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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와거울 Jun 28. 2024

끽연

  축사가 끝난 지 한 시간이 채 안 됐다. 그런데 우리는 벌써 변동금리를 고정금리로 변환시키는 이자율 공식을 엑셀칸에 두드리고 있었다. 이 고정금리를 ‘swap rate’라고 부른다. 일상과 완전 동떨어진, 쓰잘데기 없는 외계 컨셉 같을 수 있지만 이 개념은 이미 주변에 푹 녹아있다. 미국의 흔한 30년 고정금리 주택담보대출이 좋은 예이다. 30년 동안 세계 경기가 몇 번이나 뒤집히고 난리 날 수 있는데 어느 듣보잡 시골은행이 30년 고정금리로 돈을 대주겠다고? 스미스 은행장이 정신 나간 게 아니라 배후에는 변동금리와 고정금리를 수시로 맞바꿔주는 이자율 트레이더들이 포진되어 있기에 이러한 상품들이 시중은행 통해 출시 가능한 거다. 이 트레이들을 글로벌 부채시장의 윤활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머리까진 베르나르 (Bernard)는 강단에서 마이크 잡은 채 잡담 섞인 설명을 하고 그의 젊은 금발 동료 베로니크 (Veronique)는 바로옆에서 프로젝터에 연결된 노트북에 수학공식을 타이핑했다. 이 두 명의 벨기에 강사들이 3개월 동안 우리 주스승이었고 나중에 그들의 수업을 BV쇼라고 칭했다. 어라, BV쇼라... 차라리 훈훈한 수석 디자이너 토마스 마이어 (Tomas Maier)에 의해 떡상한 보테가 베네타 (Bottega Veneta)의 패션쇼였더라면. 흠.


  그런데 베르나르의 노골적인 편애, 아니 집착은 꽤 심했다. 이 아저씨는 수업도중 손에 마이크를 든 채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크리스토프라는 연수생에게 농담 섞인 어조로 여러 번 대시했다.


  한 예로 강연도중에 날씨 좋은데 크리스토프랑 프랑스 남부 해변가에 놀러 가 모래 위에서 실컷 뛰어놀았으면 좋겠다라던가 (그는 아마 누드비치를 상상하고 있었을 거다) 또는 어제 크리스토프의 넥타이 너무 멋져서 자신도 아침에 옷장을 뒤져 비슷한 색깔의 넥타이를 매고 왔다고 말한다거나.. 그리고 설명의 모든 예시에 크리스토프를 연루시켰다. 예컨대 도이쳐 크레딧이 크리스토프가 CEO인 자산운용사와 금리 옵션계약을 체결했는데 시장 변동성과 시간경과에 따라 옵션 가격이 어떻게 변할지 한번 그래프로 그려보자고. 그런데 어머, 곡선을 그려보니 크리스토프 이두근육처럼 생기지 않았냐 등등. 서유럽은 포스트게이 (post-gay) 사회라 많은 연수생들은 태연하게 웃어넘겼지만 어떠한 연수생들은 좀 어색해하는 분위기였다. 베르나르가 헛소리를 할 때마다 베로니크는 바로 옆에서 표정 하나 안 바뀐 채 노트북의 쫀득한 숫자키보드를 침착히 눌러댔다. 그녀는 남우조연만 계속 대체되는 이 쇼를 여러 번 시청한 듯 보였다. 연수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베르나르와 베로니크가 결혼한 커플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말이다, 한국이나 서양이나 남자들은 자신의 스트레이트 성정체성이 확고할수록 본인이 게이로 비추어질 수 있는 농담이나 암시에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그럼 나 혹시 게이인 건가?’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반면에, 성정체성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서 헤매고 있는 통스트레이트 코스플레이 남자들이야말로 게이란 단어가 튀어나올 때마다 예민해진다.


  베르나르는 강연도중 일본 학생들이 밀집되어 있는 구역을 어이없게 바라봤다. 열명 전원 헤드뱅잉하며 졸고 있었다. 새벽 컵라면 미원빨인가? 아니면 시차인가? 도쿄와 같은 시간대인 서울특별시에서 온 나는 멀쩡한데 말이다. 연수프로그램의 종합시험을 낙방해도 도쿄로 돌아가면 사전에 확정된 보직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대범하게 객기를 부리고 있는 건가? 보직이 미정인 연수생이 시험낙제 꼬리표를 달면 어느 한 팀으로부터나 합류하지 않겠냐는 러브콜을 받기는 꽤나 어려울 거다.


  “Let’s break for 10.”

  (10분 쉽시다.)

 

  베르나르의 반가운 한마디. 안 그래도 연수 첫날, 첫 교시부터 수학공식 때문에 머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종이컵에 필터커피 한잔 채우고 바깥공기나 좀 쐬고 싶었다. 연수생들 모두 뒷문을 향해 통로에 우르르 모여들었다.



