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추석연휴만큼 여유 있게 과거를 생각할 수 있는 날이 또 있을까 생각하며 잠시나마 얼음컵에 알로에를 부으며 회상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어느덧 전 3살이 되었습니다. 차분히 앉아서 책 읽는 것을 싫어하였고 글보다는 그림이 좋았기에 단순 책이 많았던 집에서 전 책을 읽는 것보다는 책을 벽돌처럼 쌓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 많던 책을 전 거의 읽지 않거나 어쩌면 한 권도 읽지 않았는데 누가 읽었을까요?
책을 읽기보다는 매번 저를 기준으로 책을 쌓아 저만의 공간을 만들곤 했습니다. 조그마한 제가 중간에 앉아서 앞쪽, 뒤쪽, 옆쪽으로 조선시대에 성벽을 쌓듯이 책을 쌓아가며 놀곤 그랬습니다. 좁은 공간이지만 거기에 앉아있으면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저희 집은 최근 들어 tv를 바꾸었지만, 그것도 어머니께서 집에 혼자 사셔서 tv 보는 낙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정사정을 하여서 드디어 바꾼 것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되게 오래된 브라운관 tv를 집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되게 이쁘고 이상적인 정육면체 모양이었습니다. 색깔은 당연히 검은색이었습니다.
유치원 갈 나이가 되기 전에 지금은 사라진 비디오관이지만 밖을 나갈 때마다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하나씩 빌려오시곤 하셨습니다. 전 비디오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시각적으로도 황홀하기도 했고 소리도 다양했으니깐요. 제가 워낙 산만했던 탓에 어머니께서는 tv긴 하지만 제가 집중하는 것보고 나름 다행이라고 생각하셨다곤 합니다.
이와 반대로 그는 비디오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바보상자"라는 타이틀이 커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그는 어느 아버지들처럼 활동적인걸 좋아하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강제로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무엇인가를 배우기보다는 스스로 컨택하며 배우시길 추구하셨습니다. 이는 아마도 아버지의 성장배경과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은 걸 수도 있습니다.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마친 후에는 운동장에 산책을 하러 가거나, 조그마한 손전등을 가지고 벌레를 잡으러가거나 또는 지금은 저의 손만 해진 공으로 가볍게 축구를 하러 가였습니다.
늦은 저녁이지만 이쁘게 저물어 가는 하늘, 한 번씩 이른 시간에 운동장에 가면 볼 수 있던 노을, 하루가 끝마치며 담소를 나누고 계시는 어르신들, 해맑게 뛰어노는 수많은 아이들과 부모님들.
그 시절의 그 감성이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서울에 온 이후로 가끔 한강공원에 가면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뭔가 "평화로움"은 잘 느끼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까지 있으니 진짜 아름답긴 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감성적이고 평화로운 저녁시간대 운동장을 표현한다면 딱 제가 옛날에 봤었던 그런 장면이 연출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운동장에서 저 멀리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제가 갑자기 글이 너무 감정적이 되었을까 생각하며, 다시 글을 이어 나가 보겠습니다. 제 감정에 솔직하기란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면서 아직 낯섦이 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멀리했었지만 조금씩 감정이란 친구랑 가까워지니 기분이 묘합니다. 이게 본인에게 "솔직함"이라는 것일까요?
어느덧 제가 조금 더 자라서 이제 유치원을 다니게 될 때쯤, 어머니께서는 제게 비디오를 갖다 놓으라고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2층문을 열고, 계단을 조심히 내려간 다음, 현관문을 열고, 차가 오나 안 오나 좌우를 살핀다음, 천천히 걸어가서, 좌회전한 다음, 마을마트를 지나서 신호등 파란불이 되길 기다렸다가 건넌 다음에 갔다 오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은 엄청 길었지만, 거의 코앞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수십 번은 왔다갔다한 길이었으니 익숙했습니다. 여러 번 가르쳐주신 다음 숙지한 후 저는 출발했습니다. 가르쳐주신 대로 무사히 비디오가게에 반납을 하고 집에 돌아오던 중에 "어서 집에 가야지" 하는 마음에 제가 차들 사이로 갑자기 튀어나왔었는데 키가 하도 작아서 빠르게 달려오던 트럭에 부딪혀서 날아갔었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묘사하길 애가 펑하고 날아갔다고 말씀하십니다.
