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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와거울 Jul 17. 2024

[언어라이브드] K게이 런던 뱅커 성장기: 캘리 1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할 거다. 아니, 어떻게 이태원 뒷골목에서 단 두 시간 만난 사람 보러 지구 반대편행 비행기에 탑승하냐고. 하지만 웰즈랑 농담 섞인 이메일을 대화처럼 주고받다가 친근감의 싹이 트였다. 아니면 내가 간절히 트이길 바랐던 건가. 어찌 됐던 런던으로 떠나기 전 남은 휴가를 모조리 써버려야 했고 웰즈에게 민폐 끼치기로 작심했다. 그 또한 ‘노우’라고 답할 것 같지 않았기에 용기 내어 샌프란시스코에 놀러 가 신세 좀 져도 괜찮겠냐고 물어봤다. ‘웰즈, 너도 휴가내서 같이 차 끌고 인근 와인 농장이나 견학 다니면 어떻겠냐’식의 꼴값까지 떨면서 말이다.


  회답은 생각보다 즉각적이었다.


  단답형 문체가 아닌 장편의 메일이 도착했다. 누군가가 물아봐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한겨울 동태찌개처럼 알 꽉 찬 바캉스 여정을 제안했다. 거의 패키지투어 버금가는 야심찬 계획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웰즈도 나한테 마음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아무한테나 이렇게 자상하신 걸까?


  “I need to take mandatory leave for a fortnight as well. Let’s start in Carmel, then Napa and finish off in Lake Tahoe? I reckon we spend the last weekend at my place in San Francisco..

  (나도 의무적으로 2주 휴가를 써야 해. 카멜에서 시작해서 나파를 거친 후 레이크타호에서 마무리지으면 어떨까? 마지막 주말은 샌프란시스코 내 집에서 보내면 되고..)


  오. 실한 구성.


  .. my colleague recommended this stonking site with a short list of boutique B&Bs. Best thing since sliced bread. Have a look and tell me which ones take your fancy?

  (.. 내 동료가 부띠끄 B&B 숙소를 셀렉트한 기똥찬 사이트를 권유했어. 한번 보고 어느 게 마음에 드는지 알려줄래?)


  웰즈의 본격적인 작문 실력 처음으로 당해 본다. 잠깐 런던 살았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미국인들은 생소해할 영국식 맛집 표현들이 섞여있었다. 불혹의 40을 넘어서도 ‘헤이맨, 왓츠업’ 어투로 말하면 덜 떨어져 보이는 건 물론, 정 떨어진다. 미국 남부 써던가이 웰즈가 더욱더 매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주가 또 상한가 찍으려 하네. 마음이 피곤해진다.


  .. have you thought of which wineries you want to visit? We can take a detour from Napa to Sonoma to check out this vineyard that’s been on my radar forever..

  (.. 어느 와인 농장 견학하고 싶은지 생각해 봤어? 나파에서 소노마로 우회해서 내가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농장도 들르고..)


  ‘네가 와인 들이키면 운전은 누가? 국제면허 신청하기 너무 늦어버렸는데..’


  .. and the food in these places are out of this world. I’ll get a table at The French Laundry before they win their third star and prices quadruple overnight..”

  (.. 그리고 이 동네 음식 기가 막혀. French Laundry 예약할게. 세 번째 미슐랭 스타 받은 뒤 하룻밤 사이로 가격이 네 배로 뛰기 전에..)


  말로만 들어본 그 저명한 후렌치 런드리? 한 달 내 예약 잡기 불가능일텐데. 굿럭.


  이메일을 다 읽자마자 취리히 증권 인턴 때 질리도록 닦달 대고 웨이팅 좌석 풀어달라고 징징댄 여행사에 전화해 서울-샌프란시스크 성수기 왕복표를 발권했다. 웰즈의 마음이 급변할까 봐 결제완료된 여정표를 이메일로 바로 포워딩해 버렸다. 뒤에서 엿듣던 봉사무님이 말씀하셨다.  


 “어우 세진, 휴가 좋은 데 가네.. 샌프란시스코에 친척이라도 있어? 이주씩이나 가게 말이야..”


  “아, 그냥 친구여..”