  변덕스러운 런던 날씨는 우중충하고 서늘했다. 한여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로비정문옆에 마련된 흡연 구역에서 뒷열에 앉은 이름 모를 일본 여자가 반짝거리는 쇠붙이 라이터를 가방에서 꺼내고 있었다.


  붉은 염색기 없는 긴 올빽 생머리. 스타일링 제품 때문인지 그레이 햇살에도 옻칠 같은 블랙 윤기가 반사했다. 창백한 안색. 가냘픈 얼굴선. 카키색 매니큐어. 피팅된 블랙 투피스 바지 정장. 왼손에는 담배, 오른팔 안쪽에는 프로엔자 스쿨러 (Proenza Schouler) PS1 가죽백이 걸려있었다. 뉴역, 런던, 파리 패셔니스타들이 환장하는 잇템이지만 로고 모노그램 결핍으로 강남에서는 찬밥 신세다.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뭔가 설정된 패션 교과서 같은 느낌이었다. 발행부수가 일부러 제한된, 시대를 앞서는 도쿄-파리 에디터들의 콜라보 잡지 화보 한 컷 같았다. 비 오는 날 만개한 벚꽃 잎이 떨어져 분홍빛깔을 띈 메구로강과 구름 낀 하늘이 비친 음산한 연회색 빛깔의 센느강이 교차하는 간지라고나 할까. 그녀의 적당히 퇴폐적인 시크함은 쪌었다. 더욱 궁금해져 다가갔다.


  “すいません。 一本をちょっと借りてもいいですか。”

  (미안해요. 한 개비 빌려도 될까요?)


  “メンソルしかないのに.. 大丈夫ですか。”

  (멘솔밖에 업는데.. 괜찮아요?)


  “むしろメンソルが好きですよ。”

  (오히려 멘솔이 좋아요.)


  그녀가 담배를 건넸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로즈골드 까르띠에 (Cartier) 빈티지 라이터를 켜줬다. 정말 목소리가 허접하게 더빙된 옛날 서양 영화에서나 볼듯한 골동품이었다.


‘분명히 도쿄 미나토구(港区)에 살고 있을 레이코. 이 미나토걸 폼생폼사 제대로구나..’


  미나토구의 이미지를 풀이하자면 한남동, 광화문 그리고 여의도보다 몇 배나 세련된 건축물로 구성된 동네들이 전부 한 구역에 밀집되어 있다고 상상해 봐라. 많은 외국계 은행들은 미나토구의 고급 주상복합에 위치하고 있어 도쿄 증권시장이 개장하기 전에 새벽 택시로 출근하는 전문직 여성들은 퇴근길 호스테스로 자주 오해받는단다. 하얀 면장갑 낀 검정 MK 택시 기사로부터 ‘오츠카레사마 데시타 (お疲れ様でした; 수고하셨습니다)’를 종종 들으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고..


  “ソウルから来たソンセジンと申します。 初めまして。”

  (서울에서 온 손세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ああ、 私の前に座っているようですね。東京支社から来た遠野玲子と申します。 初めまして。

  (아, 제 앞에 앉았죠? 도쿄지사에서 온 토오노 레이코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나는 ‘아버지 뭐 하세요’가 아니라 ‘할아버지 뭐 하셨어요’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는 80년대 긴자(銀座) 초특급 버블경제가 남긴 인간 문화유산 같았다. 오늘날 긴자의 멘탈 등대는 호리호리한 시세이도 사옥이 아니라 레이코와 같은 여인들이 발산하는 레트로 향수가 아닌가 싶다. 그 당시 긴자의 코딱지만 한 땅덩어리의 값어치가 캘리포니아주 전체에 버금갔다니. 일본에 대한 감정은 복잡하지만 정말 자본력 하나로는 땅끝가지 가본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을 인정 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담배는 불합격. 한쪽 끝에 민트껌이 들러붙어있는 빨대를 빠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今年韓国から唯一来た研修生だと聞いたんですけど.. 本当ですか。”

  (올해 한국에서 온 유일한 연수생이라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そうです。”

  (네, 맞아요.)


  “少し負担になりますね..”

  (조금 부담되겠어요..)  


  “まあ.. おそらく考え次第でしょう。ところでさっきそっちの悩みもあるようですが..”

  (뭐.. 아마 생각하기 나름이죠. 그건 그렇고 아까 그쪽의 고민도 있는 것 같던데요..)


  레이코가 당황한 듯 나를 힐끔 쳐다봤다.


  “私のため息はとても大きく聞こえましたか。 とにかく日本語はどのように学びましたか。”

  (제 한숨이 그렇게 크게 들렸나요? 여하튼 일본어는 어떻게 배우게 되었나요?)


  “ああ、それは軍服務の時..”

  (아, 그건 군복무 때..)


  나는 군생활을 용산미군부대에서 했다. 카투사 통역병으로 말이다. 근무시간은 미군들하고 똑같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였다. 전투놀이라고 해봤자 일 년에 한두 번 사격장에 가는 것뿐, 그냥 군생활자체를 좀 빡센 영어캠프라고 설명해도 하자가 없을 정도였다. 제대하기 전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군복 입은 증명사진 몇 장이라도 찍어놓아라..

