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연수기간 동안 내 한신카드 온라인 사용 내역서는 온통 바이름들로 범벅되기 시작했다. Sketch. Smiths of Smithfield. Sanderson Hotel. Soho House.. 그리고 소호의 명물 게이 나이트 Shadow Lounge. 유난히 ‘S’ 자로 시작하는 이름들이 많았다. 내 행적을 날짜와 시간대별로 거슬러올라 추적하기에 충분했다.
‘야 손세진, 너 교육은 제대로나 받고 있는 거니?’
봉상무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으나 눌러버렸다. 너무 뻔한 잔소리를 굳이 지어낼 필요가 없지 않으냐.
그런데 내가 런던타임을 좀 과하게 즐기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도대체 금융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러 온 건지 아니면 연희대 학부 때 못다 한 음주가무의 미련을 이제 와서야 손 떨리는 환율 감수하며 이국땅에서 푸는 건지. 유희 욕구의 근원이 뭐든 런던의 공기에는 자신감 넘치는 전류가 흘렀고 우리는 들뜬 나머지 감전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파운드-달러 환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상승하더니 결국 1파운드당 1.8달러까지 달해있었고 뉴욕 같은 미국 도시들은 싼 맛에 쇼핑이나 즐기러 가는 주말치기 행선지로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몇 년 뒤에 닥칠 세계금융위기와 브렉시트 영향으로 런던은 가파른 내리막길에 진입해 급격히 맛 가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나를 포함한 해외에서 온 연수생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항상 현금이 부족했다. 곰곰이 따져보면 연수기간 내내 행사장에서 아침과 점심이 제공되 교통비와 간단한 저녁식사 비용 이외? 크게 들어갈 돈은 없었다. 하지만 놀 때 지출되는 자질구레한 돈은 전부 현금결제였다. 클럽을 입장할 때, 지하 바카운터에서 술을 주문할 때, 새벽에 택시 탈 때, 늦은 일요일밤 구멍가게에서 혼술용 맥주 한 캔 살 때도 현금으로 결제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럴싸한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어쩌면 이래서 우리가 지갑 깨지는 레스토랑바 아니면 호텔바를 주무대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국제 시중은행들 간의 폐쇄적인 호환성이었다. 현지 현금인출기에서 내 한신은행에 있는 예금을 터치하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조금 극단적인 케이스이긴 하나 리사는 크리스토프가 카지노에 가서 신용카드로 포커칩 몇백 파운드어치를 구매한 다음에 이를 현금으로 교환했다고 웃으며 토로했다. 그의 절박한 꼼수를 보아 당연 예금 계좌 잔액은 제로였을 거고 유럽의 카드 현금서비스 비용도 한국처럼 만만치 않았을 거다. 어쩌면 독일인답게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걸 수도. 참고로 크리스토프는 나중에 어느 런던 주재 중동계 은행의 CEO가 된다.