  “좋은 친구네.”





  태평양 넘어 샌프란시스코까지의 비행시간은 10시간 반. 이토록 느려터지게 흘러가는 10시간 반은 난생처음인 것 같다. 내가 십 분 단위로 손목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봐서 그랬던 걸까? 마음이 동시에 뒤숭숭하고 들떴다. 호랑나비 백여 마리가 뱃속에서 설렌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기내식 양이 부족해 아직도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물론 웰즈가 아니었더라면 무작정 캘리포니아에 갈 엄두도 못 냈겠지만.. LA 인근 와인농장이 무언의 주인공이 된 영화를 보고 나서는 캘리포니아의 어떠한 와인밭이라도 밟아보고 싶다는 로망이 들었다. 'Sideways'란 미국 영화에서 폴 자마티 (Paul Giamatti)는 떠오르는 작가로 등장하는데, 그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영감을 충전할 겸, 곧 결혼하게 될 무명 중년 할리우드 영화배우 친구를 축하해 줄 겸, 총각 로드트립을 주선한다. 행선지는 LA에서 차로 한 시간 떨어진 산타 바바라 (Santa Barbara)에 위치한 와인지대이고. 폴은 싱글이지만 그의 친구도 싱글로 가장하여 둘은 어느 베프사이 여커플을 만나게 된다. 짝짜꿍 남녀 한쌍을 이루어 넷은 금세 친해지고 메를로 (Merlot)종 포도 덩굴들이 춤추며 익어가는 경관을 배경으로 낭만적인 피크닉 잔치를 벌인다. 뻔한 비디오처럼 잠자리도 나누게 되고 뭔가 깊어지지 말아야 할 관계가 끈적해지더나 싶더니.. 폴의 실언으로 그의 친구가 다음 주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이라는 게 발각되고 개빡친 산드라 오 (Sandra Oh)는 폴의 친구와 잔 베프의 손목을 끌어 잡고 숙소 주차장에서 뒤돌아보지도 않고 날라버린다. 어쨌든 영화 내용은 중요치 않다. 화면 속의 진정한 주인공은 프랑스처럼 샤또니 뭐니 과한 치장 없이 나름 호사스러운 캘리포니아의 와인지대였다. 진정으로 나를 비롯한 수많은 시청객을 유혹했을 거다. 이 같이 촬영 로케이션이 실제 주인공이었던 영화가 또 뭐가 있었으려나? 장만옥과 왕조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치파오의 농후한 색감과 휘황찬란한 번체 (繁体) 네온간판들의 우울한 음영으로 대변되는 '화양연화'의 매혹도시, 홍콩.. 또는 줄리 델피 (Julie Delpy)와 에단 호크 (Ethan Hawke)의 달콤 씁쓸한 운명적 원나잇 로맨스를 그린 'Before Sunrise'의 카페도시, 비엔나.. 아니면 호텔방 창가를 배경으로 누운 스칼렛 요한슨 (Scarlett Johansson)의 시스루팬티차림 엉덩이 위로 보이는 신주쿠의 마천루로 첫씬을 시작하는 'Lost in Translation'의 미래도시, 도쿄.. 국내 배급사는 한심하게도 이 영화 제목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고 서툴게 번역하고 홍보 인쇄물에는 물음표 밑 점을 하트로 대체했다. 러브 스토리가 아닌 군중 속 고독과 정의할 수 없는 공허함을 공유한 채 잠시 스쳐지나간 두 이방인의 이야기인데 말이다.


  잡생각 끝에 점잖은 목소리의 기장 안내방송이 스피커에서 터졌다. 현지 시간, 날씨, 공항 체증 상황을 한국어와 영어로 간략히 말해주고 30분 뒤 착륙할 거라고 알려줬다. 기장들 직업병인 것 같은데, 무슨 언어가 됐던 실제로 말한 시간보다 단어 단어 사이의 여백이 더 길게 느껴진다. 별말 안 했는데도 여운이 길다. 마치 무슨 고루한 라디오 방송 심야 시낭송회처럼 말이다. 승객 한둘씩 화장실로 향했고 뒤로 젖혀진 의자들은 다시금 90도 각도로 원위치되고 있었다. 곧 도착할 거라는 안도감에 긴장감이 쫙 풀리면서 졸음이 미친 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Cabin crew, 10 minutes to landing.”

