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지 않기 위해 더 무너졌던 어느 청춘의 기록
학교를 갔다.
딱히 어디 갈 때도 없었다.
학교에 가니 날 보는 주위 눈빛이 이상했다.
귀신을 본 것 같다고 하면, 꽤 정확한 묘사일 거다.
반에 들어서자 시선이 쏠렸다.
나를 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가까웠던 친구 몇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날, 내가 쓰러졌던 날을 생생하게 묘사해 줬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선생님을 찾았다고, 처음엔 다들 그냥 장난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피가 새면서 상황이 급박해지자 내가 죽으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고."
한두 명은 신종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며 거리를 뒀고, 내가 연락이 닿지 않자 며칠 뒤엔 ‘죽었다’는 소문까지 학교에 퍼졌다고 한다.
웃기지도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이야기 위에 이야기를 쌓았다.
그래 살아 돌아오니 어떻냐!!!
신은 이런 걸로 죽지 않는다!!!
페이스북은 말 그대로 쪽지 더미였다.
날 사랑하고 챙기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이때 마음을 열고 짐을 내려놓았어야 했다.
여자친구이자 누나의 긴 장문의 걱정하는 글이 맨 위에 고정돼 있었고, 나는 그것도 그냥 넘겼다.
선생님들은 오전 수업을 못 했단다.
놀란 애들 달래고, 소문 퍼지는 걸 막느라 진땀을 뺐다고 했다.
나는 등교하자마자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내 상태를 설명했다. 가능한 선에서.
선생님은 수면제와 담배 커피 피시방을 끊고 자길 사랑하라고 하셨다.
더 나아가 가정사와 과거를 물으셨지만,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저걸 들어서 좋을 것도 없다.
말할 수 없기도 하지만,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몸이 무거웠다.
머리는 멍했고,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채워지지 않는 독이 사람이 되면 이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챙겨 먹으라던 약은 서랍장에 넣어두고 손을 닫았다. 나약해지기 싫었고 더 강해지면 치료가 될 줄 알았다. 더 자신을 몰아붙이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다시 학교생활이 시작됐다.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아니, 애써 그리 행동하면서.
아프다고 수능 안 칠 거 아니잖아?
나는 정시파이터라는 이름 아래 있는 학생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소위 말해 내가 학교에 저 문화를 퍼트렸다. 나쁘게 말하면 선동, 좋게 말하면 음.. 의지? 동기부여를 불려 일으켰다.
수시? 애초에 고려하지 않았다. 내신도 1.2였지만 정시가 더 고점이 높고 티비에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5월, 6월이 지나고 고2였지만 심심해서 쳐본 고3 모의고사에서도 1등급이 나왔다.
조금 안도했다.
살아있는 것 같았고, 살아야 할 이유도 생긴 것 같았다. 무사히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나한테 잠을 푹 선물해 줬다.
하지만 그런 기분, 경험해 본 적 있나?
목표에 가까워질수록 뭔가 아주 미세하게 어긋나고 있다는 감각.
말로 설명하긴 어렵다.
그냥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나중에 아주 큰일로 다가와서 큰 오점을 남길 것 같은.
나의 착각이거니 하고 넘겼다.
솔직히 치료할 맘 없죠?
의사는 한 달에 한 번, 나와 상담을 요했다. 스스로의 의지로 신경을 끊은 게 신기했을까.
이른 나이에 병을 가져서 그랬을까.
뇌전증 의심과 더불어 조금 지켜보자고 했다.
수면제를 끊으라는 말과 동시에.
혈액검사에서 수면제 성분이 다량검출되었다.
내심 억울했다, 많이 먹은 건 맞는데 잠을 못 잤으니깐.
나의 뇌는 뇌전증의심을 들음과 동시에 전반적인 계획을 수정했다.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만 수명을 대가로 과각성을 더 강하게 키기로 했다. 내가 몇 년 30살이나 40살에 죽어도 좋으니 그냥 약속만 이루게 해달라고 뇌에 주문을 걸고 더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러고 한 달이 지났었다.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기억이 하나도 안 났고, 어머니의 이름도, 내가 누군지도 몰랐다. 구급대원은 계속 오늘의 날짜와 내 이름을 물어봤지만 난 대답을 못했다. 자꾸 의식을 잃지 말란 말을 했다.