다행히 오늘 저녁에 가게 될 파티의 스폰서는 DK였다. 연수기간 한 달 기념 파티였다. 별의별 이유거리가 다 있지 않나. 연말 되면 다음 해 예산 삭감을 면모 하기 위해 서울 시내의 멀쩡한 인도가 보수 수리공사 아수라장으로 뒤집히듯 여기서도 연수 프로그램을 위해 할당된 버젯을 모조리 써버리기 위해 이러한 파티가 개최되는 걸까? 어쨌든 내부적 취지는 불문하고 카드도 현금도 동전도 지참할 필요 없이 ‘써머 비치 테마’에 걸맞은 복장만 준비하면 됐다. 안 그래도 트렁크에 꾸역꾸역 쑤셔 넣은 빈티지 실크 하와이안 반팔 셔츠 언제 입어보나 싶었는데.. 나는 여름에 바다 건널 여행이 있으면 항상 반소매 하와이안 셔츠를 챙겨갔다. 데이웨어에서 이브닝웨어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기에 딱이었다. 낮에는 허리끈 달린 허름한 반바지와 구멍 뚫린 검은 가죽 파라부트 (Paraboot) 샌들에 매치시키고, 저녁에는 아무런 면바지에 진한 웜톤색상의 어깨 뽕 없는 면자켓을 걸쳐주고 밑창이 닳아 버릴 만큼 닳아버린 컨버스 (Converse) 단화를 신어주면 멋을 부린 듯 만 듯, 신경을 쓴 듯 만듯한 꾸안꾸 각이 나온다. 이태리어로 이러한 설정된 태연함을 ‘스프레짜투라’ (sprezzatura)라 일컫는다. 여기에 머리에 기름칠하고 금목걸이, 금팔찌, 도금된 쌍G 장식 버클이 달린 벨트를 칭칭 휘감고 눈부실 정도로 하얀 면바지에 양말 없이 로퍼 구두를 신으면 일명 ‘유로 트래쉬’ (Eurotrash; 유러피언 쓰레기) 룩으로 전락해 버리는 수가 있다. 영국과 미국사람들이 로고에 목숨 걸면서 지나치게 천박 화려하게 꾸며 본인 의도와는 반대로 싼 티 나는 특정 유럽 본토 원주민들을 비하하는 용어다. 밀라노 명품 쇼핑의 메카 비아 몬테나폴레오네 (Via Montenapoleone) 길에 가보면 알 거다. 흐린 주말 아침에도 금테 선글라스 낀 이런 장르의 사람들과 사방에서 터지는 ‘Ciao bella!’ (챠오 벨라; 안녕, 아름다운 당신)의 서라운드 사운드와 함께 가도가 미어터진다.
금요일 오후이고 저녁에 있을 파티 때문인지라 연수생들은 제대로 집중 안 하는 분위기였다. 여기저기서 수군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자율 곡선 이론을 설명하는 베르나르의 표정이 점점 썩어 들어가기 시작함과 동시에 연수생들은 오늘 저녁 패션 영감을 인터넷에서 열심히 검색하고 있었다. 만약에 호텔 지하 복도에서 헤매는 외부인이 볼룸을 잘못 입장해 노트북 스크린 100대가 켜진 광경을 뒷열 저 멀리서 목격했다면 아마 무슨 여행사 직원 교육에 와있는 줄 알았을 거다. 에메랄드 빛깔의 바다, 백사장, 야자수, 코코넛, 서핑, 수영복 입은 젊은 남녀커플등 남국적인 정서를 느끼기에 충분한 사진들이 상당수 노트북들의 메인 검색창을 장식하고 있었다.
갑자기 메일 수신 알림이 떴다. 발신자는 Matchmaker였다.
‘이거 뭐지..’
잠잠하던 주변에서 마우스 클릭 소리가 연속으로 들리는 걸 보아 아마 연수생 전원이 수신했나 보다. 메일 제목을 읽었다.
“Hi! Matchmaker invites you to take a personality survey.”
(하이! 매치메이커 성격 설문에 초대합니다.)
서른 개의 사지선다형 문항과 몇 개의 단답형 질문으로 이루어진 어느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처럼 보이는 플래트폼의 앙케이트 조사였다.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내 이상형과 매치라도 시켜줄까나. 옆에서도 인드라의 거슬릴 정도로 공격적인 클릭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나란히 앉아 별생각 없이 성격 유추용 질문들을 후다닥 답하고 있었다. 끝날 무렵 나타난 최종 질문 두 개가 단도직입적이었다.
29. Do you currently have a love interest?
(현재 썸 타고 있는 상대가 있나요?)
Yes □
No □
30. If yes, what is their name?
(있다면 이름이 뭔가요?)
______
굳이 주관식으로 왜 이런 걸 다 물어보는 걸까? 이름 획수로 현재 썸 타는 상대와의 궁합까지 점쳐주는 걸까? 예스칸을 찍고 밑에 ‘Wells’라고 기입했다. 그리고 이메일로 분석결과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웬걸. 리사로부터 곧바로 메일 한통이 날아왔다.
“Who is Wells?”
(웰즈가 누구야?)
