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좋은 일은 안 좋은 일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by 감자돌이

유치원에서의 재밌음이 피곤함으로 바뀌어갈 때쯤 방학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들 새해이기에 마을을 비우고 친가나 외가 혹은 여행을 가시는 분들로 붐볐습니다. 그런데 이때 저희 마을이 뒤집어질 정도의 큰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아직까지도 가끔 어머니를 뵈러 마을로 갈 때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집까지 걸어 올라가면서 옛날 2층집에 다른 분이 사시는 걸 보면 한땐 우리도 저랬었는데 하면서 씁쓸함?을 떠올리곤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설날을 노린 도둑들이 마을 대부분의 집을 털어갔습니다. 설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저희는 깨진 창문, 열려있는 현관문, 엎어져있는 방들을 보며 속상함과 무엇보다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돈이라곤 될 만한 예물이나 보석 등을 다 가져갔었습니다. 한순간에 많은 돈이 사라졌었지만 신기하게 그는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이미 발생한 사건이고, 많은 집이 털렸기에 범인을 잡을 수 없다고 하시며, 설사 잡는다라도 돈을 다 써서 돌려받을 없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도둑들은 어디 가서 잘살고 있으려나라고 혼잣말을 하곤 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그와 마지막 대화 때 나누어보지 못했지만, 지극히 제 생각으론 아무리 강하고 굳센 그라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론 당황스럽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하여 정신적으로 힘드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는 모두가 해결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문제를 혹은 사건을 부여잡고 있기보다는 누군가는 그 문제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미래의 일들의 해결방법을 모색해야 하길래 그랬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그래서 매번 안 좋은 일이나 힘든 일이 발생하면

안 좋은 일은 안 좋은 일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라고 생각하여 첫 글처럼 감성적인 것보단 이성적인 것에 초점을 두는 삶을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매번 일이 발생하면 저는 저의 혹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에너지를 낭비하기보다는, 그 일로 인해 슬퍼하고 힘들어할 사람들에게 차가운 공감만을 할 뿐, 한편으로는 문제해결을 하는데 에너지를 소비하기를 추구했었습니다.

이제 와서야 감정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존중받아야 할 "감정"을 "낭비"라고 생각했다니 과거의 제가 한심하게 생각이 됩니다. 때론 슬프고 속상함에 대해 따뜻한 공감을 하고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왜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입니다. 늦은 건 사실이지만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니깐요.


아무리 힘들고 안 좋은 일이 발생하신다면, 며칠 동안은 독자분들의 있는 솔직한 감정을 받아들이며 슬퍼하고, 화도 내보고, 훌쩍이면서 보내시다가, 감정이 다 추스러진 다음에는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기운을 내보는 건 어떨까요?

전 물리를 상당히 좋아하기에 결국 에너지 총합은 0이라고 믿기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좋은 일들과 행복한 일들이 일어나실 겁니다.


그렇게 마을에서 그 당시 가장 안 좋은 아파트 2층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말이 안 좋다지 제가 생각하기엔 완벽했습니다. 15평 남짓한 크기에 방이 2개 있고 화장실이 1개 있는 거실과 부엌이 합쳐진 집이었습니다. 아담했고 가족 4명이서 살기에 딱이었으면서 더구다나, 나중에 입학하게 될 학교도 가까웠거든요. 심지어는 조그마한 마트도 아파트 단지 내에 있었습니다.


누나와 어머니는 속상함을 많이 표하셨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전에 살던 집은 방도 3개였고 무엇보다 거실이 이사 온 집만 하게 상당이 컸으니깐요.

그래도 전 유독 해맑았고 집이 있음에 행복해했습니다.


매번 해맑고 행복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스님의 무소유의 삶" 이랄까요?
지금도 전 가진 게 많이 없습니다. 돈도 많이 보유하고 있지 않고, 옷도 몇 벌 보유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행복합니다. 필요한 건 다 있으니깐요.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필요한 게 적을 뿐입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한 번씩 맛있는 것을 살 수 있을 만큼, 하루에 1번 정도 샤워를 하고 냉방기를 틀정도의 돈. 입기 편한 티셔츠와 바지들. 이 이상이 필요할까요?


전 그와 어머니 곁에서 수많은 힘들게 사시는 분들을 보면서 "많은 거에 대해 욕심" 보다는 "있다"라는 부분에 초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촌 마을에 살면서 폐지를 주우시는 분들, 길바닥에서 주무시는 분들을 보면서 생각보다 많이 의식주를 못 누리시는 분들이 많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속상해하면서 자연스레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베풀거나 봉사를 하곤 하였습니다.