  (승무원들. 10분 후 착륙. 준비해 주세요.)


  띵하고 안전벨트와 금연 등이 켜졌다. 비행기에서 흡연할 수 있었던 80년대 말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옛날 747기에는 팔걸이에 재떨이 철뚜껑이 있었으니, 이게 웬 말이냐. 비좁은 이코노미석에서 곤봉 든 호랑이와 함께 쌍팔담배 물고 태평양을 건넜으려나. 어려서 기억 안 난다. 왼쪽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구름에 낀 금문교가 힐끔 보였다. 희망찬 영화 한 장면 같았다. 신대륙을 밟게 될 이 고무적인 감회. 가슴속 어딘가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썼으면 얼마나 좋을까. 창가 쪽 승객들은 다 플라스틱벽에 눌어붙어있었다. 비행기 창문의 이마 기름 자국 같은 널찍한 얼룩들.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들의 창가가 유난히 미끌미끌거릴 거다.



  입국 심사는 간단했다. 그리고 트렁크가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에 뱉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옆으로는 디올 나시티와 츄리닝을 세트로 입고 검은색 안경다리에 반짝거리는 골드 로고장식이 박힌 선글라스를 뒤통수에 걸친 젊은 남성이 서있었다. 바둑판 문양의 루이비통 레자 크로스바디백은 가슴을 조이고 있었다. 좀 있어 보이려 발악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없어 보이는 이 룩. 공항패션인가? 샌프란시스코의 변덕스러운 여름날씨를 모르나 보네. 이치마츠(市松)란 옛 일본 가부키 배우가 바닥에 정렬된 타타미에 영감 받아 체크패턴으로 본인 무대의상을 다지 인했다는데, 루이비통은 이 심플한 디자인과 함께 벚꽃을 모티프로 한 일본 전통 가문문양을 브랜드 비쥬얼 아이덴티티로 모방했다. 그는 보호천으로 씌워진 리모와 알루미늄 트렁크 위에 옆구리가 터질 것 같은 면세 쇼핑백을 쥐고 있었다. 리모와 철가방은 기스 나고 찌그러질수록 멋있다는 게 직감적으로 안 와닿을까?.. 여하튼 두근두근 거리는 설렘에 앞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웰즈는 까먹지 않고 공항에 마중 나오겠지? 모든 교신이 이메일인터라 불안했다. 내 여정표가 첨부된 이메일이 서버로부터 제대로 다운되지 않았거나, 웰즈가 딴짓거리하다 무심코 삭제됐거나 아니면 아예 스팸박스로 떠넘겨졌거나. 아니다. 그가 이렇게 확답했다. “So I guess I’ll be collecting you from the airport on Saturday?” 이 뜻은 마중 나온다는 쪽에 무게를 실어줘야 한다. 항상 웰즈의 반장난식, 성의 부족형 말투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내 트렁크는 벌커덕하고 주위 가방들을 요란하게 부딪히며 튕겨 나왔다. 태그를 확인하고 세관검색대 그린라인을 따라 입국장으로 드디어 나갔다. 좌우로 고개를 돌렸더니 왼편 멀리 멀대같이 큰 웰즈가 손 흔들고 있었다. 활짝 웃고 있었다. 고민이 됐다. 악수를 청해야 할지, 허그를 할지, 아니면 그냥 과감하게 볼에 키스를 할지. 어차피 하게 될 거 지금 해버리면 속도위반인가? 까지것 볼인데 말이다. 웰즈는 다른 한 손으로는 하얀 종이 쪼가리를 들고 있었다. 거리 때문에 아직 읽히지 않았다.


  ‘저 사람 혹시 웰즈처럼 생긴 호텔 기사 아니겠지?..’


  혹시나 내 뒤에 있는 사람을 향해 손짓하고 있을까 봐 뒤돌아봤다. 승무원들 뿐이었다.  


  은갈치처럼 희끗희끗 해지기 시작하는 구레나룻이 시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연 웰즈다. 그리고 손에 든 종이를 향해 눈을 찌푸렸다.