씨. 이. 발. 앙케이트 조사는 그녀의 수작이었다. 무슨 고등학생도 아니고 이런 장난을 왜 치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이리 순진한 건지. 두피가 화끈거렸다. 이렇게 처참하게 커밍아웃당한 적은 처음이다. 내 정체성을 숨겨둔 장롱을 누군가가 도끼로 깨부수는 느낌이었다. 중앙 통로 넘어 볼룸 왼편에 앉아있는 리사를 노려봤다. 그녀는 한쪽손 검지 끝마디는 입술에 기댄 채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손가락 시늉을 하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당분간 그녀와 절교다. 내 고딩스러운 대처법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이 복합적인 불안 감정 상태. 말로 형용하기 무리다.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못마땅해한 베르나르는 아랫입술을 물며 신경질 섞인 말투로 휴식 타임을 갖자 하고 강단에서 내려왔다. 볼룸 비상구로 튀고 있는 리사의 뒤태가 확장된 동공에 캡처됐다. 짐작컨대 그녀의 정신연령을 보아하니 분명 입도 쌀 거다. 나에게 커밍아웃이란 항상 내 페이스 맞춰, 알리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조심스럽게 꺼내는 극히 개인적인 제스처였기에 그녀의 경거망동한 애티튜드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Did you get the survey results yet?”
(설문 결과받았어?)
“No.”
(아니.)
“You look pissed. What’s wrong?”
열 뻗쳤냐? 무슨 일 있어?
“There’s something I want to tell you.”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
“Uhmm. Okay..?”
(어.. 그래..?)
“I’ve been meaning to tell you this. You see. Well..”
(그전부터 너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뭐냐면. 그게 있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Ughh.. I’m gay.”
(어.. 나 게이야.)
“Phew. I thought you were going to say you liked me. You know, I get that alot.”
(휴. 네가 나 좋아한다고 말할 줄 알았어. 그 소리 많이 듣거든.)
“Huh? What?”
(뭐? 뭐라고?)
“Anyway, don’t take it personally but you’re not by type. Do you want to grab coffee?”
(어쨌든 넌 내 스타일 아니야. 이 말에 괜히 상처받지 말고. 커피 마시러 갈래?)
리사와 인드라. 둘 중에 누가 더 짜증 났는지 모르겠다.
젖은 머리를 타올로 말리며 김에 찬 거울을 직시했다.
그토록 원하던 런던바닥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음에도 왜 이토록 나에겐 정체성을 밝히는 게 여전히 난제였던 걸까? 첫 타로 수지한테 이야기 한 다음 알프스 돌로마이트 산맥처럼 고독하고 험해 보이는 커밍아웃이라는 악산을 스키 양날로 마찰 없이, 매끄럽게, 둥글둥글 카빙하며 하강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완전 착각 속에 빠져있었다. 서양은 폐쇄적인 한국에 비해 자유분방하고 공공연하게 게이임을 밝힌 연예인, 아티스트, 학계인, 정치인, 비즈니스맨이 이미 오래전 사회 구서구석에 포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연스럽게 ‘아이앰 게이’라는 세 단어를 내뱉는 게 어려울까? 연습 부족 탓인가? 점점 개는 거울을 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아 맞다. 태닝.’
서양 화공약품계가 동양 경쟁자들에 어퍼컷을 날리며 단숨에 KO승을 거두는 제품 분야가 딱 두 군데 있다. 겨드랑이 암흑지대에서 올라오는 악취를 잡아주는 데오드란트 스틱과 퀵 셀프태닝 로션. 원하는 부위에 슥슥 바르면 금세 카리브해 바캉스를 갔다 온 것처럼 피부가 건강한 구릿빛으로 그을려져 있다. 광대뼈 부위 중심으로 얼굴, 목, 목덜미 그리고 손등에 조심히 문질러 발랐다. 함정은 땀 하고 섞이면 닿는 데마다 자국이 남고 특히 면에 묻었을 때 잘 안 지워진다는 점이다. 오늘 격렬하게 춤추면 드라이 비용으로 파산하는 수가 있다. 댄스 무대는 웬만하면 피하자. 그리고 자켓 절대도 못 벗는다. 어릴 적 사촌동생 장난감 빠께스에서 잡히는 대로 막 조립한 레고 인간처럼 노랑팔과 브라운손이 일체가 되는 상황- 절대 만들 수 없다. 손등에 태닝 로션 괜히 발랐나 싶었다..
