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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와거울 Jun 04. 2024

착륙

  오늘은 런던으로 떠나기 전에 수지와 만나기로 한 날이다. 저녁 장소는 종로 인터내쇼날 파이낸스 센터옆 Spanew. 취리히 증권에 다닐 때부터 애용한 이태리 식당이다. 피자 그림이 그려진 메뉴판을 보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신장개업 스파인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은 아직도 이름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나폴리안 피자가 예술이었다.


  그런데 늦었다.


  퇴근시간 전 BM 모터스 코리아 재무팀장이랑 실랑이가 있었다. 전화 상으로만 상대하고 만나본 적이 없는 고객이었다. 솔직히 거래량이 너무 적고 불규칙적이어서 나 같은 주니어마저 기피하는 고객이었다. 그런데 그가 저번 달 구두로 합의한 외환옵션의 행사가격이 계약서에 쓰여있는 숫자와 다르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환장할 따름 아닌가. 그럼 애당초부터 계약서라는 컨셉은 왜 존재하는 걸까? 결국 DK 사무실로까지 찾아왔다. 통화 녹취록을 들어보자고 했다.


  로비로 마중 나갔다. 왠지 낯이 많이 익었다. BM 코리아 재무팀장도 말없이 나를 한참 쳐다봤다.


  “금요일 파티 때 직접 인사 못 드려서 죄송해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니에요, 저야말로요. 그런데 세진 씨. 혹시 금요일에 파티 끝나고 이태원 클럽에 갔었어요?”


  이태원 클럽이란 단어는 좀 포괄적이었다.. 이태원이 최근 핫해지면서 스트레이트 클럽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 네, G-Spot*이요.”

  *이태원의 유명한 게이 나이트클럽


  그가 얼굴을 슬쩍 붉혔다.


  “그렇구나. 저도 거기 있었어요. 세진 씨 어떤 여자랑 있기에 눈에 띄더라고요.."


  내가 끌고 간 수지다. 본인은 홍일점이라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흑일점이었다. 정말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안보였으며 치근덕대지 않았다. 수지는 오히려 게이클럽에 가는 걸 좋아했다. 주위를 신경 안 쓰고 겨드랑이에 땀 뻘뻘 흘리며 춤을 위한 춤을 마음껏 출 수 있으니까. 수지는 춤출 때 모르는 남자들이 말을 거는 걸 싫어하는 편이다. 그리고 사랑타령 K팝으로부터 해방된 이국적인 음악들로 가득 찬 공간이기도 했고.


  “세진 씨 싱글이에요?”


  아니 이거 뭐지? 녹음 파일 우선 듣고 옵션가격 시비 수습하는 게 수순 아닐까. 그런데 정식으로 처음 대면하는 팀장에 호감이 들었다. 더블브레스트 민무늬 네이비 양복에 싱글 몽크스트랩 (monk strap) 버클이 달린 블랙 구두를 멋있게 신고 있었다. 샨퉁 실크 (표면이 살짝 거친 중국 산둥성 유래 실크; 근래에는 웨딩드레스 재질로 많이 쓰임) 소재 보라색 줄무늬 넥타이도 조화로웠다. 구두 위로 진녹색 바탕에 그레이 미니 땡땡이가 새겨진 양말도 살짝 자태를 드러냈다.


  “네. 팀장님은요?”


  ‘아니, 난 왜 되물었지?’ 그냥 즉흥적인 반응이었던 것 같다.


  “응. 최근에 다시 싱글이지.” 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뗬다.


  “팀장님. 저희 서버실로 잠깐 따라와 주세요.”


  IT 기사님은 밀실 같은 작은 방에 간이 의자 한 개를 펼쳐 주셨다. 좀 낮았다. 한 명만 앉고 그 누군가의 무릎 위에 다른 사람이 앉으라는 뜻인가? 본의 아니었겠지만 은근 에로틱한 발상이었다. 팀장이 덥석 앉고 자켓을 등받이에 걸쳤다. 나는 그의 옆에 서있었다. 그의 눈높이에 내 엉덩이가 위치해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리고 우리는 6월 말 통화 녹음 파일을 되돌려 듣기 시작했다. 우리의 통화 녹음을 찾았다. 내 목소리가 너무 느끼하게 들려 눈살을 찌푸렸다. 대화 내역을 청취하고 그가 틀렸음을 확인했다. 안도와 함께 텐션이 사그라들었다. 오히려 이 상황까지 오게끔 일을 벌여버린 팀장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냥 수지를 만나러 빨리 저녁 장소로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세진 씨, 미안. 번거롭게 해서.. “


  “아니에요 팀장님. 이런 경우 있을 수 있죠..”


  ‘사실 이런 경우 처음이다.’


  “미안해서 밥이라도 사고 싶은데.. 오늘 저녁 뭐하지? 내가 좋아하는 근처 비스트로에 같이 갈래?”


