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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와거울 Jul 12. 2024

[언어라이브드] K-게이 런던 뱅커 성장기: 연락

  어느새 8월 말. 몇 주 뒤면 교육 과정은 끝나고 런던 본사 실무 수습으로 넘어간다.


  오늘 수업 내용은 선물과 옵션 가격 이론이다. 개념이 생소할 수 있지만 둘은 그냥 미래 어느 시점에 특정 금융상품을 약속한 가격에 사거나 팔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그게 개별 주식이건, 주식지수이건, 기름이 됐건. 최초의 선물은 1697년 오사카 거래소에서 체결된 쌀 계약이라 한다.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 시카고 거래소에서는 삼겹살 선물마저 거래된다. 장마 직후 배추가격 파동이 지상파 화면하단 단신으로 뜨듯 미국에서도 크리스마스 전후로 베이컨과 칠면조 도매가격이 곤두박질치면 뉴스거리로 다루어진다. 선물과 더불어 옵션은 원래 이러한 급격한 가격변동의 여파를 어느 정도 완충해 주고자 고안된 파생상품들이다. 하지만 국제 자본시장이 발달하면서 파생상품의 세계는 실생산자와 수요자들의 리스크를 분산시키기 위한 광장이 아니라 호주 특급 메리노 (Merino) 양털 수제 양복, 에르메스(Hermès) 실크 넥타이 그리고 올리버피플스(Oliver Peoples) 뿔테안경을 걸친 채 LCD화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는 고학력 투기꾼들의 카지노가 돼버렸다. Y2K에 개봉된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 등장 인물들과 같은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카지노처럼 말이다.


  베르나르가 뒷머리가 눌려있는 크리스토프를 향해 질문했다.


  “Christof, do you know what the most liquid equity index option is?”

 (크리스토프, 가장 유동성이 높은 주식지수 선물이 뭔지 아나요?)


  자다 깬 것 같은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S&P 500?”

  (S&P 500 지수요?)


  “No, it’s the KOSPI 200.”

  (아니요. 코스피 200 선물입니다.)


  다들 KOSPI가 뭔지 몰랐기에 뚱한 표정들이었다. 모두 모범답안이 미국의 S&P 500, 유럽의 Euro Stoxx 50 또는 일본의 Nikkei 225 주식 지수로 알고 있었을 거다. 나마저 몰랐다. 그런데 충분히 수긍이 갔다. 한국의 직장인들은 물론, 평범한 전업 주부들도 단타로 주가 선물을 거래해 본 적이 있을 거다. 그리고 본인 증권계좌로 직접 선물거래를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은행창구에 오래 앉아봤으면 알겠지만 얼떨결에 좀 엄한 금융상품에 현혹된 기억이 있지 않던가. 창구 언니가 쌀집 계산기 두드려가며 수익률 포텐을 과대포장하면서 ‘손님, 소중한 예금 저리에 썩히지 마시고 이 신상 코스피 주가 연동 상품에 투자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식의 감언이설을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거다. 알게 모르게 대한민국은 진정 파생상품 대국이었던 거다. 그리고 가정까지 침투한 이러한 복잡한 상품들 배후에는 도이쳐 크레딧같은 투자은행들이 있었다. 그들의 제품 설계 노하우를 바탕으로 국내 시중은행들은 별 희한한 투기성 상품들을 앞다투며 꾸준히 출시하고 있었다.


  내 왼쪽에 앉은 리사가 헝클어진 머리를 고무줄로 묶으며 말했다. 분명히 어젯밤을 크리스토프하고 보내고 오늘 아침 일찍 둘이 세수만 하고 부랴부랴 호텔 볼룸으로 달려왔을 거다.


  “Do you think people know I’m sleeping with Christof?”

  (사람들이 내가 크리스토프하고 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Who cares? We’ll all disappear to various offices afterwards. I think the question you should be asking is ‘Does Bernard know you’re sleeping with Christof?’”

  (무슨 상관이야. 우리들 어차피 사방 오피스로 흩어질 텐데. 네가 물어야 할 질문은 베르나르가 그 사실은 알고 있냐가 아닐까?)


  “True. What a let down.”