비치 파티가 열리는 장소는 도이쳐 크레딧 사무실과 가까운 Great Eastern Hotel이다. 평범한 4성급 호텔로 생겼으나 Mezzanine층 (로비에서 계단으로 연결되는 천장 낮은 중간층)으로 올라간 후 도이쳐 크레딧 로고가 새겨진 안내판을 따라갔다. 분명 비치 파티 테마라고 했는데 도저히 그런 트로피칼 환타지가 연출될 장소가 아니었다. 어쨌든 보물찾기 안내판을 줄줄 계속 따라갔다. 두툼한 가죽으로 덮싸인 방음 문하나 통과했더니 낮은 천장이 사라지면서 유리지붕까지 뻥 뚫린 아트리움이 나타났다. 귓청이 울려댔다. 빠르게 뛰는 베이스 소음으로 스피커가 찢어질 것 같았다. 멜로디는 아예 접수가 안되고 비트 사이사이로 무국적스러운 중얼거림만 대강 들렸다. 웨스트 코스트 갱스터 랩인지, 천안 호두 휴게소 이박사 뽕인지 분별이 안 갔고 심장은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아트리움 정가운데는 가지각색의 수영튜브와 리얼 코코넛이 널브러진 백사장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10미터 높이의 야자수 세 그루가 바비 핫핑크 업라이트를 받고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정말 리조트 이브닝 파티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백사장 위의 연수생들은 이미 샴페인에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벌써 남녀들은 쌍을 이루며 몸을 감싼 얇은 천을 비벼대고 있었다. 이래서 직장 불륜은 필연인가? 하루 반나절을 직장 동료랑 보내니 회사 남편, 회사 와이프 같은 웃기지도 않은, 반진담 섞인 신조어가 괜히 태어나는 게 아니다.
리사가 왔는지 공간을 스캔했다. 서로 머리채 잡고 드잡이판 벌이고 싶은 마음을 억눌렸다. 아, 저쪽. 그녀를 목격했다. 가장 낮은 야자수 밑에서 크리스토프랑 낄낄거리며 웃어대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나랑 눈이 마주쳤다. 나도 태연히 웃어줬다. 그리고 접근했다. 크리스토프는 엄한 상황을 피하고 싶었는지 리사의 빈 샴페인잔을 들고 바카운터로 꺼져버렸다. 점점 커지는 그녀의 핑크 파스텔 꽃무늬 스트랩 드레스가 압권이었다. 앞은 평범해 보였으나 등은 거의 엉덩이 볼 협곡선이 보일랑말랑 할 정도로 남쪽으로 깊숙이 파여있었다. 이건 드레스가 아니라 다이소 부엌 앞치마다.
“Love your dress.”
(드레스 이쁘네.)
“Thanks..”
(고마워..)
“Where’s the rest of it?”
(나머지는 어디다 두고 왔니?)
“Very funny.”
(웃기냐?)
“I mean, did you really have to send that fake survey around?”
(아니, 굳이 그 가짜 설문을 돌려야 했어?)
“It’s just a joke! Chill out..”
(그냥 장난이야! 좀 진정해라..)
“Anyway, who did you tell? About me.”
(어쨌든, 누구한테 말했냐? 나에 대해서.)
“Christof and a few others..”
(크리스토프랑 다른 몇 명에게..)
“Ughh.. I want to throttle you..”
(아휴.. 네 목 조르고 싶다..)
“Who cares, Saejin? It’s 2005. No one cares!”
(세진, 아무도 상관 안 해! 2005년이야.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Well, I do.”
(하지만 난 신경 쓰여.)