  생각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나와 당황했다. 그래, 조금은 이해한다. 커밍아웃한 게이들이 거의 전무한 이 사회에서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기란 정말 하늘의 별따기니까. 혹시라도 삘이 오는 상대를 마주치게 되면 스치듯 지나가는 그 순간을 무조건 잡으려고 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사실 선약이 있어요.. 그리고 저 내일모레 런던가요.”


  나는 말뚝을 박았다. 핑계가 아니라 팩트였다. 관계의 지속 발전은 현 상황에서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반말을 하다니.. 내 타입이 아니다.


  “그럼 나중에 돌아오면 연락 줘요.”


  연락은 무슨. 그러나 클라이언트니 최대한 웃으면서 어색하게 조금 오래 악수를 했다. 그의 손이 땀이 차 있어서 찝찝했다. 손을 빼고 싶었지만, 그는 얼른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예의를 차리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 떠나가는 그의 뒤태를 본 후 급히 회사에서 뛰쳐나왔다. 이럴 때는 잠시 투자은행 영업직에 회의가 든다. 그렇지만. 초봉이 1억이니까. 보너스까지 더하면 뭐.. 그래. 돈이 적성이라 하지 않더냐. 나는 수지가 있는 Spanew로 달렸다.



  “많이 기다렸어? 늦어서 미안.."


  “뭘, 네가 항상 이렇지.”


  “응. 우리 빨리 시키자. 내가 살게, 배 고프지?”하고 나는 와인 리스트를 훑었다.


  “자 여기.” 그러면서 수지는 나에게 가느다란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이거 뭐야?”


  “선물. 저번에 선물 준다고 했잖아. 너 런던 가면 필요할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해졌다. 항상 받아 처먹고만 사는 한심한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가 내민 건 명품 편집숍의 넥타이 박스였다. 회색 박스의 빨강 리본을 풀었다. 진청색 실크 소재의 드리스 반 노튼 (Dries Van Noten) 넥타이여였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벨기에 디자이너이다. 그의 옷은 로고가 1도 없어서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웠다. 다만 원단 프린트는 다른 세계 차원이었다. 어떻게 수지는 내 취향을 읽었을까. 넥타이 표면에는 남녀가 나체로 춤추는 모습의 희미한 실루엣이 빨강 실 자수로 꿰매져 있었다. 마티스의 목욕하며 강강술래 같은 춤을 추는 여인들처첨 경쾌하고 자유로웠다. 뼛속까지 마음에 들었다. 수지에게는 부담스러운 지출이었을 거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뭔가 미안했다.


  “야.. 고마워. 진짜 잘 멜께. 이거 너무 마음에 들어. 진심.”


  지금처럼 단둘이 식당에서 마주 보며 선물을 받은 적이 또 한 번 있었다. 입대하기 전이었다. 아직도 그때 대화가 생생하다. 대학교 2학년 때 우리는 주변사람들이 사귀는 사이로 오해할 정도로 붙어 다녔다. 같이 있을 때 재미있고 편했다. 수지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수지가 친구 이상의 관계를 바란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논산 훈련소로 떠나기 전 날 우리는 연희대 근처 중국집, 복성각에서 만났다. 수지는 작고 길쭉한 박스를 나에게 건넸다. 안에는 내가 지금도 차고 있는 네이비색 스와치 시계가 들어있었다. 날짜 기능까지 있어 완벽했다.


  “군대 가면 날이 가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에 무뎌진데. 이 시계 차고 하루하루 보람하게 생활하라고. 최소한 무슨 요일인지는 알고 지내야지..”


  그리고 그녀는 내 마음을 찌르는 말을 했다.


  “나름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사실, 네 속마음을 잘 모르겠어. 그래도 나는 너랑 같이 있으면 정말 즐겁고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엄청 설레거나 두근거리지 않아도 같이 있을 때 즐거운 것만으로도 사귈 수 있는 것 같아. 우리 거의 매일 만나서 수다 떠는데 이 정도로 잘 맞으면 우리 좀 특별한 사이인 거 아닐까.”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관계를 모호하게 하고 입대하기 싫었다. 나는 오랫동안 준비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연습해 온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맞아, 너는 내겐 특별한 친구지. 그동안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좀 더 일찌감치 했어야 됐는데.. 어려워서..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처음 만났을 때 10년 된 친구처럼 반가웠는데 10년 후에 보면 왠지 처음 만난 사람 같은 느낌이 들 것 같다고. 내가 가끔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게 행동한 건.. 사실은.."


  수지에게 몇 번씩이나 커밍아웃을 하려고 했다. 그녀는 무조건 이해해 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말하려니 말이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마치 ‘게이’라는 단어가 생긴 모습처럼 굴곡이 있어서 목구멍에 끼어있기라도 한 걸까.. 꺼내는 것만으로 목구멍에 상처를 내듯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내가 게이라서 너한테 모든 이야기를 해주기가 어려웠어.."