  (맞아. 얼마나 낙심하겠어.)

 

   오른쪽 어깨너머 인드라는 아마존닷컴에서 의류를 장바구니에 담고 체크아웃 준비 중이 있다. 아르마니(Armani)풍 분위기의 블랙 바지 정장에 소매러플과 같은 작은 디테일이 딸린 베이지톤 계열 블라우스를 고수하는 이 멋쟁이가 아마존에서 옷 쇼핑할리는 없을 테고. 눈을 찡그리고 화면창을 유심히 봤다. 사이즈 S의 여자 간호사놀이 코스튬이었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What the fuck are you buying?”

  (도대체 뭘 구매하냐?)


  “Michele requested it. He said it’s his fantasy.”

  (미켈레가 요청했어. 판타지래.)


  “For him or you?”

  (누가 입을 건데?)


  “Fuck off. It’s his birthday next week.”

  (꺼져. 다음 주 그의 생일이라고.)


  “Right. Is it water proof though?”

  (그렇군. 근데 방수돼?)


  “Shut up. Can you mind your own business?”

  (닥쳐. 제발 신경 좀 꺼줄래?)


  ‘아니. 지가 다 말해놓고선 웬 정색..‘


  미켈레는 인드라와 가깝게 일하는 시니어 세일즈맨이었다. 그는 프랑스와 이태리 럭셔리회사들의 자금부를 꿰차고 있었다. 그들은 회사에서 컴퓨터 스크린 열대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 정면으로 마주 보며 앉아있었다. 위로 툭 튀어나온 머리카락만 보일뿐 얼굴은 항상 가려져있었다. 마치 파리 생제르망(Saint-Germain) 동네의 Café de Flore에서 맛담배의 자욱한 연기 때문에 서로의 얼굴은 가려진 채 상체 실루엣만 어렴풋이 보며 대화하는 커플을 상상케 했다. 1949년에 출판된 ‘제2의 성’으로 구미세계 여성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된 시몬 드 보봐르 (Simone De Beauvoir)가 연인 장폴 사트르 (Jean-Paul Sartre)에게 이런 말을 건네지 않았을까.


  “장폴. 당신 오늘 노벨 문학상 거절 잘했어요. 어차피 상 따위 다 쓸데없어요. 오히려 나중에 당신 생각의 족쇄가 돼버리기 마련이죠.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없죠?”


  “그게 말이지. 커피맛이 좀 씁쓸하네. 이 집 원두가 또 바뀌었나?..”


  “…”


  그런데 오히려 일할 때 서로의 표정이 가려진 이러한 설정이 편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세일즈와 트레이딩의 관계는 태생적으로 앙숙관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커미션에 혈안 된 세일즈는 싼 가격으로라도 고객과 뭔 거래라도 체결하자고 트레이더를 꼬드길 테고 트레이더는 그딴 역마진 따위 가격 줬다가는 본인에게 할당된 버젯 반도 못 채우고 올해 보너스는 꽝일 거라고 반박할 거다. 서로 꼴 보기 싫어 채팅으로만 커뮤니케이션하거나 아예 모두 들으라고 전화기에 달린 마이크 확성기 켜놓고 서로 소리 질러가며 대화하는 사람들도 목격했다. 물론 모든 세일즈맨과 트레이더들의 관계가 이렇게 살벌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인드라와 미켈레의 인텐스한 프로페셔널한 관계를 지탱해 주는 윤활유는 코스프레 섹스가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미켈레가 그녀보다 직급이 훨씬 높은 시니어라서 절대 주눅 들 인드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쪼이면 가격부동자세를 더욱 확고히 밀고 나갈 냉정한 그녀였다.