깜짝 놀라신 운전사 아저씨는 내리셨고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저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오셨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하신 평소에 저를 이쁘게 대해주시던 가게 사장님은 집에 전화를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애가 울지도 않고 걸어왔다는 거에 많이 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행여나 아픈 거를 잘 못 느끼는 게 아닐까, 아니면 표현을 잘 못하는 게 아닐까 하였습니다.
글을 적으면서 생각해 보면 표현을 잘못했던 것 같습니다, 나름 아프긴 했는데 막 울정도로 아프지 않았으니깐요. 지금까지 운 적이 제 기억상으론, 태어났을 때 빼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만큼 차가운 심장을 가졌나 봅니다. 이 부분이 저에게도 그리고 많은 분들을 차갑게 만든 게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당연스럽게도 집은 큰일이 났었고 저는 병원으로 가서 머리 쪽 뼈가 조금 깨졌다고 했었습니다.
훗날 고등학생이 되고 제게 신경에 관련된 병이 발생하였을 때 의사 선생님께서는 이때가 원인이라고 아직까지 그러십니다. 저 때 이후로, 저는 말을 많이 더듬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쉽사리 고쳐지지도 않았지만 한 번씩 단어가 생각이 안 나거나, 같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더듬곤 하지만 사는데 지장은 없으니 그러려니 합니다. 저도 말하다 보면 답답함을 느끼는데 저와 얘기를 나누시는 분들은 더 답답함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어머니께서는 저한테 심부름을 잘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저의 부주의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를 잘 모르는 어린이였고, 운전사 아저씨도 당황스러워서 많이 놀라셨을 것이었고 무엇보다 저의 가족도 많이 속상하셨을 겁니다. 저의 실수였지,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저 사건이었으니깐요.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도 다시 한번 놀라셨을 운전아저씨나 어머니가 마음이 편해졌으면 합니다.
"별 탈 없이 잘 자랐으니깐요"
저는 저희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지 않고 적지만 제때는 엄청 많았습니다. 아이들도 많아서도 이유에 속하였지만 제가 다니는 유치원은 다른 주위 유치원보다 조금 더 활발한 활동도 많이 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라서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하는 저는 그 유치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도 저의 하나뿐인 누나처럼 가까운 유치원을 다니며 같이 등원하는 행복한 상상이 무너져서 속상했습니다.
유치원은 신기했습니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 남아있지만, 아침마다 선생님이 노란색 자동차로 태우러 오셨고, 조그마한 가방을 멘 채 노란색 유치원 복장을 입고 문이 열릴 때 차에 타면 저와 같은 반 아이들이 다들 앉아있었습니다. 정말 병아리들이 쫑알쫑알거린다고 표현하는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차로 20분 정도 달려서 유치원에 도착하면 벌레 잡기, 물총싸움, 한글공부, 여러 가지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전부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상당히 재밌고 좋았던 기억으로 남습니다.
전 제가 좋아하는 과일이름 중 하나인 반에 속해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스무 살이 되던 해, 추억을 상기시킬 겸 유치원 앨범을 열어봤었는데 유치원 다닐 때에는 누구인지도 몰랐던 다른 반 친구들이 성장한 지금 다 친구인 걸 보면 정말 자그마한 동네구나라는 걸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유치원 다녔던 애들이 3개 있는 초등학교를 그리고 2개 있는 중학교를 그리고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로 가니 다 알만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겐 유치원에서 만나서 지금까지도 친구인 거의 20년 지기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보다 항상 덩치가 컸었는데, 물론 지금은 비슷해졌지만, 저희는 항상 붙여 다녔습니다. 서로 닮지도 않았는데 마음만은 도전적이고, 활발하고, 긍정적이었거든요. 제가 체험활동을 가거나, 요리실습 같은 걸 할 때마다, 무거운 배추나, 과일 등과 같은 무거운 물품이 있을 때 친구의 조그마한 가방에 몰래몰래 제 물건을 조금씩 넣었었습니다. 그렇게 편하게 들고 와서는 내릴 때 다시 제가방에 옮겨 담고 그랬습니다.