  네가 대한민국 군필자라는 거 누가 믿겠냐?”

  

  근무 외 시간은 기운 넘쳐흐르는 청년들 멍 때리게 만드는 삽질이나 잡초 뽑기 같은 작업 일도 없는 자유시간이었으며 카투사들은 미군처럼 부대밖으로의 외출이 가능했다. 아무튼 용산의 지리적 특성은 내 교육열을 불태웠다. 남들은 TV앞에서 플레이스테이션 컨트롤러 만지작거릴 때 나는 내 찐 군생활을 인근 종로 학원가에서 보내다시피 했다. 6개월 동안 야간 직장인 일본어를 수강하고 그 이후에는 미국 공인회계사 시험 준비반 학원을 끊었다. 다만 부대 통금이 저녁 10시여서 항상 아슬아슬하게 막사로 복귀했다. 취미 삼아 정식으로 일본어를 배워보고 싶었는데 이때 아니면 기회가 또 없겠구나 싶었다. 나중에 단체생활은 소홀히 하고 혼자 학원이나 다니며 개인플레이한다고 고참들이 점호 때 인민재판까지 세웠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제대하고 나서 우리 부대에서 학원붐이 일었다고 한다. 용산 중고가구센터에서 단돈 만원으로 건진 책상을 서로 가지려고 싸움까지 벌어졌다는 소문도 듣게 되고.

 

 “So there you are! I was looking all over for you guys! Do you guys want anything from Starbucks? The cheap ass coffee in there’s absolutely disgusting!”

 (여기 있었구나! 너희를 사방에서 찾았단 말이야! 스타벅스에서 뭐 사줄까? 호텔 개싸구려 커피 도저히 못 마셔주겠어!)


  리사가 호텔정문에서 택시 트렁크에서 짐 꺼내는 게스트들이 듣건 말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Hey girl, I’m good. Thanks.”

  (야, 나 괜찮아. 땡스.)


  눈감고 레이코 답변을 들었더라면 그녀가 LA 다저스 야구장에서 노랑 형광 겨자 듬뿍 묻은 핫도그를 꾸역꾸역 먹고 있는 양키인 줄 알았을 거다. 나도 덩달아 괜찮다고 답했다. 어쩌면 레이코도 나처럼 자국사회에 완전체로 융화하지 못하는, 이방인 같지 않은 이방인일까?

 

 “Okay, see you guys in there!”

  (알았어. 너희들 안에서 봐!)


  레이코에게 물었다.

 

 “Did you grow up in the States?”

  (미국에서 자랐어?)


  “I was born in Tokyo but spent my early years in Chicago. And then in high school, I went back to Winnetka as an exchange student.”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유년기를 시카고에서 보냈어. 그리고 고등학교 때 교환학생으로 다시 위네트카로 갔고.)


  나는 손바닥을 양볼에 대고 입을 크게 벌린 채 소리 지르는 시늉을 했다. 레이코가 깔깔대고 웃었다.


  ‘아름다운 땅’이란 의미를 지닌 이 아메리칸 인디언 지명이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위네트카는 ‘나 홀로 집에’ 영화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시카고 교외지로, 미국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초고급 주택가이다. 인근에는 30개 이상의 노벨상을 받은 동문과 교수진으로 유명한 노스웨스턴 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어머, 노스웨스턴대 교수가 올해 화학 노벨상을 탔데요’라고 흥분된 목소리로 이웃에게 말하면 첫 반응은 즉흥적인 경이로움이 아니라 ‘아니, 올해 또요?’의 침착한 되물음이다. 그리고 이 대학의 재단은 어느 중남미 국가 GDP 뺨칠 정도로 빠방 했다. 이 자그마한 지역에 축적된 부의 원천은 미중서부에 뻗쳐있는 자동차, 철강, 기계, 제약, 화학등 ‘Made in USA’ 일선에 있는 글로벌 기업들이다. 레이코의 성이 일본의 다국적 욕실기구 제조사인 토오노(遠野)와 같고 이 회사의 미국 본부가 주택건설 경기가 왕성한 중서부 일리노이주에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봤을 때.. 혹시 레이코는 토오노 제국의 비데공주였던 걸까? 로열 플러쉬란 포커 용어가 문뜩 생각났다. 연희대 국제경영 강의 때 미국 위생기구 시장 점유율 전략에 관한 하버드 경영대 케이스스터디를 접한 경험이 있어 이 같은 쓸데없는 잡식을 본의 아니게 숙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코가 굳이 치열한 경쟁을 감내하며 도이쳐 크레딧에 입사한 걸 봐서는 진정한 토오노 비데공주의 먼 사촌뻘이 아닐까 싶었다.

 

 레이코가 담배를 힐로 끄며 말했다.


  “Class is about to start. Let’s head back.”

  (곧 수업이 시작될 거야. 어서 들어가자.)


  그리고 우리는 호텔 지하 볼룸 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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