 나눠보지 않은 여자 후배가 나왔다.
어쩌겠나.
그날 이후, 가끔 밖에 나갔다 오면서 작은 선물이나 먹을거리를 사 왔다.
투박한 손글씨로 짧은 말 몇 자 써서, 기숙사 자리 위에 조용히 올려두곤 했다.
그게 다였다.
금세 내가 마니또라는 걸 들켰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막상 하기 싫어했지만 츤데레처럼 막상 하게 되니 최선을 다했다.
날 좋아하지 마. 분명 너만 상처 입을 거야.
여후배들이 날 좋아했다. 초콜릿을 주는 날 혹은 특정한 날이 아니더라도, 수제 초콜릿에 손 편지를 곁들여 내 책상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곤 했다.
그걸 본 친구들은 시기와 질투 섞인 눈길을 보냈다.
근데, 내가 뭐라고.
내가 여자라면 나 같은 남자를 절대 좋아하지 않았을 거다.
투박하고, 자기 멋대로 살고, 차갑고 무뚝뚝한, 딱 최악의 남자.
후배들이 인사를 건네면 난 그냥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게 다였다.
하지만 지금 여자친구와 예전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 행동이 여자가 오해할 여지를 줬다고 말한다.
내 입장에선 단지 매너였고, 웃음이었을 뿐인데
그게 누군가에겐 기대가 되고, 오해가 되고, 마음이 됐구나.
그제야 왜 내가 뒷말을 들었는지, 왜 욕을 먹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누군가가 고백을 하면 늘 이렇게 말했다.
“날 좋아하지 마.”
예전엔 늘 안 좋게 끝났고,
애초에 잘 대해줄 마음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2학년의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즐겁고도 소중한 나날들이었다.
무작정 기숙사를 빠져나와 친구들과 밤새 수다를 떨고, 운동장에서 밤을 지새우던 날들도 있었다.
몸을 만들어보겠다고 새벽부터 모여 함께 운동을 하기도 했고,
"우정이니, 의리니"를 외치며 금요일 밤이면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술에 잔뜩 취하기도 했다.
가끔은 서로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으며, 관계는 조금씩 깊어져 갔다.
글로 다 담아낼 수 없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와 사건들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추억은 어느새 저물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