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내면의 빛

칸나의 해안

보길도

by 꼬두람이




칸나의 해안


이강하




여기는 움직일수록 신비한 해안


신발을 내던지고 히잉 말울음소리 내며 내달린다 한참을 내달리다가 멈춘 그림자 위로 누군가의 이름을 쓴다 오! 놀라워라 축축한 모래 속에서 굵은 밤이 흘러나오다니 백합조개나 꼬막 같은 것이라야 하는데 왜 하필 밤일까


동그란 밤은 죽은 님을 무진장 사랑했지 님도 동그란 밤을 사랑했지 갑자기 님의 서해가 떠오른 맨발들, 등이 휘어져라 계속 밤을 파낸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 따라 밤들이 신났다 귀가 없는 밤은 더 신났다 그런데 먼저 캔 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얘야, 네가 밤을 까먹고 있니? 아이는 겁먹은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아이 얼굴은 어릴 적 누구를 닮았다 조금 슬픈 얼굴이었다 순간 나는 그 아이에게로 다가가 와락 껴안았다 마지막으로 캔 밤까지 손에 쥐어주면서 아이는 그제야 환해져서 포말 속으로 사라졌다 칸나가 핀 수평선 쪽으로


여행 이틀째 된 저물녘에는 문단에서 유명한 선배 한 분이 우리 텐트로 놀러 왔다 언니는 선배에게 커피를 타줬다 그대들 텐트 속에서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시니까 엄청 기분이 좋다며 작은 가방 옆에 있는 노트에 사인을 했다 아주 지저분한 노트에


왜 지저분한 노트 뒷장에 사인을 했냐고 물었더니 시를 더럽게 못 쓴다, 라고 말하면서 계속 웃었다 우리도 배꼽 잡고 따라 웃다가 어떤 거짓말까지 아름답게 노트에 기록한 날,


칸나가 핀다, 뜨거운 밤이 핀다.





─ 계간 『시에』 2023년 여름호 발표

─ 2024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 좋은 시 100選에 수록



2022년 '보길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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