  [Mr. SON. 어서오시요!]


  나이와 중책에 어울리지 않게 깜찍한 일면이 있는 웰즈. 여전히 웃겼다. 다음 휴가 때 연희대 어학당이나 같이 다니자고 할까? 웰즈는 표준어 회화 입문. 나는 직장인 중급 작문. 그의 앞으로 다가가 트렁크 바퀴를 주차시켰다. 그리고 가볍게 포옹하고 뒤꿈치를 치켜세운 채 오른쪽 볼에 입술을 댔다. 물론 태연하고 쿨한척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었다. 그의 은은한 향수 냄새가 불과 몇 주 전 이태원 골목길에서의 헤어짐을 생생히 상기시켰다. 후각과 기억의 관계는 어떻게 이토록 정밀할 수 있을까. 심지어 잔인하기까지 느껴졌다.


  “How was your flight? I can certainly guess what you ate for dinner! My little Korean yang-nyeom chicken!”

  (비행 어땠어? 네가 저녁식사로 뭘 먹었는지는 알아맞힐 수 있지! 내 귀여운 코리안 양념치킨아!)


  “Ha. Oh please.”

  (웃겨? 제발.)


  고춧가루, 간장 그리고 마늘로 범벅된 닭강정 덮밥 석식을 들켜버리고 말았다. 웰즈가 서울 특파원으로 야근할 당시 고칼로리 야참으로 많이 먹었을법한 요리다. 기내식은 둔해진 미각을 곤두세우기 위해 간이 더 세게 들어간다고 하지 않더냐. 나는 마지막 밥알까지 깨끗이 먹어치웠다. 짜면 페퍼민트맛 치약이 나올 것만 같은 고추장 플라스틱 튜브봉도 비워버렸다. 밥맛 급감시키는 이 난해한 포장 컨셉- 누군가가 미래에 봉지땅콩을 60년대 크리스탈 재떨이처럼 생긴 그릇에 소분하지 않아 기내 서비스 품격 떨어진다고 지랄할게 아니라 이런 디테일이나 신경 좀 써주시지.


  웰즈가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귀안에 속삭였다.


  “So you missed me so much to come all the way here?”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여기까지 온 거야?)


  그의 한쪽 귀에 답했다.


  “Had some expiring air miles. It’s nothing personal.”

  (만료되는 마일리지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마.)


  “Ouch! Cheeky!”

  (센데! 싸가지!)


  “It’s good to see you again.”

  (다시 봐서 반가워.)


 진심으로 반가웠다. 눈빛이 간절하게 반짝이지 않았길 바랐다.


  “We have a busy day ahead of us. Let’s hit the road.”

  (오늘 일정 빠빠. 출발하자.)


  BM 모터스 최신 9시리즈 세단의 조수석에 앉은 채 금문교 반대방향으로 하향했다. 웰즈가 건네준 위성 라디오 메뉴판을 훑었다.


  “You’re in charge of the music now.”

  (이제 음악담당은 너다.)


