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모음]
내가 사랑하지 않은 시절은 없었다

Katie Kim

by Katie


가을이 저물어가던 어느 날,

나는 오랜 지인인 선생님과 함께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평소 운전만 하다 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은 드물었다. 게다가 닫힌 공간에서는 종종 공황 증세가 찾아오곤 해서, 긴 시간 지하철을 탈 자신도 없었다. 타협안으로 평택역에 차를 세워두고 미리 예매한 무궁화호에 올랐다. 지하철보다 덜 답답하고, 창밖의 풍경을 보며 기차여행의 낭만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용산역에 내려 박물관으로 향하는 지하철로 갈아탔다. 다행히 한 정거장. 짧은 거리라 큰 부담 없이 탈 수 있었다. 오랜만의 서울 외출이었다. 수많은 인파 속을 걷다 보니 순간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다행히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약속 시간에 늦을까 박물관으로 향하는 긴 진입로를 서둘러 걸었다. 그때였다. 다정한 한 쌍의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두 남녀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재잘재잘,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연인은 부끄러움도 없이 길을 지나가며 입을 맞췄다. 인상을 찌푸리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들을 보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젊은 시절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대담한 행동을 하는 게 어디 저들뿐이겠는가. 인상을 쓰고 지나가던 사람들에게도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보는 순간, 잊고 있던 나의 한 계절이 불려 나왔다. 대학 시절, 처음 연애를 시작하고 남자 친구와 손을 잡고 함께 걷던 바로 그 시절이었다. 언젠가 친구들은 길을 걷는 우리를 보며 짓궂게 묻곤 했었다. "대체 둘이서 뭐가 그렇게 좋아서 서로 쳐다보고 웃느냐, 정신을 못 차리네. 뒤에서 놀라게 하려다 방해하기 싫어서 그냥 뒀다." 친구들의 장난스러운 핀잔을 들었을 때, 나는 꽤 당혹스러웠다.


당시의 나는 그를 그토록 깊이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잘 알지 못했다. 그저 같은 학생회에서 함께 일하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연인이 되었을 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눈물 흘리지도, 그가 떠날까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그런 간절하고 애달픈 사랑의 마음은 내 몫이 아니라고 여겼다.


어쩌다 술 취한 그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입을 맞추게 되었고, 그날부터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사귀고 나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게 맞는 걸까? 나는 정말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주변에서 다들 연애를 하니 나도 떠밀려서 하는 게 아닌가 싶어 헤어질까 고민도 많이 했다.


그런데 타인의 눈에 비친 나는 그와 함께 걷는 내내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고 한다. 내 안에서 느끼는 감정의 강도와 표정에 드러난 것이 달랐던 것이다. 그 간극이 그 시절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곤 했다.


눈앞의 두 사람에게서 풋내 나던 까마득한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 나는 여전히 '사랑'이라는 감정의 정확한 정의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저 어린 커플의 눈빛에 서린 따뜻함과 설렘, 입가에 번지는 미소만큼은 분명히 읽어낼 수 있다. 서로가 좋으면 어찌 그리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사소한 말에도 웃음이 터지는지. 할 말도 많고, 웃을 일도 많아진다.


나도 그를 정말 사랑했던가. 저들은 지금 서로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이든, 흐르는 시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모든 것은 기어이 퇴색할 텐데, 저들은 과연 영원히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부디 지금 누릴 수 있을 때, 더 많이 누리고 마음껏 즐기기를 바랬다.


약속 시간에 늦을까 걸음을 재촉해 곧 그들을 지나쳤다. 박물관으로 오르는 길, 예상보다 춥지 않은 포근한 가을 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기다리고 계실 지인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렀다.


오늘 만난 분은 인생의 선배이자 스승과도 같은 분이셨다. 내가 우울증과 공황장애, 불면증으로 가장 힘든 시기를 통과할 때, 나 스스로조차 나에 대한 희망을 놓았을 때, 유일하게 회복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시던 분이다.


우리는 네 시간 가까이 박물관을 누볐다. 수천 년의 시간을 머금은 유물들 사이를 거닐며 역사와 정치, 사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자잘한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끝없이 나누었다. 어느덧 창밖엔 어스름이 깔리고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바로 지하철을 타기엔 아쉬움이 남아, 우리는 박물관 건물 주변 야외 정원을 잠시 걷기로 했다. 잘 정돈된 가로수 아래로 갈색 낙엽들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그 풍경이 어찌나 운치 있던지, 나는 "정말 경치가 좋네요"라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감탄했다.