 코 끝이 찡했다. 수치스럽지는 않았지만 말하는 게 왜 이토록 힘들었을까. 아니면 수치심이 너무 깊숙이 억눌려 느껴질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걸까. 그동안 진짜 나를 너무 홀대하고 외면해 온 것 같았다. 나와의 맞대면을 나는 얼마나 기피하고 살아온 걸까.


  “아.. 세진아..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 말해줘서 정말 고맙다.. 이제 모든 게 좀 이해가 되는 것 같아..”


  그녀의 첫마디였다. 힘들었겠다는 평범한 말 한마디가 그렇게 큰 위안이 될 줄 몰랐다. 그리고 수지는 이제야 비로소 나의 과거 행동들이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한참 동안 끄덕였다.


  그 당시 상황을 회상하니 목이 메기 시작했다. 그때는 수지에게 시계를 받고 군대를 갔고, 이번에는 넥타이를 받고 런던으로 간다. 왠지 인생의 터닝포인트마다 그녀에게 응원을 받는 기분이 든다.


  “바롤로 (Barolo) 시켜도 괜찮지?”


  “응, 네가 사는 건데 먹고 싶은 거 시켜~친구야.”




  드디어 런던으로 DK 연수를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수학의 정석> 앞에 붙여두었던 런던, 사진 속의 그 도시가 이제 곧 내가 일하는 곳이 된다. 물론 반년 정도겠지만. 트렁크는 간밤에 다 싸놓았다. 앞으로 거의 반년동안 쓸 나의 인생템들이 트렁크 하나로 압축된다는 게 신기했다. 콜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잊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한번 더 체크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홀로 계실 할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나 없이도 잘 지내실 수 있을까 여러 번 고민했다. 하지만 냉정히 돌이켜보면 상황은 반대였다. 나야말로 할머니 없이는 못 살았을 거다.



  할머니와 가까운 사이다. 첫 손자이고 태어나자마자 외교관인 아버지가 파리로 발령받는 바람에 할머니가 생애 첫 몇 개월을 보살펴 주셨다. 어렸을 때 사진을 보면 할머니가 등나무 바구니 하나 달랑 들고 파리 오를리 공항 입국장에서 찍힌 사진이 있다. 바구니 안에는 바게트 하나 들어있을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그 안에 세상모른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부모님의 콜로 할머니가 서울-파리 택배기사 된 셈이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부모님은 다시 세네갈로 발령을 받으셨다. 갓난아기에게 말라리아는 치명적일 수 있어 나는 다시 서울로 보내졌다. 그리고 1년이 지나서 할머니와 이모가 나를 데리고 김포-하네다-파리-다카르 (세네갈 수도) 대장정을 밟게 된다. 내가 크고 난 뒤 두 분은 말씀하셨다. 쌀쌀한 파리 오를리 공항에서 먹은 갓 구운 크로와상과 블랙커피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고.


  연희대 입학 후 부모님이 칠레로 발령받으셔서 나는 다시 할머니 곁에서 지냈다. 그리고 지금은 부모님이 스위스에 계셔서 또 한 번 할머니의 따스한 손길 아래서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동안 할머니의 희생과 지극정성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할머니께서 아파트 현관까지 나와 같이 콜택시를 기다려주셨다. 할머니께서 두 손으로 내 오른손을 꽉 움켜쥐고 말씀하셨다.


  “세진아. 조심히 갔다 와. 가끔씩 할머니한테 소식 알려주고.”


  나는 할머니를 꼭 껴안아드렸다. 택시를 탄 후 창문을 내리고 할머니께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할머니의 희미해지는 미소를 등에 업은 채 인천으로 달렸다.




  지금 나는 런던 하이드 파크 (Hyde Park) 상공을 날고 있다. 기장 말에 의하면 오늘은 50년 만에 최고로 높은 7월 기온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푸르스름해야 할 공원의 잔디는 추수를 앞둔 밀밭마냥 누렇게 익어있었다. 일광욕을 즐기는 개미 같은 사람들로 공원은 분주해 보였다. 파일럿들에게 자주 주어지는 앙케이트가 있다. 착륙할 때 어느 도시의 모습이 가장 감동적이냐고. 런던은 꾸준히 앙케이트의 상위권에 등장한다.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뉴욕처럼 드라마틱하지도, 파리처럼 우아하지도, 도쿄처럼 밀도 넘치지 않지만 뭔가 아기자기하고 앙증맞다. 하늘 위에서 피터팬이 웬디의 손을 잡고 내려다봤을 웨스트 런던의 광경이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로얄 알버트 홀 (Royal Albert Hall) 공연장을 지나 해로즈 (Harrods) 백화점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덜커덕-비행기 바퀴가 나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깜짝할 사이 히드로 공항에 착륙했다. 두려움과 설렘으로 혼재된 미래가 창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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