  채널수는 중국집 요리 차림표만큼 길었다. 'Urban hits'란 채널로 돌렸더니 베이스에 힘입은 험난한 힙합이 흘러나왔다. 'Urban' 본래 뜻은 '도회적'이라 타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와 같은 상큼한 시티팝(?)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에서는 힙합을 토대로 흑인들이 주 아티스트인 장르를 모조리 싸잡아 'urban'이라 지칭한단다. 한마디로 난잡한 도심속 슬럼을 연상케 하는 은유법이다. 대놓고 양지화된 이 은근한 언어차별- 역시 언어는 권력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내가 싫어하는 대중화된 단어 'ethnic.' 단지 '인종의'란 뜻을 지닌 형용사이지만 실상에서 활용되는 의미로는 '타인종의' 정도의 해석을 하면 적합할 것 같다. 다시 말해 백인 유럽계가 아닌 유색인종의. 미국 슈퍼 가면 아시아나 중남미계 음식재료 파는 코너를 흔히 'ethnic aisle'이라 부른다. 차라리 'global aisle'이라고 부르던지. 나에게 'ethnic'이 풍기는 이미지는 벌거벗은 웃통에 말린 야자수 낙엽으로 만든 빤스 걸치고 아침끼니를 넓적한 바나나 나무 잎사귀로 만든 일회용 접시위에 쌈 싸 먹는 맨발 원주민이다. 유럽인의 관점에서 호기심 자극하는 비문명화, 미개함의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다. 오리엔탈리즘처럼 말이다. 이런 문맥도 모르고 'ethnic'이란 용어를 마구 복창하는 아시안 아메리칸들 보면 달갑지 않다. 어쨌든 미국 현대 이민 역사를 태생 국적과 인종의 벽을 허무는 'the great equaliser'(대대적 평등화)라고 슬로건화 하는데 이는 완전 허구다. 서유럽에서 유색인종 취급받던 올리브 피부색의 남부 유럽인, 연속되는 자음 때문에 이름 읽을 때 시각적인 인지부조화 느껴지는 동부 유럽인 또는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 온 유대인들에게나 효력 있는 구호인듯.. 여하튼 비트가 점점 거세졌다. 창문 내리고 블랙 K95 마스크 쓰고 기관총만 들면 우리 둘은 대낮에 은행 털고 도주하는 21세기 게이판 보니 앤 클리이드(Bonnie and Clyde)처럼 보였을 거다.


  “Hey, could we try something different? My hands are vibrating.”

  (다른 노래 틀면 안 될까? 손 울려.)


  “Sure.”  

  (그래.)


  그리고 그웬 스테파니가 나오는 최신 팝채널로 돌렸다. 웰즈는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니, 애창했다. 웃겼다. 출퇴근 시 차 안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나 보다. 고속도로 옆차선에서 달리는 운전자가 싱어롱 하는 웰즈를 보고 피식 웃었을 거다. 그리고 카멜의 자그마한 해변 절벽에 위치한 B&B (bed & breakfast; 조식이 제공되는 아담한 호텔. 주로 대저택을 개조한 건물 사용)에 도착했다. 해는 이미 저물어 있었다.


  공항 픽업 기사님에게 땡큐하고 짐을 트렁크에 꺼냈다. 본관으로 들어가 웰즈는 체크인하고 나는 주변을 둘라봤다. 무늬만 B&B이지 여기는 고급 서양식 료칸이나 다름없었다. 안내원 따라 방에 들어갔더니 벌써 장작나무는 화로에서 빠삭 소리 내며 타고 있었다. 초여름 북캘리포니아 여름날씨가 이렇다. 나는 화장실이 중요하다. 불 켜고 들어가 타월을 만지작거렸다. 두툼하고 제법 무거웠다. 그러고 나서 침대에 앉아 하얀 시트에 손바닥을 비벼댔다. 아마 제곱미터당 900그램 나가는 최고급 이집트산 순면. 실크처럼 은은하게 번들거렸다. 자다가 침대에서 미끄러질 수도. 웰즈는 안내원에게 팁을 주워주고 방문을 닫았다.


  “So what do you think? I got us the honeymoon suite.”

  (어때? 허니문 스위트로 골랐어.)


  “It’s lovely. But shouldn’t we get married first?”

  (너무 마음에 들어. 그런데 우선 결혼이 수순 아닐까?)


  오버했나? 말해놓고서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웰즈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No, we should have dinner first.”

  (아니, 저녁식사가 수순이지.)


  “Okay, let me have a quick shower.”

  (알았어, 금방 샤워할게.)


  세면가방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간단히 했다. 싱크 거울뒷면에 온열대가 있어 김이 전혀 끼지 않았다. 럭셔리는 사소한 한 끗 차이이다. 웰즈는 미묘한 감정을 모조리 드라이한 유머뒤에 숨기는 게 몸에 밴 건가? 사람들이 가까이 접근하려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과거 쓰라린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가? 그의 마음의 문을 찾는 게 어려웠다. 그런데 자물쇠 따고 무장 침입하더라도 미궁이 나오면 그것도 나름 문제일 텐데.. 뺑뺑 돌며 카트를 이빠이 채우기 전까지는 계산대가 절대 나오지 않는 아이키아 (IKEA) 매장 구조처럼 말이다. 이럴 바엔 허송세월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차라리 문밖에서 대시하는 게 나을지도.