난 의식을 잃었다. 눈을 뜨니 의사 선생님 뒤에 졸졸 따라다니시던 아직 애기의사 누나가 계셨다. 너무 잘자길래 안 깨웠다고 했다. 자기가 날 케어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똑 부러지게 생긴 동그란 안경 낀 누나였다.
말을 많이 거셨지만 난 대꾸를 안 했다.
담당의사와 얘기를 했다. 두 달 만에 작고 큰 발작까지 합하면 10번이 넘었다고, 환자분 죽을뻔했다고.
난 날 돌볼 줄 몰랐다. 약속에 미쳐있었다.
의사는 현실적이었다. 그 애기의사분과 똑같은 질문이셨다.
꿈이 뭐예요? 공부는요? 난 그저 웃으면서 정상을 찍을 거라고 했다. 난 병원에 오래 있지 않았다. 밥도 맛없고 할 일도 없고 무엇보다 이불이 별로였다.
난 뇌전증 판단을 받았다.
들을 때 심정은 죄송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경찰 쪽이나 군대 혹은 의사 쪽으로 진로를 잡았는데, 어찌 저런 병을 가지고 있는데 할 수 있겠는가. 부정이 날 잡아 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든 심정은 분노였다. 내가 왜 이렇게 되어야 하지, 나만 바라봤으면 이기적이었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난 의사와의 상담도 흐지부지 끝난 채 비를 맞으면서 6시간 7시간을 걸었다.
원망스러웠다.
다 왔는데 무엇을 위해 이렇게 노력했단 건가, 과각성이 없었으면 내가 미치지 않았으면 1이란 숫자는 없었을 것인데. 다른 방법이 있었단 말인가.
이제 긍정, 햇빛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끝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어렸던 난 해답을 찾지 못했다.
바뀌는 건 없어.
다만 쭉 같이 함께해야 할 병이 생긴 거지.
자기 합리화와 타협 수긍 그 애매한 경계 선 어딘가.
난 생각을 많이 하며 애들과 철학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수많은 가정과 의견충돌 속에서 조금씩 삶과 신념이 확고해졌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어.
이제 와서 날 몰아붙이지 않는다고 달라지진 않아.
일단 하자. 했던 대로 쭉 하자. 어차피 남들보다 회복도 빠르고 강하니깐 수능 때까지만 하고 1-2년 푹 쉬자 그러면 될 거야.
썩어버린 내면과 신체 정신을 숨기기 위해 티를 안내기 위해, 행여나 썩은 내가 날까 덧칠을 많이 했다. 어머니와 누나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좋은 아들이 되고자 강하게 날 옭아맸다.
안다.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훗날 글에 적겠지만 사선의 경계에서 있었다는 사실.
난 그래도 어릴 때 다짐했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누나가 화를 냈다.
나의 여자친구이자 한 학년 위인 누나는 결국 화를 냈다. 어리석어서일까? 아마 자기를 챙기지 않는 더 나아가 사랑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누나는 울었다.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누나는 서럽게 울었다. 난 그런 누나에게 몹쓸 말을 했다.
그만하자.
나한텐 나름 누나를 고려한 거였다. 누나는 고3이었고 나한테 감정을 쓰고 속상해하는 게 맘 아팠다.
누나, 그만하자.
누나는 울었다. 뭐 난 썩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매번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었고 상황이 내 우선순위에 맞게 흘러가길 추구했으며 밀도가 다른 액체가 서로 섞이지 않는 것처럼 우선순위끼리 부딪히길 싫어했다.
그렇게 우린 헤어졌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누나가 좋은 사람이었기에 선배들은 나한테서 등을 돌리고 날 미워했다. 겸허히 받아들였다. 내 잘못이었다.
어쩌면 난 내가 그와 가족에게 삶을 투자하듯 나에게도 자기의 삶을 투자해 줄 여잘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