가만히 적다 보니 제가 정말 나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나름 귀여운 것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었을까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나름 무난한 유치원 생활을 보냈었습니다. 비록 말을 많이 더듬어서 주위 친구들이 많이 놀리기도 했었지만, 이땐 놀림을 당하면 얼굴도 빨개져서 안 그래도 말을 잘 못했었는데 더 말을 못 하고 속상함도 있었지만, 오히려 이 덕분에 말을 더듬으시는 분들이나 표현에 어색하신 분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으니깐요. 더 성장한 기분이 듭니다.
뭐든지 득과 실은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때론 더듬을 수도 있지
괜찮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을을 친구랑 거느리던 중, 익숙했던 노란색자동차에 적힌 글자를 보았습니다. 제 유치원차량이었습니다. 15년이 넘게 지났는데 저희 앞에서 멈추시더니 창문이 스르르 열리며 제가 유치원 때 체육선생님이셨던 분이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지금은 체육선생님이 아니라 교장선생님이라고 하시면서 저희들의 이름까지 기억하시면서 소정의 용돈을 주시며 인사를 하시곤 가셨습니다. 되게 반가웠습니다. 아마 기억 속에서 거의 잊혀가는 어쩌면 잊어버린 분일 수도 있었는데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이 등원하고 하원했을 텐데 아직까지 저희의 이름을 기억하시는 걸 보면 그대로 컸거나 혹은 어지간한 말썽꾸러기였나 봅니다. 아직까지 선생님 눈에는 저희는 20살이 아닌, 유치원생으로 보였을지 않았을까요.
눈이 내릴 때쯤 유치원에선 동계운동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동계운동회 이야기가 나옴과 동시에 생각났던 것인데, 전 저희 유치원 겨울복장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면재질의 옷을 좋아하긴 하지만, 뭔가 살에 대이는 그 부들부들한 부드러운 촉감이 상당히 저의 기분을 행복하게 만들었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 과일이름을 기준으로 여러 학급이 있었고, 근처 체육시설을 빌려서 저녁시간에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들이 생각이 깊으셨던 분들이셨던 것 같습니다. 낮에 했으면 일하시는 부모님들은 참가가 힘드셨을 텐데, 저녁시간에 하면 부모님들이 일이 끝나고도 보러오실수있고 하루 일하시느라 힘드셨을텐데 행복하게 가족끼리 운동회를 즐기면서 힘듦을 훨훨 털 수 있으니깐요.
전 이어달리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걷는 걸 배우자마자 뛰는 것을 좋아했기에 뛰는 건 상당히 좋아했고 나름 잘 뛴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장난스럽게 말하는 말이지만 "전 걷는 게 비효율적이라서 뛴다"라고 하곤 한답니다. 그 정도로 뛰는 걸 좋아합니다. 무릎관절이 많이 닳았을 정도로요. 어릴 적 아버지와 운동장을 뛰며 끈기하나는 있었거든요. 전 제 반에서 밤톨이란 별명으로 참가했습니다. 아, 저의 별명은 태어날 땐 머리가 덥수룩한 사자머리였어서 더벅이였는데, 머리가 너무 길다 보니, 머리에 열을 방출을 잘 못하고, 그에 따라 잠을 잘 못 자서, 제가 머리를 빡빡 깎아버리는 습관이 들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옷과 머리에 신경을 안 쓰셨다고 합니다. 그저 옷이란 건 질이 좋든 나쁘든 입을 수 있음에 감사해했고, 머리카락은 뾰족뾰족해야 애가 행복해했다고 합니다. 항상 스포츠머리보다 더 짧게 깎았기에 이름이 밤톨이->고슴도치->조류xx->따식이 순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사회생활을 해야 하기에 머리를 길게 기르고 나름 큰돈을 들여서 머리를 고쳤지만, 그전까지는 딱 머리를 2번 길러보았습니다. 중학교 때 1번, 고등학교 때 1번.
이야기가 딴 길로 샌 것 같지만, 전 이어달리기에 나가서 아버지와 같은 팀으로 뛰며 1등을 거머 지웠습니다. 1등을 해서 행복했기보다는 뜀에 있어서 심장의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행복했습니다.
더 글을 쓰고 싶지만 다음 기억이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니기에 여기쯤에서 글을 마쳐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읽으시는 모든 분들 행복한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