선생님은 나직이 말씀하셨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사는 게 진짜 행복이고 풍족한 거지요. 더 욕심을 낼 필요가 없어요. 이런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면서 살아야 해요." 나는 선생님의 말에 진심으로 동의했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치 아까 보았던 그 어린 연인들처럼 재잘재잘, 쉴 새 없이 떠들며 산책로를 걸었다.


그러다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며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느새 내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인과 함께 있는 게 아니더라도 나는 이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구나.


시선이 머문 곳에는 낮은 돌담이 있었고, 그 위로 나뭇가지 하나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유려하게 담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어우러짐이 퍽 아름다워 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뷰파인더 안으로 돌담의 풍경과 함께 앞서 걷던 선생님의 뒷모습을 조심스레 담았다. 사진 찍히는 일이 어색하신지, 선생님은 수줍게 소녀처럼 웃으셨다. 그분의 주름진 눈가에도 쑥스러움이 섞인, 맑고 잔잔한 행복이 번져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미소를 나누며 산책을 즐겼다. 저녁 식사 후, 서울역에서 헤어졌다. 다음에 만날 날을 약속하고. 오랜 벗을 배웅하고, 나는 겨우 구한 입석표를 손에 쥔 채 대합실 의자에 앉았다.


내 옆자리에 또 다른 앳된 커플이 앉았다. 그들은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휴대전화 속 영상을 들여다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여자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고, 여자는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그에게 살짝 어깨를 기댄다. 얼핏 보아도 20대의 풋풋한 청춘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기억 저편의 한 장면이 겹쳐졌다. 아주 오래전, 서로 가까워질 듯 말 듯 하던 남자와 함께 정동진 일출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미국 언어 연수를 가기 전, 그 일이 과연 내가 해야 할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불안했었다. 간다고 말했고, 모든 절차도 다 끝나가는데 갑자기 두려워졌다. 망설이든 나를 격려해 주든 그는 나에게 정동진 일출 여행을 제안했다. 태양이 떠오르는 걸 보면서 마음을 다지면 용기가 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간 여행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도 저렇게 기차를 기다리며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종종 그때가 떠오르면 혼자 질문을 하곤 했었다.


나는 그를 좋아했을까?

그는 나를 좋아했을까?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누며 그에게 기대었을 때 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미국행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처럼, 그에 대한 마음도 확신할 수 없었다. 불안함만 남은 여행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정동진에서 보았던 새벽의 일출. 바다 위에 조금씩 머리를 내밀던 태양에 시선을 빼앗기며 한참을 바라봤다. 그 태양을 보면서 나의 삶이 조금은 더 나아지기를, 조금만 더 보통의 사람과 같아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희망보다는 비참함이 더 컸던 순간이었다. 그와 잡은 손은 따뜻했지만 내 마음속의 한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까짓 남녀 간의 연정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이미 지나간 세월 속에서 사랑의 흔적을 뒤져 보아서 뭐 하겠는가. 너무 낡고 오래된 기억이 참 하찮게 느껴져, 나는 피식 웃었다.


그 시절에 나는 그렇게 참 삭막했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와 함께 손을 잡고 그의 어깨에 기대어 기차를 기다리던 그 순간만은 기억한다. 그런 짧은 순간들은 그래도 나의 기억에 남아 가끔은 미소 짓게 만든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렇게 그 커플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기억의 창고를 뒤적이며 미소 짓고 있는데, 기차가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울렸다. 평택으로 돌아갈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선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기차 안으로 들어갔다. 서 있을 자리 하나를 잡고 창가에 기댔다.


평택으로 돌아가면 짧은 서울 여행이 끝난다. 옛 유물들을 보며 내가 살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를 돌아보듯, 오늘은 두 젊은 커플 덕에 나의 옛날을 되짚어본다.


모두 지나간 이야기고 모두 유물처럼 기억의 박물관에 두어야 할 것들이다. 그 시절엔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그렇게 잃어버리다 후회하던 것이 이제는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그래, 그 시절. 나는 내가 삭막하고 비참한 사막과 같은 시간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구나.


나는 그렇게 혼자 미소를 지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창밖으로 서울역의 불빛이 하나둘 멀어져 간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또 하나의 풍경을 내 가슴속에 담는다. 어둠 속을 달리는 기차 안, 창문에 비친 내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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