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지키는 작은 약속들
하루를 온전히 ‘내 마음대로’ 살아본 적이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 삶엔 늘 타인의 시간표가 있었다.
학교, 직장, 회의, 약속, 알람.
늘 누군가가 짜놓은 리듬에 맞춰 움직이느라
정작 내가 원하는 속도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퇴사 후 맞이한 처음 몇 주는, 솔직히 말하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고,
일정표는 텅 비었고,
심지어 아침에 눈을 떠야 할 이유조차 흐릿해졌다.
달콤할 줄 알았던 여유는,
막상 다가오니 낯설고 무거웠다.
그 시기를 지나며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기’였다.
출근도 없고, 회의도 없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작은 약속을 만들었다.
“9시에 일어나자. 그 시간엔 햇살이 가장 예쁘니까.”
그 작은 시작이 생각보다 컸다.
하루를 ‘시작했다’는 감각이 생겼고,
그 시작이 내가 정한 시간이라는 사실이
어딘가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그다음으로 만든 건 아침 루틴이었다.
일어나서 침구를 정리하고,
창문을 열고 바람을 한 번 쐰다.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커피를 내리며 조용히 오늘 하루를 상상해본다.
이 일련의 과정은 거창하지 않다.
누군가에겐 너무 평범하고 심심한 루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아주 중요한 의식이다.
내가 내 삶을 ‘시작하는 방식’을 스스로 정하고 있다는 사실.
그건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된다.
요즘은 루틴을 더 확장해 나가고 있다.
오전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정오 즈음엔 브런치를 만든다.
점심 식사 후엔 20분 정도 눈을 붙이고,
오후엔 산책을 하거나, 좋아하는 영상을 보며 쉰다.
저녁엔 반신욕을 하고, 잠들기 전에는
그날 가장 좋았던 순간을 일기처럼 메모장에 적는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는다.
“그렇게 하루 루틴이 정해져 있으면 오히려 답답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그 반대로 느낀다.
루틴이 있으니 하루가 흐트러지지 않고,
그 안에서 나는 ‘나를 유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루틴은
누구의 지시에 따라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가 정한 기준도 아니고,
SNS에서 본 멋진 아침 루틴을 따라한 것도 아니다.
그냥, 지금의 내가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흐름을 따라 만든 것.
그래서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요즘은 루틴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이 한결 조용하고 단단해진다.
무언가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흐름 속에서
나는 ‘나를 돌보고 있다는 감각’을 얻는다.
예전에는 똑같은 하루가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 반복 속에서 작은 변화를 발견한다.
계란을 굽는 시간이 조금 더 여유로워졌고,
식탁 위에 꽃을 두는 습관이 생겼고,
커피 내리는 손길이 더 부드러워졌다.
그런 사소한 변화들이
오늘의 나를 어제보다 조금 더 다정하게 만든다.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삶이란, 거대한 결심이나 격한 변화로만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내가 반복하는 작은 행동, 내가 정한 하루의 흐름,
내가 나에게 지키는 약속.
그런 것들이 모여 삶을 조금씩 바꿔간다는 걸.
나만의 루틴은
내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작고 조용한 닻이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고, 때로는 정신없지만
적어도 내 하루만큼은
내가 설계하고, 내가 지키고, 내가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오늘, 꽤 괜찮은 하루를 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