꼭 물질적인 것만이 본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성, 지식, 등과 같은 내면도 본인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래서 비록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하다 보니 자존감이 높아지고 긍정적이게 되어서 매번 행복했습니다. 내적으로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긍정" 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이사 오고 난 후 저희 가족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새벽 5시에 나가셔서 저녁 8시 넘게 일을 하시다가 들어오셨습니다. 그때는 아버지 등에 무거운 짐이 있는지도 모르고 새벽마다 출근하신다고 강제로 인사시킨다고 투정을 부리며 아버지를 싫어했었습니다. 어찌 이리 생각이 짧았을까요.

그 인사 몇 초도 걸리지 않는 거, 조금을 투자해서 존경스러움 맘을 담아서 인사를 하고 잤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좋은 아들이 일찍 되지 못함에 그가 떠나고서야 후회했습니다.

그는 힘든 일을 했습니다. 수리직에 가까웠는데 용접하다가 눈이 다치시거나 수리하다가 종종 다치셔서 상처가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서도 제가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열심히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그가 본인의지로 병원을 간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이때 기준으로 10년 뒤에 그의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되니 이해가 다되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아마도 고등학생 때 그와 작별인사 스토리를 풀어갈 때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저 이야기를 이어가 보면 어머니도 부업을 하셨습니다. 냄새가 고약한 검은색 고무 같은 걸 동그랗게 따는 일을 하셨는데 그 당시 하나당 10원 했었는데 확실히 건강에 안 좋은 냄새였다는 건 알 수 있었습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었습니다. 그걸 한 번씩 도와드리면서 생각했습니다. "돈의 가치"에 대해서였습니다. 동그라미 100개가 1000원이었으니깐요. 돈의 가치는 무거웠습니다. 그 당시 껌도 300원이었으니 30개를 동그라미를 뜯어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 나이에 생각했습니다. 어떻게든 성공을 해서 힘든 일을 안 해도 편하게 사실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조그마한 아이는 생각했습니다.


항상 그의 힘듦과 과거가 이야기에 나오면 글이 산만해지고 이성이 감성을 쾅하고 누르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제 감정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억압하는 제 자신이 왜 이렇게 고장 났나 싶습니다.


어머니는 주로 다른 머니들의 집에 가셔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부업을 하시면서 부업이 끝나면 다 같이 장을 보러 가시고 하셨습니다. 묵묵하게 혼자 일을 하시는 것보단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씩 도와주면서 힘들고 무료하단 것을 느꼈 때문입니다.


전 집에 혼자 있었습니다. 6살이라서 어느 정도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다 아는 나이였습니다. 전 호기심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어느 날은 밥솥에서 김이 칙칙 칙칙하면서 오길래 분명 눈에 보이는데 공기 중으로 배출되다가 사라지길래 손을 가져다 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수증기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결국 못 참고 오른손을 가져다 대었습니다. 무지막하게 뜨거웠고 오른쪽 2,3,4번째 손가락이 살이 녹으면서 들러붙게 되었습니다. 운이 정말 좋게도 어머니께서 장을 보고 저의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집에 뛰어들어오셨습니다. 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울면서 손을 뗄생각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들러붙은 2,3,4번째 손가락을 떼어내긴 했지만, 세 번째 손가락은 화상의 강도가 너무 심해서 손가락 마디 부분이 굽어 있습니다. 반듯하게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서 속상하긴 하지만 제 손가락이니 사랑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어머니는 밥솥을 바닥에 놔두시지 않으시고 제 키가 안 대이는 주방탁자에 두셨습니다.


저는 말썽꾸러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다만 엄청난 상상을 초월한 호기심쟁이였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누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저의 마이웨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집에 혼자 있으니 심심해서 미칠 것 같았거든요.


길을 가다가 마을아파트에 목련이라는 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본 적 있었습니다. 상당히 꽃잎이 하얀 것이 이뻤습니다. 그래서 전 그걸 보관하고 싶었습니다. 집에 있는 아무런 통을 가져와서 꽃잎을 보관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꽃잎이 갈라지면서 색이 갈색으로 변하면서 변질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꽃잎보다는 꽃 안에 있는 수술들을 보관하기로 하였습니다. 수술은 꽤 오랫동안 보관이 되었습니다. 꽃잎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 향기도 괜찮았었습니다. 어느 날 뚜껑을 열었는데 몽글몽글 하얀색 같은 것이 피어있었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곰팡이"라고 알고 계시지만 전 몰라서 그거를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향기를 맡다가 코로 들어갔었습니다.