  등 넘어 뒤에서는 레이코가 쉴 틈 없이 타자 치고 있었다. 절반은 백스페이스키처럼 들렸다. 카키색 매니큐어를 분쇄시키며 야후 메신저로 알렉시(Alexis)와 깨알 터지는 사랑 속삭임을 송수신 중이었을 거다. 그녀는 내 예감대로 토오노 위생기구회사 라인이 맞았다. 피 터지게 치열한 투자은행업계에 굳이 발을 디딜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4학년 때 게이오대 경제학부 교환학생으로 온 알렉시라는 동갑내기 프랑스남자와 눈이 맞았단다. 그는 파리로 돌아가 리만 브라더스(Lehman Brothers)라는 미국계 투자은행의 런던 지점 취직합격 통보를 받았고 동시간 런던 어디선가 우리와 비슷한 연수과정을 밟고 있을 거다. 레이코는 이렇게 런던에서 알렉시와 여름이라도 같이 보내기 위해 도이쳐 크레딧에 취직한 거다. 그녀가 그랬다. 뱅킹에 대한 관심, 사전지식 일도 없는 법대생이지만 본인도 놀랄 정도로 면접 인터뷰를 기가 막히게 고급스럽고 찰지게 잘한다고. 알렉시에게 도쿄에 남으라고 하기에는 본인 커리어에 너무 무게가 될 것 같아 차라리 자기가 런던에 잠깐이라고 오기로 결심했다고 토로했다. 런던 연수가 포함되어 있는 투자은행 신입사원 선발 프로그램에 모조리 지원해 어느 한 군데라도 합격하겠다고 이 악물며 다짐했다고. 연말에 도쿄로 다시 돌아가야 한가는 생각 때문에 때때로 한숨이 절로 나오긴 했지만 그 사이사이로는 행복해 보였다.


  이렇듯 내 주변 삼인방은 몸과 마음이 분주했다. 내 청춘사업만 가뭄이었다. 폭우를 위한 기다림이라고 자기 위안했지만 정말 비 한 방울도 안 내리면 돌이킬 수 없는 사막이 되는 수가 있다. 지금도 발견되는 화석들이 증명하듯 사하라도 빙하기 때는 수심 깊은 바다였다는 걸 잊지 말자..




  베르나르가 옵션 가격을 산정하는 블랙숄즈(Black-Scholes) 모델의 이론적 근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졸려오기 시작했다. 이 모델은 글로벌 파생상품시장의 가격형성을 지탱하고 있는 근간이다. 방콕발 아시아 금융위기로 외화가 급격히 빠져나가 달러가 부족해진 한국이 IMF에 손을 내민 1997년. 고무적인 금 모으기 운동으로 온 국민이 하나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와중 미국 경제학자 두 명은 이 모델로 노벨경제학상을 공동수여했다. 하지만 아무리 혁명적인 모델이라고 해도 결국은 여러 개의 변수로 짬뽕된 수학공식 아니겠는가. 조용하다 싶었던 내 수포자 DNA가 수면 위로 고개를 서서히 들어 올리고 있었다.

 

  엑셀창을 닫고 회사 메일을 열었다.


  미확인 이메일 두 개가 와있었다. 봉상무님이 런던 시간으로 어젯밤 10시에 보낸 한통과 웰즈가 몇 분 전 보낸 하나. 봉상무님은 오늘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첫 발신 이메일을 나한테 보낸 듯하다.


  “어우 세진. 잘 지내? 왜 이렇게 조용하지? 벌써 우리 잊은 거 아니지?^^;”


  솔직히 벌써 잊은 거 맞다. 그리고 상사가 이모티콘 사용하는 거. 개 어색하다.


  “많이 배운 후 서울로 돌아와서 써먹기 바란다. 다들 너만 기대하고 있다고. 연수 시험준비 잘하고 소식도 간간히 알려주길 바란다.”


  물론 돌아가면 시작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을 거다. 하지만 봉상무님의 짤막한 관심표현 이메일에 감사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라도 런던에 눌러앉을 책략을 궁리하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죄송스럽기만 했다.


  다음 이메일을 열었다.


  “Settling well? In town Friday. Drinks?”

  (잘 정착 중? 금요일 런던임. 한잔 어때?)


  전보도 보통 이보다는 길다. 하지만 반가웠다. 그리고 마음이 몰래 부풀었다. 6월 서울에서의 아쉬운 첫 만남을 뒤로한 채 두 달도 안 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다니.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사실 런던연수를 위해 서울 사무소를 떠나기 전, 내년으로 이월되지 않을 2주 치의 휴가를 전부 캘리포니아에서 써버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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