사과는커녕 오히려 나를 윽박지르고 있었다. 흠. 방음문이 열리더니 리사 등 넘어 저 멀리서 레이코가 아트리움 안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녀도 인테리어 세트에 감동했는지 동그라 해진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So are we still friends?”
(우리 여전히 친구지?)
“Whatever. Anyway, I want to say hi to Reiko.”
(몰라. 어쨌든 레이코한테 인사나 하련다.)
그녀가 나를 허그했다. 나도 무덤덤히 리사를 팔로 껴안고 촉촉한 손등을 드레스 앞면에 쓰윽 문질렀다. 그리고 지나가는 웨이터의 은쟁반에서 갓 따른 샴페인 두 잔을 들고 레이코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하얀색 와이셔츠 끝단을 배꼽 위로 묶고 데님 핫팬츠 위로는 대형 실크 스카프를 사롱치마처럼 두르고 있었다. 물론 에르메스 (Hermès)였다. 푸른 바다와 요트들로 구성된 수채화 프린트 위에는 유쾌한 필기체로 칸느 (Cannes), 생트로페 (St. Tropez), 멍통 (Menton), 앙티브 (Antibes), 캅페레 (Cap Ferret)등 여러 지명들이 랜덤 하게 적혀있었다.. 유럽인 누구나 이 고가 천대기에 나열된 남부 프랑스의 해변 마을 중 아무 데나 골라 휴양 별장 장만하는 게 은퇴 로망이다.
레이코에게 잔을 건넸다.
“To Antibes! Cheers!”
(앙티브를 위하여! 건배!)
“Haha, cheers!
ところが.. you looked a bit upset this afternoon.. 大丈夫?”
(하하., 건배!
그런데.. 오후 때 좀 심란해 보였는데.. 괜찮냐?)
기다렸다는 듯이 입에서 저절로 나와버렸다.
“Reiko. I’m gay.”
(레이코. 나 게이야.)
그녀가 왼손뺨과 샴페인잔을 부딪히며 앵콜 박수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 너무 일본인 같다.
“あら! めっちゃ嬉しい!”
(어머! 너무 기뻐!)
나도 모르게 그냥 속시원히 말해버리고 싶었나 보다. 나중에 뒷소문으로 흘겨들을 바에 차라리 내입으로 당당히. 천장이 트인 아트리움처럼 가슴도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조금 비호였다고나 할까. 전혀 내가 예상했던 리액션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서운했다. 통상 ‘어머, 너 마음고생 많이 했겠구나’ 정도의 한마디 던져주는 게 예의 아니겠느냐? 레이코는 샴페인 몇 모금 더 마시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호주 멜버른 밖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솝 (Aesop) 핸드크림을 소지하고 있는 걸 보고 스트레이트 남자이기에는 너무 섬세한 것 같았다고.
“You have lovely piano hands by the way..”
(근데 너 피아노 칠 것 같은 예쁜 손 지니고 있네..)
좀 뚱딴지같은 멘트였다. 하지만 간간히 손 예쁘다는 칭찬 듣는다. 특히 클럽 입장 시 손등에 도장 찍어줄 때. 문지기들은 수만 개의 손을 봤을 테니 그냥 빈말은 아니었을 거다. 어쨌든 글로벌 유행에 서너 발 앞선 도쿄에도 상륙한 지 얼마 안 된, 패션계 인싸들만 입소문으로 입문하게 되는 이솝크림을 가방에서 꺼내 쥐어짜 쓰는 모습 보고 짐작했다니. 그리고 한동안 까먹지 않으려고 애쓴듯한 질문을 던졌다. 자기 같은 수분 부족 지성형도 리치한 텍스처의 이솝 보습라인을 써도 괜찮을 것 같냐고 (못쓴다). 이런 고민을 들어줄 친구가 생겨서 내 커밍아웃을 무척이나 반겼던 걸까? 이런 잡화 상담 게이 친구, 너무 클리셰 아닌가? 사실 세계 원톱 모델 케이트 모스도 애지중지한다는 끌레드뽀 (Clé de Peau)의 극소분자 루스파우더마저 레이코의 번들거리는 T존을 커버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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