지금 와서야 고백하지만 전 코로 곰팡이를 흡입한 사실을 그 당시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는 어린아이들 공통점으로 혼나기 싫어서였습니다. 그가 많이 무서웠거든요. 매번 뭔가 일을 만들었지만 지금까지 숨 잘 쉬고 후아후아 호흡이 잘되는 거 보면 제 몸이 곰팡이를 잘 이겨냈나 봅니다.


전 주로 아파트 친구들과 한창 유행했던 놀이를 하며 놀았었습니다. 진짜 밤이 되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놀다가 어머니께서 제 이름을 부르면서 "xx아 밥 먹자" 하시며 찾으러 오시곤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친구들이 친구들 어머니께서 본인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학생부터는 왜들 부모님이 본인들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춘기일까요?

잘못되거나 실수가 아니라, 그저 자식이름을 부르고픈 사랑스런 부모님의 마음일 텐데 말입니다.


제가 좋아했던 건 크게 4가지였습니다.


비 오는 날 놀이터 모래사장에서 하는 두꺼비 집짓기, 무조건 비 오는 날에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이 오면 땅이 축축하게 젖는 걸 넘어서 바로바로 무너지기에 흩뿌리듯이 오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다음에 물이 고인 걸로 손톱이 부러지고 까질 때까지 바닥을 파다 보면 흙이 아니라 약간 찰흙 같은 부분이 나오는데 그걸로 굴을 짓고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다 보면 동전이나 희귀한 물품들을 얻기도 합니다. 전 비 맞는 걸 좋아하였기에 매번 우비도 안 입고 파곤 했습니다.


다음으로 좋아했던 것은 약초 짓기였습니다. 아마 거의 대부분 해보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 아파트는 뒷산바로아래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언제든지 산에 갈 수 있었고 또한 풀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식물군집이 엄청났습니다. 그러면 페트병을 들고 와서 식물을 구석기시대처럼 두드려서 즙을 짜고 이 즙이 저희의 상처를 소독해 주고 치료해 줄 거라고 믿으면서 한없이 즙을 짜냈습니다. 한의사의 꿈이었을까요. 그러면서 운이 좋으면 산딸기도 따고, 운이 나쁘면 옻나무를 잘못 건드려서 옻에 옮기도 했었습니다. 그래도 저러한 경험들이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활동을 하면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풀은 건드리면 따갑고, 가시가 있고 어떤 건 진짜 먹어도 되는 걸 배웠으니깐요.

모든 지식은 배워두면 쓸 곳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비가 오고 난 후 산과 연결된 아파트 뒤에 있는 수로와 웅덩이에는 신기한 생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올챙이, 개구리,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도롱뇽이었습니다. 물에 젖은 도마뱀처럼 아주 귀엽게 생기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집에 들고 와서 하루동안 같이 놀다 내일 다시 풀어주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웅덩이에서 보냈습니다. 봐도 봐도 질리진 않지만 소중한 동물이기에 집에서 키우기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지남에 따라 환경 문제로 요새는 도롱뇽이 잘 보이지 않는다길래 새삼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자라나는 새싹들이 귀여운 생명체를 보지 못한다는 거니깐요.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햇빛이 비추는 것만큼 이쁜 건 많지 않습니다. 여치, 메뚜기, 매미, 사마귀, 거미, 등 수도 없는 곤충들과 벌레는 신기했습니다. 가끔 조카나 아이들이 어릴 때 뭐 하는지를 보면 다들 공부나 폰을 만지던데 자연적인 생태계를 안 보고 자람에 있어서는 조금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2D로 무엇인가를 접하는 것보다는 4D가 훨씬 재밌고 생생하기에 기억에 많이 남을 텐데 말입니다.


저런 호기심이 뭉치고 뭉쳐서 호기심 대마왕인 저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어떠냐고요?

지금은 자기소개에 작성했듯이 망가져버린 몸과 정신, 그리고 자신을 이해하려는 중이지만, 아직까지도 긍정적이고, 모르는 것과 신기한 것을 배우길 추구하며,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애기새처럼 모든 것을 궁금해하는 아이랍니다.


다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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