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사실은 백조입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인가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남들과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
으레그렇듯 그 시절 고등학교엔 야간강제학습(말은 자율학습)이 있었고
내 주변의 모든 착한 친구들은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을 받들어
별 탈 없이 야자에 참여하곤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도 참 말이 안되었던 것이
자아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도 안 된 어린 청소년들을
학교에 반강제로 13시간씩 묶어놓는 일이었기에
(나는 지금에서야 그 행위가 학대라고 생각하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은 불만을 가지면서도 자신의 꿈을 위해, 미래를 위해
그 야간 강제학습에 별 반항 없이 따라갔고,
오직 미운 오리 새끼인 나만이
그 말도 안되는 제도 속에서 괴로워하며
자아를 찾기 위해 매일매일 끊임없는 일탈을 꿈꾸었던 것 같다.
정말 마음이 참을 수 없이 갑갑한 날에는
1미터 조금 넘는 하얗고 이쁜 펜스를 살포시 넘어가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면학실에서 보이던 우리 집 불빛에 참을 수 없이 수박이 먹고싶어져
(면학실 내 자리에서 하필 우리 집 거실이 보였다.)
수박을 꼭 먹어야 겠다며 책과 필기구를 그대로 내려놓고
몸만 집에 가기도 하였고,
그럴싸한 이유가 없는 날엔 그냥
화장실에 가는 척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슬며시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유유히 사라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겁도 없고 (지금도 없긴 하다)
대책도 없고 (역시나 지금도 없다)
그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나름 잘 나왔던 상위권의 내신을 개나 줘버리듯이 내팽겨쳐 버리고는
돌연 고2때부터 학교 시험에 직선의 아름다운 줄을 세워놓고서는
냅다 팔을 베고 누워 그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고야 만 것이다.
그랬던 내가, 지금이라고 무어가 크게 달라져 있을까
그로부터 딱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그 때의 기분으로 고스란히 돌아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이제는 그 시선에 의문조차 갖지 않은 채 체념하듯 오늘을 살아간다.
이제는 내 마음에, 내가 겪는 이 상태에 해명할 의지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럴 이유조차 없다.
결국 우리 모두는 다 다른,
본질적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설계된 각각의 개체이기에.
내가 노력한다고 오리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백조가 되긴 할까?
10년여 간 여러 가지 상황 속에 나 자신을 놓아봤던 나는 이제 안다.
나 자신을 바꿀 수 없노라고.
지난 세월간 무수히 오리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든 것은 긴장을 놓으면 원래대로 돌아가버릴
한 순간의 신기루일 뿐이었다고.
그리고 다짐한다.
'나는 꼭 백조가 되어야지.'
그리하여 나를 의문스레 쳐다보던 그 시선들에게 답해주어야 한다.
나는 사실 백조였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