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3 나를 다시 꺼내는 시간

조용한 아침, 나에게 차려준 한 끼

by 시에르

퇴사 후 가장 먼저 생긴 변화는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었다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하루 중 단 한 순간도 멈춰 있지 않았다.
지하철 안에서는 일정을 확인하고, 점심시간엔 업무 관련 뉴스를 훑고, 퇴근길엔 다시 미팅을 준비했다.
‘비워두는 시간은 불안한 시간’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반신욕은 예상치 못한 돌파구였다.
처음엔 단순히 몸이 찌뿌둥해서 물에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마음까지 천천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욕조 속에 몸을 담근 채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조금은 회복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욕실에 들어가기 전, 나는 마치 작은 의식을 치르듯 준비를 한다.

라벤더나 유칼립투스 향이 나는 입욕제를 넣고, 조명을 끄고, 향초에 불을 붙인다.

욕조 옆에는 작은 스피커를 두고, 오늘의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고른다.
로파이 재즈, 파도 소리, 피아노 연주.
간혹 아무것도 틀지 않고 고요 속에 머물 때도 있다.
그럴 땐 내 마음이 무슨 소리를 내는지 더 잘 들린다.

물이 목 아래까지 닿을 만큼 채워지고 나면,

나는 욕조 안에서 천천히 숨을 내쉰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 공간은 나만의 은신처가 된다.


반신욕 중에는 어쩐지 묻어두었던 생각들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혼자 견디느라 억눌렀던 감정, 아무 말 없이 삼켰던 서운함,
괜찮은 척 웃으며 넘겼던 장면들이 조용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

처음엔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는 게 두려웠다.
잊고 싶었던 기억을 또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감정들 역시 온전히 나의 일부라는 것을.

억누르거나 없애려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바라보는 연습.
그게 내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느 날은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누가 울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아, 나 참 많이 참았구나’ 싶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날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스스로에게 조금 더 다정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욕조 옆 작은 선반엔 항상 따뜻한 차를 올려둔다.

오늘은 캐모마일.
찻잔을 들어 입을 대면, 따뜻한 향이 천천히 입안에 퍼진다.
입으로는 차를 마시고, 귀로는 조용한 음악을 듣고,

눈으로는 반짝이는 수면을 바라보며, 마음은 천천히 가라앉는다.

욕실이라는 공간은 사실 아무것도 없는 곳인데,

이제는 나에게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가 되었다.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된 공간이자,
오랜만에 나를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예전의 나는 나 자신을 돌보는 법을 몰랐다.



늘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늘 무언가를 성취해야만 내 존재가 의미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나이고,
그 자체로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반신욕을 마치고 욕실 문을 열고 나올 때면,

몸이 가벼워지는 것보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게 더 먼저 느껴진다.
하루치의 불안, 기대, 후회 같은 것들이 따뜻한 물속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기분.
타올로 머리를 감싸고, 물기를 닦으며 나는 문득 혼잣말을 한다.


“오늘도 잘 견뎠어. 고마워.”

그 말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오직 나를 위한 인사다.
그 한마디가 하루를 마무리짓는 데 충분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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