  저녁은 호텔 인근 레스토랑에서 했다. 걸어가는 길에 웰즈가 내 오른손을 잡았다. 그런데 몇 발자국 가더니 금방 놓아버렸다. 안 하느니만 못하다. 내 양손을 호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사실 나랑 웰즈는 아직 초면이나 다름없지.. 급하게 서두를 필요 없잖아? 미국 정통 핫도그와 햄버거를 팔 것 같은 아담한 통나무집 식당에 들어갔다. 전구다마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촛불잔치였다. 마음 구석까지 따뜻해졌다. 예약 자리에 앉고 둘 다 오늘의 신선재료로 만든 쓰리 코스 요리를 선택했다. 통나무집 캘리포니안 오마카세. 10년 뒤 이 단어는 서양 요식업계에서 불처럼 번진다. 하물며 순차적으로 나오는 여덟 개의 피자조각을 갖다 놓고서는 오마카세 코스라 부르는 피자집도 한둘씩 생겨나기 시작한다. 좀 짜증 난다.


  긴장한 터라 무슨 음식을 시켰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리고 레드 와인병은 반쯤 비어있었다. 볼터치한 듯 웰즈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있어다. 그가 내 발옆에 자기 신발을 댔다. 테이블 다리인 줄 알았겠지. 내 발을 살며시 옆으로 옮겼다. 그의 발이 따라왔다. 테이블 밑 이 앙증맞은 놀이를 ‘footsie’ (풋씨)라고 한다. 디저트가 나올 때쯤에는 서로의 종아리가 아예 맞대고 있었다. 처음에는 삐걱거리던 대화가 자연스러워지고 주기적인 웃음소리가 대화의 공백을 메꾸어줬다. 촛불에 비친 웰즈의 회색 눈동자가 유난히 깊어 보였다. 별빛 밤하늘 아래 심해 속으로 첨벙 소리 없이 퐁당 빠져들고 싶었다.


  “Should we slowly make our way back?”

  (그럼 서서히 돌아갈까?)


  “I thought you’d never ask.”

  (이제서야 말하네.)


  돌아가는 길 내내 웰즈는 내 손을 잡았다. 낚시 바늘에 낚인 송어처럼 내 입꼬리는 위로 치켜세워져 있었을 거다. 싸늘한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호텔방문을 열자마자 우리는 비틀거리며 침대에 뻗어버렸다. 웰즈가 두 번째 병 시킬 때 좀 뺄걸. 식당에서 서비스로 준 그라파 두 잔도 꾸역꾸역 챙겨마시고 나왔다. 그런데 셔츠 단추를 풀며 생각이 문득 났다. 원맨쇼이었을 언정 웰즈를 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 같았으나 동침은 오늘이 처음이다. 내 옆에서 쿵하는 소리가 났다. 웰즈는 청바지를 벗다가 밸런스를 잃어 조명스탠드 기둥을 움켜쥔 채 석고 벽면에 뒤통수를 들이받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탈의에 성공했다. 우리는 이집트 순면 바다를 구석구석, 이리저리 미끄러지며 뒹굴었다. 어느새 196센티미터를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기차 검표원이 된 느낌이었다. 부질없이 바빴다. 그리나 부정승차는 끝내 없었다. 술 때문인지 그의 몸과 마음이 서로 따로 놀고 있는 것 같았다. 웰즈가 성심성의껏 노력하는 듯했으나 반응하지 않았다. 시뻘건 얼굴에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하고.. 가지가지하신다.


  “Uhm.. Why don’t we take a rest tonight? I think.. I think I had one drink too many. Toooo ma-ny..”

  (음.. 오늘 밤 쉬는 건 어떨까? 나.. 나 너무 많이 마셨어. 너-무 마니..)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길 목 빼며 기다린 조세핀도 ‘당신, 오늘밤은 그냥 쉬자’라고 나폴레옹으로부터 정중한 부탁을 받았다는데.. 그래, 첫날밤인데 밀린 잠이나 청하자. 비에 젖은 폭죽처럼 발사 한번 제대로 못한 채 불 끄고 잠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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